제228화
깜짝 놀란 유엽의 입이 벌어졌다. 황제의 후궁도 가지 못하는 곳이니 왕비는 더더욱 갈 수 없는 곳이거늘…….
결국 풍여영이 그녀를 조심스럽게 말렸다.
“언니, 갈 수 없는 곳이라고 하니 그만두어요. 저도 백두루미를 본 적 있어요.”
백천범은 아쉬운 기색을 지우지 못했지만, 결국 체념한 듯 입을 열었다다.
“그럼 다음에 왕야께 데려다 달라고 해요.”
그녀가 풍여영의 손을 잡고 발걸음을 돌렸다.
“오늘 이 언니와 같이 이야기를 나누면서 자요.”
“좋아요, 언니.”
풍여영이 활짝 웃어 보였다.
“날씨가 쌀쌀하니 함께 자면 따뜻할 거예요.”
그러나 풍여영은 백천범과 한 침소를 쓸 수 없었다. 서 태비가 규율에 어긋난다며 허락하지 않아 백천범은 대전에, 풍여영은 곁채에 들어갔다. 다행히 멀지 않은 옆방이라, 두 사람은 벽을 사이에 두고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두 사람 모두 무술에 관심이 많아 한번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니 끝도 없이 이어졌다. 결국 두 사람은 한밤중이 되어서야 잠을 청했다.
낮잠을 잘 땐 침대 위쪽과 아래쪽에 놓인 화로가 제법 따뜻했는데, 밤이 되니 온도가 급격히 떨어져서 별 소용이 없었다. 그녀는 이불로 꽁꽁 몸을 감쌌지만 냉기는 여전히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한참을 뒤척이던 백천범은 결국 한기가 가신 아침이 되어서야 잠들었다.
곡아가 조심히 장막을 걷어 올리고 그녀를 살펴보았다. 곧 곡아가 유엽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 두 사람은 조용히 방을 나섰다.
유엽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도 안 일어나시다니, 조금 있으면 공 마마께서 오실 텐데 어쩌지?”
곡아가 고개를 흔들었다.
“다른 분도 아니고 왕비 마마이신데, 우리가 어찌 잠을 깨우겠어. 공 마마께 맡겨야지.”
유엽이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이 못된 계집애. 초왕비께서는 아직 공 마마가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시잖아. 그러니 지금도 주무시지.”
곡아가 왼쪽을 바라보며 재잘댔다.
“저것 봐, 풍 아가씨는 벌써 일어나셨잖아.”
묘시가 되자 공 마마가 장합전을 찾아왔다. 잠든 백천범을 보고 긴 눈썹을 찌푸린 공 마마가 궁녀들에게 분부를 내렸다.
“찬물을 가져오너라.”
유엽이 주저하다 입을 열었다.
“마마, 그리 좋은 방법이 아닌 듯합니다. 분명…….”
“규율을 배우기로 했으면 엄하게 가르쳐야 한다. 금지옥엽인 공주들도 겪는 일을 왕비가 견디지 못하겠느냐? 어서 찬물을 가져오래도.”
쭈뼛거리던 유엽이 대야에 찬물을 받아 가져왔다.
침대 주위의 장막을 걷은 공 마마가 소매를 걷어 올렸다. 그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야에 손을 넣어 물을 떴다. 한겨울의 차가운 물이 백천범의 얼굴에 흩뿌려졌다.
얼굴을 베는 듯한 냉기에 백천범이 부들부들 떨며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뜬 그녀에게 공 마마의 엄격한 시선이 쏟아졌다.
“일어나시지요. 규율을 배우실 시간입니다.”
어제 분명 묘시에 규율을 배울 거란 말을 들었는데, 잠을 설친 탓에 까맣게 잊고 말았다. 백천범은 자신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고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마, 미안해요. 늦잠을 자 버렸어요.”
유엽과 곡아는 찬물을 맞고도 화를 내지 않는 초왕비에게 감탄했다. 그들이 서둘러 환복 시중을 들었다.
무표정하게 서 있던 공 마마가 백천범을 향해 입을 열었다.
“감히 왕비께 물을 끼얹었습니다. 하지만 규율을 배우시기로 한 이상, 왕비께서는 반드시 규율을 지키셔야 합니다. 어제 묘시라 말씀드렸으니 일각도 지체되어서는 안 됩니다. 시간을 지키는 것 또한 규율입니다. 시간이 늦었으니 세안과 조반 모두 거르겠습니다. 어서 밖으로 가시지요.”
백천범은 백 승상의 집에서 봤던 자매들의 스승을 떠올렸다. 그들도 웃음기가 없고 말수가 적었지만, 공 마마처럼 엄숙하진 않았다.
조금 겁을 먹은 백천범은 옷을 갈아입고 공 마마를 따라 밖으로 향했다. 바깥방으로 나가자 기둥 앞에 묵묵히 서 있는 풍여영이 보였다. 풍여영도 백천범을 발견했지만 눈을 깜빡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백천범이 다가가 말을 건네려는데 공 마마가 그녀를 가로막았다.
“왕비 마마, 이쪽으로 오십시오.”
백천범은 곧장 공 마마가 가리킨 기둥 옆으로 향했다. 그녀는 공 마마가 말하는 대로 발꿈치와 종아리, 엉덩이, 어깨, 머리를 기둥에 붙였다. 공 마마는 다섯 부위가 일직선이 되도록 서라고 가르쳤다.
늘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걷던 백천범에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다만 머리만큼은 가만히 두기가 쉽지 않았다. 늘 경각심을 가지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습관 때문이었다. 억지로 정면만 바라봐야 하니 고문이 따로 없었다. 움직이면 안 된다는 것은 그녀도 알고 있었지만, 자꾸만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그녀가 고개를 움직일 때마다 공 마마가 손에 쥔 목판으로 어깨를 찰싹 때렸다. 기다란 목판을 마주했을 때, 백천범은 옷을 두껍게 입었으니 아프지 않을 거란 생각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공 마마가 어깨를 내려친 순간, 그녀는 불에 덴 사람처럼 자리에서 튀어 올랐다.
말도 나오지 못할 정도의 통증이 엄습했다. 그녀는 순간 자신의 살이 베인 줄로만 알았다. 목판이 이리 아프단 말인가?
“왕비 마마, 똑바로 서십시오!”
공 마마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백천범은 서둘러 자세를 고쳐 섰다.
“풍 아가씨를 보십시오.”
공 마마가 싸늘하게 말했다.
“왕비 마마와 풍 아가씨는 동년입니다. 풍 아가씨가 할 수 있는 일은 왕비께서도 할 수 있으시리라 믿습니다. 규율을 배우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견디지 못할 것 같으시면 지금이라도 그만두시지요.”
“할 수 있어요.”
백천범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런 일에 무릎을 꿇을 백천범이 아니었다. 초왕의 얼굴에 먹칠을 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녀는 어떤 일도 참고 견딜 수 있었다.
“제가 제대로 하지 못하면 얼마든지 때려 주세요.”
“왕비께서는 귀한 분이시라 매를 많이 맞으실 수도 없는 일입니다. 왕야께서 아시면 소인은 뼈도 남기지 못하겠지요.”
“아니에요. 왕야께 말씀드릴 일은 없을 거예요.”
백천범이 단호하게 의견을 내놓았다.
“제가 잘되길 바라는 마음에 매를 든다는 거 저도 다 알아요.”
그녀의 자세가 마음에 든 공 마마는 알겠다고 답한 뒤, 찰싹찰싹 소리가 날 만큼 매질을 이어 갔다.
그 광경을, 멀리 떨어진 병풍 뒤에서 서 태비와 영 씨가 지켜보고 있었다.
영 씨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왕비 마마께서 공 마마의 가르침을 잘 따르십니다. 다만 왕비 마마의 어깨가 남아나지 않을까 봐 걱정입니다.”
서 태비가 코웃음을 쳤다.
“꾸지람을 듣는 것도 좋은 일이지. 도리도 지키지 않고 규율도 모르는데, 매 맞아 마땅하지 않느냐.”
“혹여 왕야께서 보시면…….”
서 태비의 입꼬리가 기이하게 비틀렸다.
“그 애가 볼 일은 없을 게다.”
서 있는 자세만 한 시진 반을 연습하니 백천범의 어깨가 빨갛게 부어올랐다. 두꺼운 옷에 짓눌려 맞은 부위가 조금 가려웠지만, 아직은 참을 수 있었다. 그녀가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은 배고픔이었다. 요즘 들어 워낙 편히 지낸 탓일까, 유독 배고픔을 참기가 힘들었다.
그녀는 맞은편에 서 있는 풍여영을 바라보았다. 언니가 된 이상, 나쁜 본보기를 보일 수는 없었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마음을 강하게 다잡았다. 끝까지 견뎌 볼 작정이었다.
때마침 찾아온 서 태비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더니 입을 열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지. 우리 왕비가 세안도 못 하고 아침도 거르질 않았나.”
태비의 말에 공 마마는 즉시 수업을 마치고 백천범에게 다가와 죄를 고했다.
“왕비 마마, 소인이 잘못했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백천범이 얼른 그녀를 부축했다.
“엄한 스승에게서 뛰어난 제자가 나오는 법이지요. 잘되라고 그러시는 거 저도 알고 있다 했잖아요.”
* * *
궁의 아침 상은 초왕의 저택에서보다 반찬 가짓수가 많았다. 새우 교자, 춘권, 쌀죽과 삶은 계란, 흰 목이버섯 죽, 찹쌀 전병, 백설기 등등……. 누구든 군침을 흘릴 진수성찬이 한가득 차려졌다.
백천범은 음식을 보자마자 침을 꿀꺽 삼키며 의자에 앉았다.
음식을 향해 손을 뻗던 그녀가 멈칫했다. 백천범은 풍여영을 돌아보며 다정히 웃었다.
“동생, 밥 먹었어요? 같이 먹어요.”
풍여영은 잠시 주저하다가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저는 아까 먹긴 했는데 또 배가 고파졌네요. 괜찮으시면 같이 먹을게요.”
두 사람은 한 손에 춘권을 들고 한 손으로는 쌀죽을 떠먹으며 즐겁게 배를 채웠다.
곱씹을수록 풍여영과의 인연이 정말 깊지 않은가. 백천범은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궁 어디에도 예의를 차리는 여자들뿐이다. 그들과 비교하면 자신은 도무지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 같았다. 맞지 않은 옷을 억지로 입은 것처럼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풍여영이 좋은 벗이 되었고, 백천범의 불안한 마음을 녹여 주었다. 두 사람이 한창 맛있게 먹고 있는데 공 마마가 다가오더니 궁녀들에게 상을 치우라고 분부했다.
“왕비 마마, 그만 드십시오. 식욕을 억제할 줄 아셔야 합니다. 지나치게 드시면 부군께서도 좋아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백천범은 묵용감을 떠올렸다. 머릿속에 일단 그가 떠오르니 보고 싶은 마음이 고개를 들었다. 오늘도 그녀를 보러 올지 모르겠지만, 오지 않는다면……. 이상한 일이다. 묵용감이 오지 않는다고 상상하면,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묵용감을 생각하면서도 그녀의 시선은 음식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접시가 치워지는 광경을 지켜보던 그녀가 별안간 손을 뻗어 떡 한 조각을 집어 들었다.
공 마마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무슨 왕비가 평생 굶은 사람처럼 채신없이 군단 말인가?
공 마마가 눈썹을 찌푸리고 손을 뻗었다.
“어찌 체통을 지키지 않으시는 겁니까? 이리 내십시오.”
백천범이 입술을 앙다물고 떡을 꽉 움켜쥐었다. 그녀는 쭈뼛대며 공 마마를 올려다보았다.
“와, 왕야께 드리고 싶어요.”
그때, 막 문턱을 넘어오던 묵용감이 그녀의 말을 듣고 멈칫했다. 그는 순간 온몸을 관통하는 전율을 느꼈다. 뜨겁고도 간지러운 무언가가 심장을 강하게 옥죄는 기분이었다. 그를 관통한 전율은 천천히 벌어지는 꽃망울처럼, 그의 얼굴에 환한 빛을 피워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