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7화
방이 너무 컸던 나머지 불을 때는 대신 화로를 들였다. 하지만 그래도 춥긴 마찬가지였다. 백천범은 굳이 말을 꺼내면 까다롭게 보일까 봐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이 정도 추위는 참아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영 씨가 방이 차디찬 걸 알아차리고 궁녀들을 꾸짖었다.
“이런 철없는 것들 같으니. 어찌 화로를 한 개만 가져다 놓은 것이냐. 왕비께서 꽁꽁 얼어 버리시면 어쩌려고! 어서, 하나 더 가져오너라. 침대 위쪽과 아래쪽에 하나씩 놓아야 한다. 곧 왕비께서 낮잠을 주무실 시간이다.”
유엽과 곡아는 그녀의 분부대로 환관을 불러 화로를 하나 더 가져다 두었다.
백천범은 괜스레 미안함을 느꼈다.
“제가 오는 바람에 고생이네요.”
“왕비 마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소인은 이보다 더 기쁠 수 없습니다. 예전 일들로 왕야께서 오해를 하신 탓에 태비 마마와 조금… 소원해지셨지요. 하지만 태비께서는 왕야의 친어머니이십니다. 자식을 아끼지 않는 어머니가 어디 있겠습니까?
왕야께서는 바쁘셔서 자주 뵐 수 없지만 왕비께서 오셨으니 태비께서 늘 품고 계시던 은애를 주실 수 있으시겠지요. 왕비께서는 태비 마마를 모시고, 태비께서는 왕비 마마를 아껴 주시니 왕야께서도 크게 기뻐하실 겁니다.”
“저도 태비 마마를 경애해요. 저는 어려서부터 어머니가 안 계셨으니 앞으로 태비 마마를 친어머니라고 생각하고 모실 거예요.”
“정말 좋은 생각이십니다. 왕비께서 오실 걸 미리 아시고 태비 마마께서 이렇게 선물을 준비하셨습니다.”
영 씨가 꽃이 조각된 커다란 상자를 열었다.
“보십시오. 전부 다 귀한 것들입니다.”
백천범이 상자 안을 들여다보니 옷 몇 벌이 들어 있었다. 그녀가 궁금해하며 물었다.
“예전부터 절 이곳에서 지내게 할 생각이셨어요?”
영 씨가 화들짝 놀라 덧붙였다.
“그럴 리가요. 태비 마마께서 워낙 왕비를 아끼시니 좋은 게 생길 때마다 따로 보관해 두셨습니다. 조금씩 챙겨 두다 보니 많아진 것입니다. 이곳에서 묵지 않으셨어도 언젠가 저택으로 보내드렸겠지요.”
백천범은 녹하의 솜씨에 못 미치는 옷에 그다지 흥미가 없었다. 더 보지 않아도 녹하가 만든 옷보다 별로일 테니 나중에 천천히 살펴보기로 했다.
온종일 긴장한 채로 있었던 탓에 이제야 피로가 밀려왔다. 그녀가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조금 졸리네요.”
“안 그래도 낮잠을 주무실 시간입니다.”
영 씨가 유엽과 곡아에게 그녀의 낮잠 시중을 들라 분부했다.
백천범이 침대에 눕는 걸 확인한 영 씨는 서 태비가 있는 정전으로 돌아왔다. 마침 차를 마시고 있던 서 태비가 찻잎을 걷어내며 물었다.
“정리는 다 마쳤느냐?”
“예. 왕비께서는 지금 낮잠을 주무십니다.”
서 태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풍가 아가씨는 입궁했고?”
“거의 도착했을 것입니다.”
영 씨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기마마精奇嬷嬷에게 왕비 마마를 맡기실 것입니까?”
차를 한 모금 들이켠 서 태비가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네가 보기에 공孔 마마嬷嬷는 어떠하냐?”
영 씨가 웃으며 답했다.
“공 마마는 엄격하기로 유명하지 않습니까. 초왕비께서 잘 견뎌 내실지 모르겠습니다.”
“견디지 못하면 더 좋지. 기회를 주었는데도 배우지 못하면 더더욱 폐위해야 마땅하지 않은가.”
“태비 마마, 오늘 왕야께선 왕비 마마를 쉽게 포기하실 것처럼 보이진 않았습니다.”
“풍가 아가씨에게 마음을 돌리게 해야지. 왕비가 초왕의 맘에 들 수 있었던 이유를 잘 살펴보았다가 따라 하기도 하고. 왕야의 눈에 들면 초왕의 저택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은 물론이고, 아비의 관직도 더욱 높아질 게다.”
“예, 예. 모든 게 태비 마마의 보살핌 덕분입니다. 여영에게 기회를 주셨으니, 그 애에게 각별히 신경을 쓰라고 분부하겠습니다.”
영 씨가 잠시 고민하다 말을 이었다.
“한 가지 걱정되는 일이 있사옵니다. 왕비께서 참지 못해 왕야께 말씀드린다면 어찌합니까? 분명 왕야께서 왕비를 데려가실 것입니다.”
서 태비가 그녀를 흘깃 바라보았다.
“내가 악한 시어머니더냐? 다 그 애를 위한 일이라는 건 그 애도 잘 알 게다. 사리 분별을 할 줄 안다면 왕야에게 말하는 일은 없을 걸세. 자고로 고부 관계는 쉽게 좋아지기 어려운 법이야. 그 애라고 왕야가 고부 사이에서 난처해지는 걸 보고 싶겠는가?”
영 씨는 그제야 깨달았는지 서 태비를 향해 웃으며 감탄했다.
“역시 태비 마마이십니다!”
* * *
낮잠을 자고 일어난 백천범은 서 태비의 부름에 정전으로 향했다. 발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가자 웬 여인이 방 한가운데 서 있었다. 자그마한 여인은 양쪽으로 동그랗게 머리를 말아 올리고 살굿빛 겹옷에 밝은 하늘색 겹치마를 입고 있었는데 꽤나 어려 보였다.
백천범을 발견한 서 태비가 서둘러 손짓했다.
“소개해 줄 사람이 있으니 어서 오시게.”
백천범이 급히 앞으로 다가갔다. 가까이서 보니 여인은 커다란 눈에 자그마한 입술까지, 무척 귀여운 외모를 지녔다. 여인이 백천범에게 서둘러 예를 갖췄다.
“초왕비를 뵈옵니다.”
백천범도 얼른 답례했다.
“안녕하십니까, 아가씨.”
서 태비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대체 어딜 봐서 왕비다운 자태란 말인가? 정말 어디 내놓을 수가 없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서 태비는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궁에만 있으니 답답할까 봐 애가가 특별히 짝을 찾아보았네. 성은 풍, 이름은 여영이라네. 왕비와 동년이니 사이좋게 지내보시게.”
백천범은 크게 기뻐하며 풍여영을 바라보았다.
“아가씨는 몇 월에 태어났습니까?”
“소녀는 팔월 생입니다.”
“정말 잘됐습니다. 저는 사월에 태어났으니 앞으로 언니라고 불러 주세요.”
풍여영은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무릎을 굽혔다 펴며 예를 갖췄다.
“이 동생, 언니께 인사 올립니다.”
“자매 사이에 그리 예를 갖추지 않아도 돼요.”
백천범이 그녀를 잡아끌어 살갑게 팔짱을 꼈다.
“태비 마마, 여영이와 이곳에서 함께 지내게 해 주십시오.”
서 태비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게나. 애당초 왕비와 함께 지내게 할 생각으로 여영 아가씨를 불렀네.”
그때 황유도가 안으로 들어와 고했다.
“태비 마마, 공 마마가 뵙기를 청합니다.”
“들라 하라.”
서 태비가 백천범을 빤히 응시했다.
“앞서 말했듯이 궁에 왔으니 규율을 배우는 게 좋겠네. 공 마마는 공주들의 훈육을 담당하는 정기마마라네. 공 마마에게 배운 공주들은 모두 자태가 우아하고 단정하지. 이번 기회에 잘 배워 두면 좋을 걸세. 여영 아가씨는 출가하지 않았으니 배워 두면 더더욱 도움이 될 게야. 함께 잘 배워 보시게.”
규율을 배우겠다고 마음을 먹은 참에 함께할 짝이 생겼으니 백천범은 열의가 넘쳤다. 그녀가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답했다.
“태비 마마 말씀이 맞습니다. 소첩도 어서 배우고 싶습니다.”
그때 공 마마가 들어와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소인, 태비 마마를 뵈옵니다.”
“일어나게.”
서 태비가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초왕비는 봤을 테고, 이 아가씨는 형부 풍 낭중 가문의 여영이라 하네.”
백천범과 풍여영을 바라본 공 마마는 순간 멈칫했다. 누가 초왕비인지 곧바로 분간하기 어려웠다.
다만 그녀는 긴 경력의 정기마마답게 꼼꼼히 두 사람을 살펴본 후, 백천범과 풍여영을 구별해냈다. 그녀는 초왕비에게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서 태비는 공 마마가 잠시 주저하던 모습을 떠올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노련한 공 마마마저 곧바로 신분을 알아차리지 못하다니! 이런 모습의 왕비는 그 자체로 웃음거리가 될 게 뻔했다.
한편 백천범은 이씨 부인의 수하였던 유모 제 씨와 유 씨를 떠올리고 있었다. 두 유모처럼 정기마마도 오륙십 대에 심술궂은 모습을 상상했는데, 마주한 공 마마는 그들과 전혀 달랐다.
공 마마의 얼굴은 매끈했고, 두꺼운 솜으로 만든 긴 겉옷을 입었음에도 맵시가 났다. 한 마리 백두루미를 연상케 하는 단정한 모습이 저절로 부러운 마음을 일으켰다. 어느새 백천범은 공 마마에게 존경 어린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공 마마가 자신에게 예를 갖추자 백천범도 얼른 정신을 차리고 답했다.
“안녕하십니까, 마마.”
온화한 표정을 유지하면서도, 공 마마의 눈망울에 의미심장한 눈빛이 스쳐 지나갔다. 정기마마인 그녀는 다른 하인들보다 신분이 높았다. 태감이나 궁녀들이 그녀에게 예를 갖춰 인사를 올리는 것은 당연하다지만, 이건 무슨 일이란 말인가. 무려 친왕비가 자신에게 예를 갖추다니, 정말… 과분함을 견디다 못해 수명이 줄어드는 기분이다…….
공 마마의 마음을 알 리가 없는 백천범은 새로운 벗과 정기마마의 존재에 기뻐하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이 기대로 부풀어 올랐다.
* * *
장합전이 아직 낯설긴 했지만 백천범은 풍여영을 데리고 산책을 다니며 그럴싸하게 언니 노릇을 했다.
풍여영도 사소한 일에 구애받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녀의 체구는 백천범보다 조금 통통했고, 걸음걸이에는 생기가 넘쳐흘렀다.
두 사람이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며 빠르게 걸어가자 궁녀들이 잰걸음으로 뛰기 시작했다. 걸어서는 그들의 발걸음을 뒤따를 수가 없었다. 자연스레 등불이 이리저리 흔들리며 바닥에 위태롭고 기이한 그림자를 그려 내었다.
결국 곡아가 숨을 헐떡거리며 백천범을 불렀다.
“왕비 마마, 제발 천천히 가십시오. 넘어지십니다.”
“괜찮아. 안 넘어져.”
백천범이 낭랑하게 대답하곤 뒤를 돌아보았다. 곡아는 숨이 턱까지 차올랐고, 유엽은 아예 한참 뒤에 있었다. 상황을 파악한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희는 따라오지 않아도 돼. 길이 안 보이는 것도 아닌데.”
“왕비 마마, 어딜 가시려는 것인지요?”
뒤늦게 도착한 유엽이 다급히 물었다.
“궁이 얼마나 넓은데요. 게다가 아직 문이 닫히기 전이라 어두운 밤중에 길을 잃으면 큰일입니다.”
백천범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멀리 가진 않아. 지난번에 춘계 연회가 열리던 곳에서 백두루미를 봤어. 아영이에게도 보여 주고 싶어.”
“벽복전을 말씀하시는군요. 거긴 앞뜰이라 들어가지 못합니다. 왕비 마마, 이만 돌아가시지요.”
백천범은 멀뚱히 서서 유엽을 바라보았다.
“왜 못 가?”
유엽이 엄숙하게 대답했다.
“황궁의 모든 장소에 각기 다른 규율이 있습니다. 왕비 마마께서도 이곳에 계시다 보면 알게 되실 겁니다. 벽복전은 황제 폐하의 공간입니다. 황후 마마를 제외하고는 후궁에 계신 분들도 쉽게 갈 수 없는 곳이지요.”
백천범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난 후궁이 아닌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