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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226)화 (225/1,192)

제226화

묵용감이 허리를 숙여 서 태비에게 예를 갖추자 서 태비가 환하게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역시 자신의 아들은 어느 면에서 보아도 완벽했다. 백천범에게 시선을 돌리니 그녀도 묵용감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한껏 들떴던 서 태비의 마음이 다시금 가라앉았다.

제대로 가르침을 받았다면 지아비를 보며 이가 다 드러나도록 웃지 않는다.

백천범의 옆에 앉은 묵용감이 소매 밑으로 조심스레 그녀의 손을 잡았다. 서로를 향해 미소 짓는 부부의 모습은 다정함이란 이럴 때 쓰는 말임을 알게 했다.

그러나 서 태비는 소름이 돋는 듯했다. 어른을 앞에 두고도 이토록 분별없이 굴다니. 서 태비의 눈에 비친 백천범은 몸집은 작아도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크고 까만 눈동자는 포도알처럼 탐스럽고 생기발랄했지만, 서 태비에겐 겉만 번지르르해 보일 뿐이었다.

묵용감이 입을 열었다.

“태비께서 어쩐 일로 왕비를 부르신 것입니까?”

“별일은 아니다. 애가가 왕비를 보고 싶은 마음에 불렀지.”

묵용감이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을 맞잡고 예를 갖췄다.

“이 아들이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였습니다. 아내와 함께 자주 문안을 드려야 했는데 송구합니다.”

그는 그녀가 혹여 백천범을 책망할까 봐 자신의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 게다가 왕비가 아닌 아내라고 칭하는 걸 보니, 그녀의 아들은 행실이 바르지 못한 처에게 물들어 가는 게 분명했다.

“바쁘다는 건 애가도 잘 안다.”

서 태비가 미소를 보였다.

“황상의 근심을 함께 나누며 천하를 지켜야 하지 않니. 이곳은 별일 없으니 걱정하지 말거라. 그저 왕비와 자주 이야기를 나누면 충분하지. 애가는 딸이 없으니 왕비를 친딸처럼 아끼고 싶구나. 왕야와 왕비가 이처럼 화목하니 애가도 더할 나위 없이 기쁘다.”

최근의 묵용감은 백천범이 있어 모든 일이 만족스러웠다. 서 태비는 자신의 친모인 만큼 지난 일은 깨끗하게 잊기로 마음먹었다. 지금 그에게는 든든한 모친과 아내가 있다. 아이까지 있다면 이번 생은 더 바랄 게 없었다.

그가 고개를 돌려 백천범을 바라보았다. 활짝 웃는 그녀의 얼굴에는 불편한 기색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태비와의 관계도 제법 좋아진 듯했다.

그가 백천범의 손을 놓고 찻잔을 집어 들었다.

“태비 말씀이 맞습니다. 앞으로 이 아들, 짬이 날 때마다 아내와 함께 문안 인사를 여쭙겠습니다.”

서 태비가 웃으며 곁눈질로 백천범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의도를 눈치챈 백천범이 급히 입을 열었다.

“왕야, 이곳에서 며칠 동안 묵으며 태비 마마를 모시고 싶습니다.”

놀란 묵용감이 곧장 서 태비를 바라보았다. 서 태비는 옅은 미소만 짓고 있었다.

“역시 왕비는 참으로 속이 깊구나. 애가가 궁에서 답답한 걸 알고 저리 말해 주다니. 애가와 함께 있고 싶다면야 애가는 더없이 좋다네.”

“안 됩니다!”

묵용감이 황급히 소리쳤다.

“왕비는 규율을 잘 모르니 예절에 어긋나는 일을 할 수도 있습니다. 태비께서 번거로워지실 수도 있으니 안 될 일입니다.”

“왕비는 애가의 며느리다. 번거롭다니, 어찌 그런 말을.”

서 태비가 자애로운 눈빛을 보냈다.

“왕야가 이야기를 꺼냈으니 하는 말인데, 우리 초왕비는 다 좋지만 규율 면에서 조금 부족한 게 있지. 물론 왕비의 잘못이 아니다. 애가가 보기에는 지금도 훌륭해.

다만 네가 친왕인지라 참석할 연회가 적지 않은데, 왕비가 규율을 모르면 사람들의 비웃음을 살 게다. 너는 별일 아니라 여겨도 왕비는 부끄러움 많은 여인이질 않니. 남들의 웃음거리가 되면 부끄러움을 어찌 견딜까.”

그녀가 고개를 돌려 백천범을 바라보았다.

“왕야는 개의치 않아도 이건 체면의 문제라네. 왕비도 왕야의 체면이 깎이는 것은 원치 않겠지, 안 그런가?”

“예, 태비 마마 말씀이 맞습니다.”

백천범이 묵용감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여기 있게 해 주십시오. 태비 마마를 모시면서 규율을 배우고 싶습니다. 무리하지 않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어요.”

묵용감은 망설이고 있었다. 도무지 서 태비의 생각을 파악할 수가 없었다. 그의 일에 관여하지 않던 서 태비가 요즘은 어찌 이리 관심을 보이고 있을까?

“걱정 말거라.”

서 태비가 말했다.

“왕비는 애가의 며느리다. 일반 백성이었다면 한집에서 지냈겠지. 애가는 황궁 깊숙한 곳에서 지내고 있으니 아들도 며느리도 만나는 게 쉽지 않네. 이 애가의 처지를 생각해서라도…….”

서 태비의 말에 백천범은 그만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녀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태비 마마. 왕야께서 어찌 말씀하시든 소첩은 이곳에서 마마를 모시겠습니다.”

묵용감이 미간을 좁히며 나직하게 말했다.

“진심으로 원하는 것이오?”

“물론입니다.”

백천범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왕야의 아내니까요. 왕야를 대신해 웃어른께 효를 다하는 일이 어찌 문제겠습니까? 게다가 제가 생각해도 전 규율을 너무 모릅니다. 그러니 매번 궁에 올 때마다 마음이 조마조마합니다. 이번 기회에 잘 배워 두면 이제 실수할 일은 없을 거예요.”

묵용감은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입을 꾹 다물었다.

백천범이 그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지난번에는 망측한 일 때문에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몰라요. 늘 이럴 수는 없어요. 왕야, 부디 허락해 주세요.”

묵용감이 생각에 잠겼다.

‘고부 사이는 어찌해도 어려운 법인데 자발적으로 시어머니와 지내겠다니. 스스로 고생길을 걷는 게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최근 몇 년간 서 태비는 그리 자존심을 세우지 않았다. 문안을 드리고 돌아갈 때마다 그저 하염없이 바라보는 모습에 이따금 그의 마음이 불편해지기도 했다. 나이가 들면 욕심은 사라지고 후손들이 잘되기만을 바라는 것인가. 서 태비도 그와 다시 좋은 관계를 맺고 싶어 하니 백천범을 난처하게 하진 않을 것이었다.

다만 백천범을 이곳에 두고 간다면… 그는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이대로 저택에 돌아가면 그녀를 볼 수 없을 텐데?

백천범은 묵용감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의 손바닥을 가볍게 긁어 간지럽혔다.

서 태비는 또다시 한숨이 나왔다. 저게 대체 어딜 봐서 왕비란 말인가, 경거망동도 모자라 여우 같은 눈빛까지 마구 보내니 묵용감이 속절없이 넘어가고 있었다.

그녀의 장난에 묵용감은 결국 미소를 지었다. 다른 손으로 그녀의 장난기 가득한 손가락을 붙잡은 그가 조용히 말했다.

“저택에 날 홀로 두겠단 말이오?”

백천범이 그를 흘겨보았다. 다 큰 사내가 왜 이리 아이처럼 군단 말인가?

“왕야께서는 매일 입궁하시지 않습니까? 조회를 마치고 저를 보러 오시면 됩니다. 이곳에서 태비 마마와 함께 식사를 하고 가시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녀의 두 눈을 유난히 반짝이며 기대를 드러냈다. 묵용감은 더는 말릴 수기 없었다. 얽매이는 걸 싫어하는 백천범이 굳이 서 태비와 지내겠다면, 그를 위해 며느리의 본분을 다하려는 게 틀림없었다.

그가 그녀의 손을 힘주어 주물렀다. 제안은 내키지 않아도, 달콤한 기분이 그를 휘감았다. 정말이지 그녀는, 더없이 완벽한 여인이었다.

결국 백천범은 장합전에 남았다. 묵용감은 조회를 마치면 곧바로 장합전으로 와 그녀를 보기로 했다. 만약 조금이라도 불편한 기색을 보이면 곧바로 데려갈 생각이었다. 어쨌든 그가 가까이 있으니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 터였다.

묵용감은 장합전에서 점심을 먹고 돌아가기로 했다. 식사 내내 서 태비의 안색을 유심히 살폈지만 별다른 점은 보이지 않았다. 백천범을 바라볼 때도 미소를 유지하는 모습이 지난번보다 훨씬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다.

그녀와 떨어지는 게 아쉬워도 그는 이제 저택으로 돌아가야 했다.

섭섭한 마음에 그는 가는 동안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그가 모퉁이를 돌기도 전에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애틋함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게 아닌가.

묵용감은 울컥했지만 생각을 다잡았다. 차라리 잘된 일이다. 며칠간 떨어져 지내며 그녀가 자신을 그리워하는지 두고 볼 작정이었다.

* * *

서 태비는 백천범에게 우측 편전偏殿을 내주고 궁녀 두 명을 붙여 주었다. 한 명은 유엽柳葉, 다른 한 명은 곡아蛐兒라 했다. 귀뚜라미를 뜻하는 곡아라는 이름을 들은 백천범은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하며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어쩌다 그런 이름을 가지게 된 거야? 누가 지어 준 이름인데?”

자신의 이름을 들은 백천범이 웃자 곡아는 얼굴이 새빨개졌다.

“아버지께서 지어 주신 이름입니다. 아버지께서는 남존여비重男轻女를 중시하셔서 계집이 라는 말에 태어난 저를 거들떠보지도 않으셨지요. 어머니께서 이름을 지어 달라고 말씀드리니 때마침 좋은 귀뚜라미를 구하신 아버지께서 곡아라는 이름을 붙이셨습니다.

다섯 살 때 황국추黃菊秋라는 정식 이름을 갖게 되었는데, 함께 입궁한 친구들이 계속 곡아라고 부르는 바람에 이름을 바꾸지 못하였습니다.”

백천범은 그제야 이해가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랬구나. 이름이 정말 좋은걸. 나도 예전에 쇠 귀뚜라미를 한 마리 길렀었는데 이름이 깜장이었어. 울음소리가 정말 듣기 좋았는데……. 나도 나한테 이름을 지어 줄래. 쇠 귀뚜라미라고 말이야. 그럼 우리 둘이 한 쌍이 되는 거네!”

유엽과 곡아가 서로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웃음이 나왔지만 감히 왕비 앞에서 웃을 수는 없었다. 이렇게 규율을 지키지 않는 상전은 난생 처음이었다. 태비에게 규율을 배우기 위해 왔다더니, 그 이유를 바로 알 것만 같았다. 두 궁녀가 들었으니 망정이지 다른 궁전 주인들이 들었으면 비웃음을 살 게 분명했다. 그리되면 초왕의 얼굴에도 먹칠을 하는 일이었다.

백천범은 조금 의아했다. 농을 던졌을 뿐인데 두 궁녀는 못 볼 꼴을 보았다는 듯 굳은 표정이었다. 기홍이나 녹하, 월규, 월향이라면 박장대소를 터뜨리고 한바탕 즐거워했을 텐데…….

방금 만났으니 아직 서로가 익숙지 않을 터. 백천범은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천천히 알아 가다 보면 두 궁녀도 분명 친근해지리라 생각했다.

편전은 아주 넓었는데 한눈에 봐도 호화로웠다. 일렬로 난 긴 창과 접이식 문에는 각종 꽃과 새, 곤충 등이 조각되어 있었다. 거대한 기둥에도 금박으로 그림을 그려 놓았다. 침대도 매우 컸는데, 저택에서 쓰는 침대보다 조금 딱딱했다. 백천범을 위해 손수 침대를 준비했다며 유모 영 씨가 웃어 보였다.

“왕비께서 잘 모르시겠지만 궁의 젊은 상전들께서는 모두 이런 침대에서 주무십니다. 이 침대가 몸을 곧게 받쳐 주어 몸매가 더 예뻐지고 기운도 넘치게 해 주기 때문이지요.”

백천범은 그제야 무언가를 깨달았다. 이보다 열악한 곳에서도 지냈던 그녀인데 침대를 딱딱하다고 여기다니. 그동안 초왕의 저택에서 편안하게 지내 온 덕분에 고통이 낯설어진 모양이었다.

그녀는 속으로 자신을 한 차례 꾸짖었다. 지금의 환경이 편안해도 지난날의 고통을 쉽게 잊으면 안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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