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5화
“태비 마마, 어찌 그리 말씀하십니까. 저는 그 애를 동생으로 여기지 않사옵니다. 그 애의 행실로 가문의 체면이 말이 아닙니다. 진작부터 초왕야와는 어울리지 않는 아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태비 마마께서 더없이 현명한 결정을 내리신 것입니다.”
“다만 황상께서 정한 혼사인지라…….”
“태비 마마, 황가의 체면이 깎이고 있습니다. 이를 아시면 폐하께서도 분명 초왕비를 폐위하려 하실 것입니다.”
백 귀비가 말을 이었다.
“초왕야께서 어떻게 하실지 염두에 두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서 태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애가가 한번 생각해 보겠네.”
서 태비는 홧김에 장담했지만, 아들의 일을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사실은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황가의 자손들은 하나같이 무정했다. 다만 한번 정을 베풀면 그 누구보다 다정했다. 그녀는 아들이 백천범을 어떻게 대하는지 똑똑히 보았다. 백천범 덕분에 아들이 활짝 웃자 백천범이 고맙기까지 했다.
하지만 백천범이 왕비로서는 부족한 탓에 언제든 부부 사이가 어긋날 수 있다. 서 태비에겐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렇게 되느니 차라리 지금 갈라놓는 게 나았다.
다만, 그리 되면 아들이 한동안 괴로운 시간을 보낼 터였다. 한참을 골몰해도 적당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유모 영 씨가 조언을 올렸다.
“초왕야께서는 자유분방한 모습을 좋아하시는 듯하니 성격이 비슷한 사람을 찾아보는 것은 어떠신지요. 성품만 좋으면야 조금 제멋대로라 한들 큰 문제는 되지 않을 것입니다. 태비께서는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그 말에 서 태비의 눈이 번쩍 뜨였다.
“네 생각도 좋구나. 다만…….”
그녀가 다시 얼굴을 찡그렸다.
“그런 사람을 어찌 금방 찾을 수 있단 말이냐.”
영 씨가 차분하게 말했다.
“소인이 그런 아가씨를 알고 있습니다. 소인의 먼 친척 가문의 아가씨로 자유분방하여 바느질 같은 것은 하지 않고, 무술에만 관심이 많지요. 사내들과 무예 연습을 많이 하지만 절대 남을 홀릴 성격이 아니옵니다.”
무술이라는 말에 서 태비는 절로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도 묵용감이 그런 여인들을 좋아하는 듯하니 어쩔 수 없었다. 좋아하지 않고서야 거리에서 싸움질이나 하는 아내를 어떻게 내버려 둘 수 있단 말인가.
“이름은 무엇인가? 나이는? 무엇을 하는 집안이고, 가족은 어찌 되는가?”
“성은 풍馮, 이름은 여영如英입니다. 부친은 형부 낭중郎中이고 오라비 두 명과 언니 한 명이 있습니다.”
서 태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은 집안이지만 정비는 불가능해. 서비라면 모를까.”
영 씨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대답했다.
“초왕야의 첩실이 되는 것만으로도 여영에게는 큰 복이지요. 중요한 것은 초왕야의 눈에 들 수 있는지입니다.”
서 태비가 고민에 잠겼다.
“성급하게 왕비를 폐위하라고 했다간 감이가 들으려 하지 않겠지. 새로운 첩을 들이라 해도 듣지 않을 테니 천천히 하는 수밖에. 풍가 아가씨와 가까워질 기회를 꾸준히 만들면 일이 자연스레 성사되지 않겠는가.”
영 씨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해야 여영이가 왕야께 가까워질 기회를 만들 수 있을까요?”
“내 생각엔…….”
서 태비가 느긋하게 말했다.
“풍가 아가씨를 저택으로 보낼 수는 없으니 궁에서 만나게 하는 게 좋겠구나.”
“왕야께서 날마다 장합전에 문안을 오시는 것도 아닌데, 시기를 어찌 맞춰야 할지…….”
“초왕비가 여기 있으면 되지 않겠는가?”
서 태비가 마침내 소리 내어 웃었다.
“두고 보거라. 애가가 중매를 설 테니. 감이가 왕비의 손을 놓기만 하면 곧장 내쫓고 말겠다.”
* * *
이튿날, 황유도는 서 태비의 조령詔令을 받들고 초왕비를 찾아갔다. 초왕이 조정에 들어 자리를 비운 시각이었다.
학평관은 단순히 서 태비가 며느리를 보고 싶어 한다고 여겼다. 그는 시녀들에게 치장을 도우라 분부했고, 백천범을 가마에 태운 후 기쁘게 배웅했다.
백천범은 이제 정식으로 초왕비가 되었으니 서 태비는 그녀의 시어머니다. 일찍이 어머니를 여읜 그녀는 늘 어머니의 사랑을 갈구했다. 그 때문에 그녀는 시어머니를 자신의 어머니처럼 모시고 싶었다.
마침 서 태비가 자신을 찾으니, 그녀는 기쁜 마음으로 길을 나섰다. 지난번에는 그럭저럭 지나갔지만, 이번에는 진심으로 좋은 모습을 보여 초왕의 체면을 깎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궁에 도착하니 거대한 위압감이 밀려왔다. 그녀도 자신의 위치를 잘 알고 있었던 만큼 함부로 시선을 두지 않고 사뿐사뿐 발걸음을 내디뎠다. 하인들이 그녀에게 예를 갖추면 단정한 자세로 인사를 받았다.
황유도는 왕비가 지난번보다 크게 나아졌다고 생각했다. 저런 이가 어찌 거리에서 싸움을 벌였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서 태비는 평소처럼 담담했지만 살짝 미소를 짓고 있었다. 백천범이 인사를 올리자 아랫자리에 수놓은 의자를 가리켰다.
“앉으시게.”
고청접이 앉았던 자리다. 조금 더 가까워진 자리에 앉으라는 말에 총애를 받은 것만 같았다. 백천범이 곧바로 활짝 웃었다.
“감사합니다, 태비 마마.”
얼굴을 굳히고 서 있을 땐 제법 그럴듯해 보이더니, 금세 이런 모습이었다. 서 태비는 속으로 탄식을 내뱉었지만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다.
“오늘 왕비를 부른 것은 보고 싶은 마음에 이야기를 나누고자 함이네.”
단순한 백천범은 서 태비가 자신을 정식 며느리로 여겨 부른 줄만 알았다. 그간 서 태비를 생각하지 않았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워, 백천범은 공손히 대답했다.
“소첩이 철이 없었습니다. 앞으로는 자주 태비 마마를 뵈러 오겠습니다.”
“그렇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네.”
서 태비가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에 낀 호갑투를 만지작거렸다.
“감이는 정무로 바빠 애가를 보러 오는 일이 드물지. 왕비가 대신 날 공경해 준다면 이보다 좋을 게 어디 있겠나.”
담담히 말하던 서 태비는 그제야 알아차렸다는 듯 놀라워했다.
“왕비는 호갑투를 끼지 않는가? 지난번에도 끼지 않았던 것 같은데.”
백천범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소매 안으로 감췄다.
“소첩, 아직 습관이 되지 않은 데다 일을 할 때도 불편해서 쓰지 않았습니다.”
서 태비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물었다.
“무슨 일을 하길래? 왕비는 시중을 받는 주인이네. 손에 물 한 방울도 묻혀선 아니 되는 존재란 말일세. 게다가 호갑투는 고귀한 신분의 여인만 낄 수 있네. 당연히 왕비도 써야 하지.
궁에서는 이런 것들을 중요하게 여기네. 친정에서 배우지 못했다지만 초왕에게 시집을 와서 초왕비가 되었으니 규율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되네.”
고개를 숙이고 있던 백천범은 별것도 아닌 규율이 참으로 성가시다고 생각했다. 그까짓 규율 좀 몰라도 초왕은 신경도 쓰지 않는데.
서 태비는 백천범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다시 입을 열었다.
“시집을 왔으면 지아비를 잘 섬기고 앞길을 방해해서도 안 되네. 초왕은 친왕일세. 이 천하는 황상뿐만 아니라 초왕의 것이기도 하지.
높은 곳에 오르면 아래에 있는 자들이 올려 보기 마련이네. 조금만 흐트러져도 금세 약점을 잡혀 비웃음을 사기 십상인데, 왕비는 지아비가 조롱거리가 되길 바라는가?”
백천범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초왕야께서는 뛰어난 인재이시지요. 모든 면에서 뛰어나신 분이 조롱거리가 될 일은 절대 없습니다. 태비께서도 마음 놓으십시오.”
서 태비가 코웃음을 쳤다.
“감이는 걱정할 게 없지. 다만 왕비가…….”
그녀가 백천범을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듣자니 며칠 전에 대로에서 싸움을 벌였다던데?”
“대로가 아니고 골목 어귀였습니다.”
백천범이 빠르게 받아쳤다가 아차 싶어 얼른 입을 다물었다.
“왕비가 거리에서 싸움을 벌이다니! 어찌 체통이 선단 말인가? 왕비는 후련했을지 몰라도 왕야의 체면이 말이 아닐세.”
매서운 말투는 아니었지만 서 태비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백천범은 묘한 죄책감이 들었다. 서 태비도 자식을 사랑하는 어머니일 뿐이다.
그런 일이 있어도 태비는 욕을 퍼붓진 않았으니 교양 있는 시어머니다. 백천범이 죄책감에 우물거리며 말했다.
“태비 마마의 말씀이 맞습니다. 소첩, 앞으로는 왕야의 체면을 깎는 일은 절대 하지 않겠습니다.”
“왕비를 탓하는 게 아닐세.”
서 태비가 자애로운 미소를 보였다.
“왕비를 가르친 사람이 없었으니 규율을 잘 모를 수도 있지. 이렇게 하는 게 어떻겠나. 장합전에서 며칠 묵게. 애가와 이야기도 나누고 규율도 배우세. 초왕과 함께 중요한 자리에 나갈 일이 있을 때 규율을 몰라서 비웃음을 살 순 없지 않은가. 왕비의 생각은 어떠한가?”
서 태비의 제안에 백천범은 눈만 깜박였다. 그녀는 엎어진 김에 쉬어 갈 정도로 만사에 걱정이 없었다. 자연히 그녀의 생각은 효를 다하고 규율도 배울 기회라며 태평하게 흘러갔다.
고청접과 수원상의 단아하고 우아한 모습이 얼마나 부러웠던가. 좋은 기회라는 생각에 그녀는 한번 참을성을 가지고 배워 보기로 했다.
“소첩, 태비 마마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진심인가?”
“진심입니다. 태비 마마께서 다 소첩을 위해 하시는 말씀이니까요.”
서 태비는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기특하구나. 왕야가 오면 왕비의 생각을 말해 주게. 이젠 다 컸다고 애가의 말은 잘 듣지 않지만, 아내의 말이라면 분명 들을 것이네.”
지난번의 자리에서 묵용감과 서 태비 사이의 거리를 느꼈던 백천범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 * *
백천범이 입궁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묵용감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했다. 그는 한달음에 장합전으로 달려갔다.
묵용감을 기다리던 황유도는 멀리서 그의 모습이 보이자 불진拂塵을 흔들며 예를 갖췄다.
“아이고, 태비 마마께서 왕야를 하염없이 기다리셨습니다. 드디어 오셨군요.”
묵용감은 걸음을 멈추지 않으며 물었다.
“왕비는 어디 있느냐?”
“예. 태비 마마와 함께 차를 드시는 중입니다. 아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계시지요.”
즐겁게? 묵용감은 속으로 코웃음 쳤다. 백천범은 누구와도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성격이지만, 그의 어머니는 결코 상대하기 쉬운 성격이 아니었다. 서 태비가 백천범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걸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그녀를 궁에 데려오지 않았건만. 고부간에 갈등이라도 생기면 얼마나 골치가 아플지 눈에 선했다.
서 태비가 왜 백천범을 불렀는지 알 수가 없어, 그는 자꾸만 불안해졌다. 그는 불안한 마음을 안고 방 안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