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3화
조사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마취아를 잡아서 심문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영구가 그녀의 집을 찾았을 때, 두 모녀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이렇게나 빠르게 손을 썼으니, 배후를 알아내기가 어려워졌다.
하지만 영구는 침착하게 기다렸다. 그는 야밤까지 잠복한 끝에 며칠간 집에 돌아오지 않았던 노름꾼 마 씨를 붙잡을 수 있었다.
마취아의 아버지인 마 씨는 노름판에서 먹고 자는 생활을 지속하다 빈털터리가 되어 돌아오는 길이었다.
겁이 많았던 마 씨는 영구가 몇 차례 으르고 겁을 주자 아는 사실을 죄다 털어놓았다.
마취아와 만났던 이는 다름 아닌 백 승상의 처남, 이강이었다.
초왕에게 호되게 당했던 이강은 자신도 병력을 거느려야 초왕과 맞설 수 있다고 판단했다. 물론 공공연히 초왕을 공격할 수 없으니 기회만 엿보고 있던 참이었다.
마취아의 임신을 안 그는 그녀를 온순한 사내와 혼인시키려 했다. 물론 상대는 미리 물색해 놓았던 녹하의 오빠였다. 그는 곧바로 중매쟁이를 녹하의 집으로 보냈다.
녹하의 오빠는 나이가 차고도 신부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무른 성격에 재미라고는 없는 사내인지라, 부모는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때마침 찾아온 중매를 거절할 리 없던 녹하의 부모는 마취아를 보고 크게 흡족해했다.
혼사의 준비가 순조롭게 흘러가자, 이강은 마취아에 대한 소문을 녹하의 귀에 들어가게 했다. 남의 아이를 가진 신부를 반길 수는 없으니, 혼사는 삐걱대기 시작했다.
사실 그는 양려낭에게서 초왕의 시녀인 녹하가 백천범과 사이가 돈독하다는 말을 전해 듣고 이런 일을 꾸민 것이었다. 녹하가 감히 초왕에게 청하진 못하더라도 백천범에게는 부탁할 수 있을 테니, 백천범이 저택을 나오기만 하면 계획은 쉽게 성공할 수 있었다.
그랬을 터였다. 백천범이 홀로 왔다면. 그러나 백천범은 이강의 예상보다 많은 친위병을 데리고 왔다. 게다가 초왕까지 나타난 바람에 상황은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숨어 있던 그는 초왕이 자리를 뜨자 곧장 두 모녀를 데리고 잠적해 버렸다.
배후에 그가 있다는 사실만 감추면 문제는 없을 터였다. 다만 경황이 없던 그는 노름꾼 마 씨를 까맣게 잊고 말았다.
* * *
황제는 이강의 일에 대해 알고도 모른 척 넘어가곤 했다. 벌금으로 은자를 걷어 들이거나 보여 주기 식으로 곤장을 치는 게 전부였다. 그러나 이번 일은 달랐다. 사병 양성은 황제가 금기시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진노한 황제는 이강을 당장 추포하라며 어명을 내렸다. 하지만 그러고도 황제의 진노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그는 이강이 아직 병력을 쥐고 있으면 현장에서 참살하라고 덧붙였다.
황제의 어명을 들은 백 승상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임을 깨달았다. 식솔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탓에 그 또한 정직 처분을 받아야 했고, 일이 해결된 후에 그의 복직 여부가 결정될 예정이었다.
그는 황제를 직접 대면하려 했으나, 병사들이 오문을 막고 들여보내 주지 않았다. 황제가 그를 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온화하던 황제가 이토록 진노했으니 그는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 소식에 혼비백산한 이씨 부인은 불당에서 뛰쳐나와 백 승상을 찾아갔다. 그녀는 동생을 살려 달라며 울부짖었지만, 백 승상은 긴 탄식만 내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강은 관직이 없었으니 관직에 오른 가족들이 함께 책임을 져야 했지만 큰 벌을 받진 않았다. 다만 정이품 예부 시랑인 이강의 아버지 이덕해는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 땅으로 돌아가라는 명을 받았다.
이강은 전 재산을 몰수당했다. 처첩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어린 자식들만 조부모를 따라 시골로 내려갔다. 그간 권세를 떨치던 시랑의 집안이 하룻밤 사이에 몰락해 버렸다. 대문은 굳게 잠기고, 「봉쇄」라는 큼직한 금색 글자가 붙었다.
이강은 두 모녀와 무사들을 데리고 산속으로 숨어들었다. 그러나 배고픔을 참지 못한 모녀가 몰래 마을에 내려와 음식을 구하려다 그만 병사에게 붙잡혔다. 고문이 두려웠던 모녀는 심문이 시작되자마자 이강의 은신처를 털어놓았다.
주자명은 정예 기병을 이끌고 산을 올라 이강을 붙잡았다. 이강은 그 자리에서 즉시 처형되었다. 다만 산속 지형에 익숙했던 무사 몇몇이 도망을 친 탓에 일당을 전부 잡아들이진 못했다.
사사로이 무사를 양성해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일은 이렇게 일단락되었다.
* * *
녹하는 곤장도 맞지도, 저택에서 쫓겨나지도 않았다. 백천범을 필두로 영구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가벼운 벌을 내려 달라며 무릎을 꿇고 빈 덕분이었다.
초왕은 한번 내뱉은 말은 꼭 지키는 사람이었다. 어찌 내뱉은 말을 주워 담겠는가. 그는 한동안 그들을 외면했다.
무릎을 꿇고 있던 이들 모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눈치만 보았다. 그중에서도 가동은 속이 타들어 가는 듯했다. 녹하가 저택에서 쫓겨난다면 그는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그녀의 모습이 보이면 그의 마음은 언제나 설탕물을 머금은 듯 달콤한 기분으로 가득했다. 그는 녹하를 하루만 못 봐도 혼이 나갈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녀가 저택을 떠난다면 이 애끓는 마음을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그가 울상이 된 얼굴로 백천범을 바라보았다.
“왕비 마마,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백천범이 눈동자를 굴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쳤다.
“다들 일어나서 할 일을 해요. 제가 왕야께 다시 부탁드려 볼게요.”
녹하가 저택을 나가게 된다면 백천범은 영영 마음에 돌덩이를 얹고 살아갈 터였다. 더욱이 녹하가 부탁한 게 아니라 그녀가 자발적으로 도와준 일이, 이렇게나 커질 줄 누가 알았을까.
그녀는 조심스럽게 발을 걷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묵용감은 책상에 앉아 공문을 보고 있었다. 살짝 찌푸린 미간에 차가운 표정까지, 그는 까마득히 높은 친왕이었다.
침을 꿀꺽 삼키고 안으로 들어간 백천범은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다 넌지시 그를 불렀다.
“왕야, 바쁘세요?”
묵용감은 공문에 시선을 준 채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배시시 웃으며 곁으로 다가가 자신의 손을 세차게 문지르기 시작했다.
“손이 왜 이렇게 차가운지… 아무리 문질러도 따뜻해지질 않네요.”
묵용감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난처해진 그녀가 고개를 내밀고 공문을 바라보았다.
“왕야, 많이 바쁘시면 이따 다시 올게요.”
그녀는 묵용감을 힐끗거렸지만… 역시나, 그는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결국 그녀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만 가 볼게요.”
그녀가 몸을 돌려세워도 묵용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 묶이기라도 한 듯이.
“저 정말 가요……?”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아무리 천천히 걸어도 결국 문 앞에 다다른다. 그녀가 별안간 뒤를 돌아보았다.
“서방님.”
낭랑하고 달콤한 목소리였다. 묵용감은 그제야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희망이 생긴 백천범은 활짝 웃으며 달려왔다. 묵용감이 팔을 벌리기도 전에 품에 파고든 그녀가 능숙하게 그의 다리에 걸터앉아 다시 목소리를 내었다.
“서방님.”
묵용감은 의자에 등을 기댄 채, 미묘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 그리 서방을 찾는 것이오, 부인?”
“왕야께서도 아시잖아요.”
백천범이 강아지처럼 그의 가슴에 머리를 문질렀다.
“왕야, 녹하 언니를 내보내지 않으실 거죠? 녹하 언니는 제 사부님과 서로 좋아하는 사이란 말이에요. 두 사람을 갈라놓으실 거예요? 게다가 그 일은 제가 자발적으로 도와준 거예요. 그렇게 될 거라고는 아무도 몰랐어요.
이 일로 녹하 언니를 내쫓으시면 제가 어떻게 언니를 보겠어요? 왕야, 제발요. 내쫓으시겠다고 하신 말씀을 거두어 주세요. 곤장은 저랑 사부님이 언니 대신 맞을게요…….”
묵용감이 얼굴을 찌푸렸다.
“가동이 왕비에게 녹하 대신 곤장을 맞으라 했소?”
“아뇨, 그게 아니고…….”
그녀는 이번 일로 자신을 탓했다. 그 때문에라도 녹하의 벌을 나눠 받고 싶었다. 가동이 녹하를 대신해 곤장을 맞을 게 분명하니, 백천범은 자신이 나머지 반을 맞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다만 오롯이 그녀의 생각일 뿐, 아직 가동과 협의한 이야기는 아니다.
“못난 놈 같으니!”
묵용감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제 아내는 고귀한 몸이라 맞으면 안 되고, 내 아내는 거적때기라 맞아도 된단 말이냐?”
“아뇨, 그런 게 아니라니까요.”
초조해진 백천범이 얼른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 그녀는 온 힘을 실어 그를 억눌렀다. 이대로 묵용감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게 둘 수는 없었다.
“제 생각일 뿐이에요. 사부님은 제가 이렇게 생각하는 줄도 몰라요.”
백천범이 힘을 주며 버거운 듯 숨을 몰아쉬었다.
“왕야, 제발 성급히 행동하지 마세요!”
묵용감도 가동이 분별력 없이 행동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가동은 종종 눈치가 없긴 해도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은 구분할 수 있는 사내였다. 세상천지에 주인에게 대신 곤장을 맞아 달라고 하는 노비가 어디 있겠는가?
그나저나 그녀의 힘이 제법이었다. 이렇게 버티니 묵용감은 정말 일어나기 힘들었다. 다만, 그녀의 자세가……. 그녀는 원래 옆으로 앉아 그를 바라보았지만 지금은 정면으로 마주 앉아 있었다.
그는 슬그머니 자리에 앉아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 그뿐이었지만 그의 심장이 걷잡을 수 없이 뛰었다.
“내가 허락한다면, 보답으로 무얼 해 줄 것이오?”
그의 의도를 파악한 백천범이 작고 보드라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녀가 그의 얼굴에 힘껏 입을 맞추었다. 그녀는 곧바로 입술을 떼고 떨어지려 했지만 묵용감이 조금 더 빨랐다. 그가 그녀의 목을 감싸고 고개를 틀어 부드러운 입술을 머금었다.
단단하게 맺혔던 걱정과 분노가, 뜨겁고 황홀한 입술로 전부 녹아내렸다. 그는 이 순간이 영원히 끝나지 않기를 원했다.
그러나 백천범에게는 두려운 순간이 되고 있었다. 너무나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심장이 이대로 터져 버릴 것처럼 뛰었고, 숨을 쉴 수 없었다. 괴로웠다. 그 괴로움과 함께, 낯선 기쁨이 밀려왔다.
묵용감이 입술을 막고 있으니 어떻게 숨을 쉬어야 할지 몰랐다. 그녀의 얼굴이 자줏빛으로 물들자 그가 황급히 그녀를 놓아주었다.
“바보 같긴, 어서 숨 쉬시오.”
백천범이 입을 벌리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얼이 빠진 그녀를 보며 그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가 그녀의 이마에 턱을 대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정말 바보 아니오? 어찌 입을 맞출 때마다 숨을 참는단 말이오.”
이번에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어진 그녀가 웅얼거렸다.
“저, 저는 잘 모르니까요. 왕야처럼 경험이 많으신 분과는 다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