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2화
묵용감의 다급한 채찍질에 말은 전력으로 질주했다. 그는 단숨에 양수리 마을 어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 크지 않은 마을은 전투를 피하려는 듯 집마다 문을 걸어 잠그고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사람들이 한데 엉켜 싸우고 있었다. 그중 검은 옷을 입은 이들은 쇠뇌를 들고 위협적으로 휘두르고 있었다. 묵용감은 말 위에서 몸을 날려 지붕으로 훌쩍 뛰어올랐다. 그가 단숨에 무리를 향해 지붕 위를 내달렸다.
누군가 그를 발견하고 목청을 높였다.
“지붕 위에 누가 있다! 어서 쏴라!”
지붕 위로 화살이 날아들었다. 묵용감은 사방에서 쏟아지는 화살을 민첩하게 피하며 검은 옷의 무리가 포위하고 있는 마당 쪽으로 달렸다.
마당에 있던 친위병 대부분이 부상을 입고 땅에 쓰러져 있었다. 그들 주위를 검은 옷의 무리가 겹겹이 둘러싼 채였다. 방령안도 부상을 입은 상태였지만, 그는 검술을 펼쳐 필사적으로 백천범을 지켰다. 그가 다가오는 이들을 향해 매섭게 소리쳤다.
“초왕비가 목표였던 것이냐? 너희를 보낸 자가 누구냐? 종실 왕비를 해하면 목이 날아가는 걸 모르느냐! 지금이라도 무기를 버려라. 그렇지 않으면 내년 오늘이 너희의 제삿날이 될 테니까!”
검은 옷의 무리가 일제히 박장대소했다.
“곧 죽을 놈이 입만 살았구나! 초왕비가 어디에 있다는 것이냐? 초왕비를 사칭하는 가짜만 있을 뿐이지. 저들을 당장 관아로 데려가겠다. 앞길을 막는 자는 모조리 죽여 주마!”
무리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내가 손을 휘저었다.
“저놈을 내 앞에서 치우거라!”
서너 명의 무사가 방령안을 포위했다. 적들의 공세에 어느새 방령안과 백천범은 벽 모퉁이까지 밀려나고 말았다. 그러나 백천범은 채찍을 손에 꽉 쥔 채 적들을 바라보았다. 저들이 노리는 사람이 자신임을 깨달은 그녀는 문득 이 씨 부인을 떠올렸다.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방령안과 친위병까지 이 일에 연루된 게 그저 안타까웠다.
무리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내가 채찍을 바라보며 실소를 터뜨렸다.
“채찍을 가지고 놀다니, 초왕비가 이리 거친 분이신가? 황실 종친을 사칭하면 죽음을 면치 못한다는 건 알고 있겠지? 당장 널 죽여도 조정에서는 내게 상을 내릴 거다.”
백천범이 대답 대신 채찍을 휘둘렀다. 그는 몸을 틀어 가볍게 피하고는 오히려 그녀의 채찍을 붙잡았다. 사내가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겨우 이깟 재주로 까불다니!”
그가 힘껏 당기자 채찍은 백천범의 손에서 맥없이 빠져나갔다. 비록 무기는 잃었지만 백천범은 절대 굴하지 않았다. 그녀는 양손을 들어 올리고 허리를 살짝 굽혀 전투 자세를 잡았다. 그녀의 반짝이는 두 눈이 사내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사내가 가소롭다는 듯 말했다.
“하, 아는 것도 참 많구나.”
그가 채찍을 공중에 가볍게 휘둘렀다.
“아직 본인의 채찍 맛은 못 봤겠지.”
채찍이 바람을 가르며 위협적인 소리를 냈다. 겁을 주기 위해 휘둘렀건만, 예상과 달리 백천범은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다. 기분이 나빠진 사내가 다시 한번 채찍을 휘둘렀다.
그 순간, 그는 격통과 함께 시간이 멈춘 기분을 느끼며 천천히 제 가슴을 뚫고 나오는 검을 바라보았다…….
믿을 수가 없다. 난데없이 왜 자신이 꿰뚫렸단 말인가? 그의 뒤에 서 있던 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있는 힘껏 그의 가슴에서 칼을 뽑아냈다. 사내가 선홍빛 피를 내뿜으며 바닥에 쓰러졌다. 미약하게나마 숨이 붙어 있는 그가 피범벅이 되어 움찔거렸다.
검신을 타고 흐른 핏물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검을 든 묵용감이 사내의 몸을 짓밟고 매서운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저승사자라고 해도 믿을 만큼 스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감히 내 아내를 건드리다니, 사는 게 그리 지겨운가?”
묵용감이 힘껏 걷어차자 사내는 그대로 숨이 끊어졌다.
가장 위험했던 순간에 묵용감이 별안간 하늘에서 내려왔다. 짙은 자색 조복을 입은 그는 머리에 백옥관을 쓰고 장검을 들고 있었다. 매서운 눈매와 날렵한 몸의 윤곽, 당당한 풍채까지……. 그에게서는 마치 신과 같은 독보적인 기세가 흘러나왔다.
그녀는 우두머리가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멍하니 서 있었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속에서 들끓었다. 사내가 울컥 피를 토하자 그녀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백천범은 숭배에 가까운 눈빛으로 자신의 지아비를 바라보았다.
묵용감이 팔을 들어 올리자 그녀는 곧장 달려와 안겼다. 새끼 새처럼 고개를 파묻은 그녀가 그의 허리를 꼬옥 감쌌다.
“왕야께서 절 구하러 오실 줄 알았어요.”
조금만 늦게 도착했더라면 그녀는 채찍을 맞았을 터였다. 이렇게 자그마한 몸집은, 채찍질 한 번에도 심각하게 다치고 만다.
상상만으로도 묵용감은 정신이 아찔해졌다. 등을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는 급히 그녀의 몸을 살폈다.
“다친 곳은 없소?”
백천범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그러나 그녀의 옷은 온통 피로 물들어 있었다. 묵용감은 꼼꼼하게 그녀의 몸을 훑었다.
마당에 있던 나머지 무리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얼이 빠져 있었다. 하지만 우두머리는 죽었을지언정 수적으로는 여전히 우세였다. 별안간 나타난 사내의 무술 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이렇게 많은 수를 제압할 수는 없을 터. 생각을 마친 무사들이 태세를 가다듬었다. 이 절체절명의 위기에도 묵용감의 신경은 온통 백천범에게 쏠려 있었다.
무사들이 하나둘 검을 뽑아 들었다. 그들이 공격을 퍼부으려는 찰나, 대문으로 은색 갑옷을 입은 친위병들과 긴 창을 든 순포들이 줄지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검은 옷의 무리들은 곧바로 상황을 깨달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그들은 살기 위하여 이판사판으로 혈로를 뚫기 시작했다.
결국 또 한 차례 전투가 벌어졌다. 그러나 묵용감은 백천범을 감싸 안은 채 밖으로 향하기 바빴다. 그녀가 필사적으로 버둥거리다 겨우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잠시만요, 왕야! 그래도 해결은 하고 가야 해요.”
그녀는 멀찍이 피해 있던 두 모녀에게 다가갔다.
“봤죠? 어서 돈 돌려줘요. 혼사를 무르고 다시는 행패를 부리지 않겠다는 증서도 적어 줘요. 더 버티면 관아로 끌고 갈 거예요.”
두 모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상황이 불리하다는 걸 모를 리가 없으니, 그들은 재빨리 돈을 돌려주고 증서까지 써 주었다. 결국 혼사 문제는 해결된 셈이었다.
자초지종을 알게 된 묵용감이 녹하에게 호통을 쳤다.
“어찌 왕비에게 이런 하찮은 일을 해결해 달라고 하였느냐? 만약 무슨 일이라도 생겼으면 네 목을 열 번은 더 쳤을 거다. 돌아가서 곤장을 맞고 짐을 싸거라.”
녹하는 흐느끼며 그의 뒤를 따랐다. 목을 내려치지 않은 것만으로도 그가 선처를 한 것이니 용서를 더 구할 수도 없었다. 이런 상황이 벌어질 걸 알았다면 죽어도 어린 왕비를 끌어들이지 않았을 텐데.
백천범은 녹하 대신 초왕에게 용서를 구하려 했지만, 묵용감의 눈빛이 너무나도 냉랭했다. 그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울상만 지었다.
* * *
치열한 다툼 끝에 방령안의 부하 중 절반 이상이 부상을 입었다. 다리를 다치거나 화살이 가슴에 꽂히는 등 심한 부상을 입은 병사도 대여섯 명이나 되었다.
묵용감은 방에 누워 있는 병사들의 상태를 일일이 확인한 뒤, 위로의 말을 몇 마디 건네고 옆방으로 향했다.
옆방은 방령안이 홀로 쓰는 방이었다. 방령안도 팔을 다치긴 했지만 다행히 상처가 깊지 않은 듯했다.
묵용감을 본 그가 급히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소인이 무능한 탓에 왕비 마마를 제대로 지켜드리지 못하였습니다. 소인을 벌하여 주시옵소서, 왕야.”
“일어나거라.”
묵용감이 천천히 의자에 앉았다.
“네 탓이 아니다. 아무래도 상대가 계획적으로 공격한 듯싶구나. 짐작 가는 일이라도 있느냐?”
방령안도 이 일로 줄곧 고민하던 참이었다. 그가 보기에도 수상쩍은 구석이 많았다.
“소인의 생각에도 적들이 작정하고 온 듯합니다. 다만 단순히 녹하 아가씨의 집안 문제로 비롯된 것이 아닐지요. 왕비 마마께서 저택을 나가신 건 갑작스러운 일이라 외부인은 아무도 알지 못했습니다.”
“본왕이 알아보니 기홍이 녹하의 일을 왕비에게 알려 주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기홍과 녹하가 한패가 되어 왕비를 밖으로 꾀어낸 뒤, 목숨을 노렸을 수도 있지.”
“그것은…….”
방령안이 머뭇거렸다. 기홍의 인품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녹하만 연관된 일이라면 의심을 품었겠지만 기홍까지 엮여 있으니 단언하기 쉽지 않았다.
의자에 등을 기댄 묵용감이 긴 손가락으로 무릎을 톡톡 두드렸다.
“두 아이는 본왕의 곁에 있던 시간이 짧지 않으니 믿을 만하지. 어쩌면 우연히 일어난 일일 수도 있고. 상대가 누구인지는 알고 있느냐?”
“임안성에 친위병이 있는 저택은 많지 않으니 상대는 우리를 알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손을 썼다면 왕야께 적대적인 자가 틀림없습니다.”
묵용감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백 승상을 말하는 것이더냐?”
“조금이라도 적의가 있는 자라면 의심을 해야 할 듯싶습니다.”
“예전에 이 씨 부인이 왕비의 목숨을 앗아가려 했다. 이 씨 부인의 수하는 아니겠느냐?”
“하나같이 무예에 능한 자들이었습니다.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조직이 틀림없습니다. 소인의 생각엔 부녀자가 홀로 이런 일을 꾸미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을 듯합니다.”
묵용감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관원의 무사 양성은 금지된 일이다. 백 승상이 그 무리를 키웠다 한들 그 존재를 쉽게 드러낼 수는 없을 터. 게다가 내 눈이 닿는 곳에서 저지르다니, 스스로 발등을 찍는 일이 아니더냐?”
“왕야의 말씀이 맞습니다. 백 승상은 늘 교활한 수법을 써 왔으니 이런 식으로 자신을 드러내진 않습니다. 그자가 아닙니다.”
방령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창밖을 바라보던 그의 머릿속에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방령안이 얼른 묵용감에게 고했다.
“왕야, 소문에 그 마취아라는 여인은 권세가의 난봉꾼과 교제했다고 합니다. 혹 그 악질의 하수가 아닐까요?”
“그럴 가능성이 크겠구나.”
묵용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서 그 여인이 누구와 만나는지 알아보거라.”
“예.”
방령안이 한 손으로 예를 갖춰 보였다.
“소인이 바로 알아보겠습니다.”
묵용감이 그의 팔을 감싸고 있는 천 조각을 응시하다 고개를 저었다.
“이 일은 영구에게 맡기겠다. 넌 몸조리나 잘하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