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1화
백천범이 입을 삐죽였다.
“그래서, 오빠가 강제로 밀어붙였어요?”
그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저 애가 목욕을 하겠다고 했어요. 절 나가지 못하게 막더니, 옷을 벗었죠…….”
“저 여인의 몸에 손을 댔어요?”
“아뇨. 무, 무서워서 그대로 밖으로 나갔어요.”
백천범이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알겠어요. 저 여인이 일을 꾸민 것이죠. 젊은 사람들은 혈기가 왕성하고, 혼사를 치르기로 정한 상대와 가까이 지낸들 이상할 게 없어요.
하지만 저 여인은 다른 사내의 아이를 가져 놓고 우리 오빠에게 죄를 뒤집어씌웠죠. 좋은 일도 아닌데 거듭 말해서 뭐 하겠어요. 어서 봉채비 돌려줘요. 그리고 두 집안의 연은 완전히 끊기로 해요.”
녹하는 청산유수로 말하는 백천범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늘 아이라고만 생각했던 왕비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또랑또랑하게 따지는데, 그 기세가 사뭇 위풍당당했다.
하지만 두 모녀는 만만찮은 상대였다. 두 사람은 우선 백천범의 말을 강하게 부정했다. 이어 한 명은 녹하의 오빠를 쫓으며 마당을 헤집고 다녔고, 다른 한 명은 녹하에게 마구 욕을 해 댔다.
난장판이 된 광경을 바라보던 백천범이 호통을 쳤다.
“다들 그만 하세요!”
그녀의 고함에 순간 정적이 흘렀다. 두 모녀가 백천범을 쏘아보았다. 한 무리의 병사들을 이끌고 오긴 했지만 워낙 자그마한 몸집을 가진 그녀는 위화감을 주지 못했다. 손 씨가 그녀를 위아래로 훑었다.
“누군데 그렇게 크게 고함을 지르는 거요?”
그녀의 무례한 태도에 방령안이 나서려고 했지만, 백천범이 그를 말렸다.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그게 중요한가요? 당신이 알아야 하는 건 제가 이들을 대신해 봉채비를 돌려받으러 왔다는 거예요. 어서요. 돌려줄 거예요, 말 거예요?”
“하이고, 자기 일도 아닌데 나서기는.”
손 씨가 눈을 치켜떴다.
“이미 정해진 걸 물리는 게 어디 있소? 못 줘!”
“안 준다니, 어쩔 수 없지.”
백천범이 마당에 있는 친위병들을 가리켰다.
“그럼 봉채비를 돌려줄 때까지 저들에게 당신들을 때리라고 하겠어요!”
그녀는 고개를 치켜세우고 두 모녀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억지를 부린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예는 갖출 만큼 갖췄으니까. 난 이미 당신들에게 기회를 줬어요. 대화로 풀어 보려 했지만 두 사람은 들으려고도 하지도 않았죠? 이대로 계속 억지를 부리면 아기까지 잘못될지도 몰라요.”
손 씨가 몸을 바들바들 떨며 하늘을 가리켰다.
“하늘에서 신령님이 지켜보시고, 성 안에는 천자가 계신데 감히 이리 행패를 부리다니! 아무리 대단한 집안의 부녀자라 해도 난 절대 돌려줄 수 없소!”
때마침 마취아가 대문 앞에 몰려든 구경꾼들을 향해 통곡하기 시작했다.
“세상에. 대체 뭐 하는 사람이길래 민가에 난입해서 이리도 괴롭히다니요. 이게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 동네 사람들, 이리 와서 좀 보시어요. 대체 어느 집 부인이길래 이리도 남을 업신여긴답니까…….”
구경꾼들이 숙덕대며 온갖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끌고 가려는 건가? 무슨 병사들을 이리 많이 데려왔어?”
“그게 아니라 이미 정해진 혼사를 물리려고 한다지 않나. 봉채비를 돌려받겠다고 이리 많은 병사를 끌고 온 거라네. 쯧쯧, 이게 행패가 아니면 뭔가?”
“그러게 말일세. 이미 정해진 걸 어찌 무르겠다고. 이런 억지가 어디 있나.”
“그렇다 한들 병사를 데려오는 건 쉽지 않은 일인데, 대체 누구란 말인가?”
“글쎄, 어디 권세 있는 집안이겠지, 뭐. 그런 자들은 관아에서도 못 건드릴 텐데, 횡포가 따로 없구만.”
주변의 수군거림에 녹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대로 정말 일이 커지면 초왕을 볼 면목이 없다.
“왕비 마마, 다 소인의 잘못입니다. 왕비 마마까지 이 일에 휘말려 저런 쓸데없는 말을 들으시다니요. 소인, 만 번의 죽임을 당한다 한들 마땅한 일이옵니다.”
백천범의 뒤에 서 있던 방령안도 말을 보탰다.
“왕비 마마, 서두르시는 게 좋겠습니다. 백성의 공분을 사면 좋지 않을 것입니다.”
백성들이 오해를 했으니 듣기 좋은 말이 나올 리 없었다. 백천범은 개의치 않고 두 모녀를 향해 턱을 살짝 들어 올리며 명했다.
“대문을 닫고 저자들에게 본때를 보여 주거라!”
방안령이 손을 휘둘렀다.
“대문을 닫거라!”
그때 손 씨가 친위병을 막아서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누구 맘대로 문을 닫아!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우리를 때려죽이기라도 할 셈이냐? 천벌 받을 놈들, 너희도 분명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그녀의 저항은 간단히 끝났다. 친위병 두 명이 그녀를 끌어내고 대문을 닫고 있는데 검은 옷을 입은 무리가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우두머리처럼 보이는 이는 큰 체구에 훤칠한 키, 짙은 눈썹, 예리한 눈매를 가진 사내였다. 그가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누가 감히 행패를 부리는 것이냐?”
상황이 좋지 않다. 방안령의 표정이 굳었다. 마당으로 들어온 친위병은 열 명이었다. 나머지 스무 명은 밖을 지키게 했는데 이들이 어찌 들어왔단 말인가? 설마 스무 명이나 되는 병사들이 이들을 막지 못한 것일까?
방안령은 밖의 상황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검은 옷을 입은 무리가 문을 막아서고 있었다. 대문 앞을 가득 메우던 구경꾼들도 어느 틈에 사라져 버렸다.
이는 필시 저자가 데려온 인원이 친위병의 수보다 더 많다는 뜻이었다. 바깥에서 충돌이 일어났고, 그에 백성들이 모두 달아난 것이 틀림없었다. 방안령은 적잖이 놀랐다. 초왕의 친위병은 엄격한 훈련을 받아 평범한 이들은 접근할 수도 없을 만큼 탄탄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병사 한 명이 두세 명의 적을 너끈히 상대해 낼 정도였다. 그런 친위병들을 제치고 들어왔단 말인가.
두 모녀는 사내를 보자마자 다시 기세가 살아났다. 마취아는 눈물을 거두더니 한껏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마취아가 백천범과 녹하를 가리켰다.
“저들을 잡아가십시오. 민가에 난입한 것으로도 모자라 마구 행패를 부렸습니다. 황제께서 계신 곳에서 이리 날뛰다니요? 어서 관아로 잡아가십시오.”
“무엄하다!”
방령안이 소리쳤다.
“감히 초왕비께 불경한 말을 지껄이다니, 당장 저자의 뺨을 치거라!”
친위병이 마취아에게 향하자 검은 옷을 입은 무리가 그들을 가로막았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내가 싸늘하게 웃었다.
“초왕비?”
그가 백천범을 천천히 훑어보더니 코웃음을 쳤다.
“건방지구나, 감히 초왕비를 사칭하다니. 당장 저들을 잡아들여라!”
방령안은 앞에서 백천범을 지켰고, 친위병들은 검은 옷을 입은 무리와 맞서 싸웠다. 순식간에 마당이 아수라장이 되었다. 치고 박고 싸우는 소리가 이어졌고 참혹한 비명이 끊이지 않았다.
난생 처음 보는 광경에 무섭고 초조했던 녹하는 백천범이 휘말려 다칠까 봐 더더욱 겁이 났다. 만약 그랬다간 묵용감에게 몇 번이고 목이 베일 게 틀림없었다.
녹하와 방령안은 필사적으로 백천범을 보호했다. 그러나 검은 옷은 입은 무리는 끊임없이 안으로 밀려들어 왔고 마침내 거대한 포위망을 만들어 그들을 둘러쌌다.
백천범은 이 상황에서도 끝까지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그녀가 녹하에게 넌지시 물었다.
“언니, 싸워 본 적 있어요?”
녹하가 고개를 내저었다.
“소인은 말싸움에는 자신 있지만 몸싸움은 해 본 적 없사옵니다.”
“그럼 언니가 중간으로 와요. 제가 지켜 줄게요.”
“안 됩니다, 왕비 마마. 혹여 천금 같은 옥체가 상하시기라도 하면…….”
“혹여 같은 일은 없어요. 예전에도 겪어 본 일이에요.”
백천범이 녹하를 독촉했다.
“어서요. 서둘러요. 언니가 앞에 있으면 거치적거려서 지켜 주기가 더 힘들다고요.”
녹하는 어쩔 수 없이 백천범의 뒤로 물러났다. 검은 옷을 입은 무리를 향해 차가운 시선을 보내던 백천범이 소매에서 천천히 굵은 채찍을 꺼냈다. 석 장(丈) 정도 길이의 검은 채찍이 햇빛을 받을 때마다 어두운 빛을 반사했다.
그녀가 손을 흔들자 채찍이 바람을 가르며 뻗어나갔다. 구불거리는 채찍이 가장 앞에 서 있던 무사의 몸에 닿았다. 그 순간, 무사의 옷소매가 그대로 찢어졌다.
채찍은 묵용감의 선물이었다. 백천범의 힘이 부족한 걸 알고 그는 채찍 끝에 가시를 달아 놓았다.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상대를 제압하기 위함이었다.
채찍을 맞은 무사는 흠칫 놀랐다. 어린 계집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있던 참이었다. 하지만 방심한 탓에 제대로 한 방 맞았다. 화가 난 그는 맨몸으로 백천범에게 달려들었다.
두 명과 맞서 싸우고 있던 방령안은 녹하의 비명에 급히 백천범에게 달려갔다. 그가 멀어지자 이번에는 녹하가 적의 눈에 띄고 말았다. 무기도 없고, 싸우는 방법도 몰랐던 녹하는 그대로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다.
그 장면을 목격한 백천범이 녹하를 붙잡은 사람에게 급히 채찍을 휘둘렀다. 그때, 어느새 그녀의 뒤로 다가온 무사가 팔을 잡아챘다. 때마침 그녀의 곁에 다다른 방령안이 검을 휘둘렀다. 반듯하게 잘려 나간 손목이 그대로 땅에 떨어졌다. 분수처럼 치솟은 무사의 피가 백천범의 옷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동료의 부상에 화가 치솟았는지, 여기저기서 검을 뽑아 드는 소리가 났다. 전투에 동참하는 적이 늘어나고 있었다. 급격하게 열세에 몰린 친위병들이 백천범을 보호하며 한쪽으로 물러났다.
* * *
묵용감은 평소처럼 서쪽 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영구에게 고삐를 넘겨받으려는 순간, 갑자기 친위병 한 명이 달려와 예를 갖췄다.
“왕야! 왕비 마마, 왕비 마마께서 정체 모를 무사들에게 포위되셨습니다. 어서 양수리 마을로 가 보셔야 합니다!”
난데없는 소식에 놀란 묵용감이 버럭 호통을 쳤다.
“왕비를 지키는 자가 아무도 없단 말이냐!”
“방 총령이 친위병 서른 명을 대동하였지만 적의 수가 워낙 많은 데다 쇠뇌를 가지고 있어 저희 병력만으로는…….”
친위병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묵용감은 말에 올라타 달려나갔다. 영구가 그 뒤를 급히 쫓았다.
가동이 병사에게 물었다.
“상대는 몇이나 되느냐?”
“얼추 여든에서 백 명은 되어 보였습니다. 저희 쪽 병사 스무 명은 집 밖을 막고 방 총령은 병사 열 명과 함께 마당에서 왕비 마마를 지키고 계셨습니다. 다만 전세가 어찌 되었는지는 소인도 잘 모르겠습니다.”
“저택으로 가서 친위병을 더 데려오거라! 서둘러야 한다. 나는 관청으로 가 지원을 요청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