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0화
학평관이 방을 나서자 기홍이 물었다.
“왕비 마마, 녹하 오라버니의 봉채비를 돌려받으려 하시는 것입니까?”
“이 방법밖엔 없어요.”
백천범이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은 돈을 빌린 사람이 더 떵떵거리고, 빌려준 사람이 오히려 굽실거린다고들 하죠? 그래도 녹하 언니까지 그러게 둘 수는 없죠. 억울한 상황에서 돈까지 돌려받지 못하는 건 말도 안 돼요. 언니, 녹하 언니의 집이 어딘지 알려 줘요. 제가 얼른 해결하고 올게요.”
기홍은 백천범의 성격을 잘 알았다. 이 일을 알게 된 이상 그녀는 끝까지 손을 떼지 않을 터였다. 또한 초왕에게는 감히 부탁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어린 왕비는 다르다. 두 시녀와 왕비는 자매처럼 돈독한 사이니 이번만 그녀의 힘을 빌려도 되지 않을까?
백천범은 서른 명의 친위병을 이끌고 위풍당당하게 길을 나섰다. 거리로 접어들자 수많은 사람이 걸음을 멈추고 그녀의 행렬을 바라보았다. 대체 어느 집 부녀자가 외출을 하기에 이렇게 많은 친위병이 따른단 말인가? 친위병은 모두 기운 넘치는 젊은 장병들로, 그 기세가 대단했다.
백천범도 치마 안에 바지를 입고 각반까지 둘러맸다. 무슨 일이 생기면 스스로 보호할 수 있어야 했다.
그녀가 녹하의 집에 도착했을 때 녹하는 손을 허리에 얹고 오빠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그러고도 사내라 할 수 있어? 왜, 아예 성문에 올라가서 그 비참한 꼴을 온 동네에 보여 주지 그래? 못난 겁쟁이 같으니. 그 애가 시집을 오겠다고 하면 정말 받아 주려고?
멀쩡한 입으로 왜 할 말도 못 하는 거야! 어머니 아버지 곁에서 효도는 못 할망정, 같이 모욕을 당하게 해? 세상에 이런 아들이 어디 있어! 나였으면 부끄러워서 진즉 머리를 박고 죽었을 거야!”
녹하가 한참 욕을 퍼붓고 있는데 한 무리의 사람들이 줄지어 들어왔다. 신부 쪽 사람들이 행패를 부리러 온 줄 안 녹하가 서둘러 장대를 들고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그러나 녹하는 곧 백천범을 발견하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왕비 마마, 여기는 어쩐 일이십니까?”
“녹하 언니, 저를 남으로 여기시는 거예요?”
백천범이 원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왕야께 말씀 못 드린다고 저한테까지 알리지 않다니요. 제가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화가 났는지 몰라요. 언니, 여기서 화내지 말고 저랑 봉채비 돌려받으러 가요.”
녹하가 수많은 친위병을 얼떨떨하게 바라보았다.
“왕비 마마, 이게 대체…….”
“뭐긴 뭐겠어요. 사람이 많으면 마음도 든든해지는 법이잖아요. 이 사람들 앞에서도 돈을 안 돌려주겠어요?”
백천범이 늠름하게 손을 흔들었다.
“언니, 얼른 앞장서요!”
녹하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오랜 시간 함께한 터라 녹하도 백천범의 됨됨이를 잘 알고 있었다. 녹하는 얼른 눈물을 닦으며 대답했다.
“저도 길은 잘 모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왕비 마마. 변변찮은 제 오라비에게 앞장서라고 하겠습니다.”
녹하가 방으로 돌아가 오빠의 옷깃을 틀어쥐고 밖으로 나왔다.
“그 뻔뻔한 집으로 안내해. 피땀 흘려 모은 돈을 이대로 포기하는 게 말이 돼?”
그는 녹하의 말에 대꾸를 하려다 문 밖에 있는 친위병들을 발견하고 할 말을 잃었다. 그가 얼른 백천범에게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 백천범은 그에게 일어나라고 한 뒤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겁내지 마세요. 우리 쪽 인원이 많으면 그쪽에서도 분명 돈을 돌려줄 거예요. 돈을 되찾으면 앞으로는 당당하게 지내세요. 오빠는 사내잖아요. 그러니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여동생이 나서게 하진 말아 주세요.”
녹하네 오빠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는 연거푸 알겠다고 대답한 뒤, 백천범 일행을 이끌고 여자의 집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백천범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녹하의 오빠와 혼인을 치르기로 했던 이는 마취아馬翠兒라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가족과 함께 양수리楊樹里 마을 어귀에 살았다. 아버지는 노름꾼, 어머니는 온종일 빈둥거렸다. 그들은 취아의 외모를 돈줄 삼아 사는 작자들이었다.
취아 본인도 별반 다르지 않은 사람이었다. 조금만 다정한 이를 만나면 곧바로 가까이하니, 나이는 어려도 만나 본 상대가 한둘이 아니었다. 그러다 성 안에서 막강한 권력을 가진 그 불량자와 만나게 되었다.
그는 취아의 임신을 알았지만, 신분이 미천한 그녀와 혼인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대신해 아이의 아빠가 될 사내를 찾았다. 그게 바로 녹하의 오빠였다.
마침내 녹하 일행이 그녀의 집 앞에 도착했다. 녹하의 오빠가 대문을 두드렸는데 성격이 너무 무른 탓에 문조차 살살 두드렸다. 참다못한 녹하가 오빠를 끌어내고 있는 힘껏 문을 두드렸다.
곧 문 너머에서 잔뜩 언짢아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웬 놈이 귀가 먹었나. 문 다 부서지겠네!”
문을 열어 준 이는 녹하와 녹하의 오빠를 보고 표정을 찡그렸다.
“난 또 누구라고. 사돈 처녀까지 데리고 여긴 어쩐 일인가?”
취아의 어머니, 손 씨였다. 그녀의 얼굴에는 어조만큼이나 녹하 남매를 반기지 않는 기색이 역력했다.
“내일모레가 혼삿날인데 이렇게 찾아오면 어쩌자는 건가. 법도는 지켜야지. 마음이 급한 건 알겠네만, 이틀만 더 기다리게.”
“하!”
녹하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누가 이 집 아가씨랑 혼사를 치른답니까? 우리 집 담은 절대 못 넘습니다. 봉채비도 돌려주십시오. 두 집이 연혼할 리 없으니 앞으로 마주쳐도 모르는 사람처럼 지냅시다!”
손 씨는 녹하의 말에 불같이 화를 내며 눈을 희번덕거렸다.
“오라비의 혼사에 동생이 끼어드는 법이 어디 어디 있소? 혼사를 엎고 말고 할 결정권도 없지.”
그녀가 녹하의 오빠를 가리키며 말했다.
“사위의 생각이 제일 중요하고말고.”
녹하가 오빠의 옷깃을 움켜쥐며 윽박질렀다.
“이럴 때 말 좀 하라고!”
하지만 녹하의 오빠는 고개만 숙이고 입을 꾹 다물었다. 결국 녹하가 그의 다리를 있는 힘껏 걷어찼다.
“빨리 말해!”
그제야 녹하의 오빠가 웅얼거리듯 말을 내뱉었다.
“이 혼사는, 어, 없던 일로 하시지요.”
“하이고, 돈까지 오간 마당에 마음을 바꾸겠다? 우리 집안을 그렇게 얕봤단 말인가!”
손 씨가 들으란 듯이 언성을 높였다.
“동네 사람들한테 물어보게. 혼사를 도중에 그만두겠다니, 황제 폐하라도 이런 법은 없네! 우리 애를 책임지기 싫으니 버리고 싶은 것이겠지.”
오히려 화를 내는 손 씨의 뻔뻔한 태도에 녹하의 목소리도 커졌다.
“어찌 이리 뻔뻔할 수 있습니까? 배부른 여인이 시집을 오는 게 말이 됩니까? 제 오라비와 저희 집안을 얕잡아 보는 것이 아닙니까?”
그때, 집 안에서 마취아가 나왔다. 큰 키에 호리호리한 몸매, 치켜올라간 눈꼬리가 제법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옷을 껴입은 탓인지 배부른 티는 거의 나지 않았다.
녹하의 오빠는 취아를 보자마자 풀썩 주저앉더니 고개를 떨구었다.
마취아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보란 듯이 뒤뚱거리며 걸어왔다. 그녀가 녹하의 오빠를 곁눈질로 바라보며 말했다.
“말해 봐요. 정말 결백한가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입에 담기도 껄끄럽네요. 왜요? 할 건 다 해 놓고 인정은 못 하겠어요? 내가 미쳤지, 하필 이런 겁쟁이의 청혼을 받아들였을까!”
눈이 휘둥그레진 녹하가 오빠를 필사적으로 일으키며 말했다.
“뭐라고 말 좀 해. 이렇게 누명을 뒤집어쓰고 있을 거야!”
녹하의 오빠는 입만 벙끗거리다 다시 바닥에 주저앉았다.
녹하는 기가 막힌 듯 눈을 깜박였다. 아이는 분명 오빠의 아이가 아니었다. 알고 지낸 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아이를 가질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녀의 오빠가 보이는 태도는 녹하를 혼란스럽게 했다. 마치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 같지 않은가. 정말 마취아의 말이 사실이라면 무슨 낯으로 봉채비를 돌려달라고 한단 말인가?
한편, 백천범은 친위병을 데리고 골목 어귀에 서 있었다. 그녀는 되도록 권력으로 남을 누르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우선은 남매가 대화로 해결하기를 바랐다. 끝끝내 말이 통하지 않는다면, 그때 개입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한나절이 지나도록 녹하가 돌아오지도 않았고, 고성이 오가니 모여드는 구경꾼만 많아지고 있었다.
참다못한 백천범이 손을 흔들었다.
“제가 직접 봐야겠어요.”
그녀는 방령안에게 자신의 신분을 감추라고 지시했다. 자칫하면 초왕의 체면이 깎일 수도 있었다. 이 정도는 그녀도 염두에 두고 있는 터라 주의를 기울였다.
친위병 총령인 방령안이 손짓하자 곧장 열 명의 친위병이 앞으로 뛰어나왔다. 그들은 대문 앞을 둘러싼 구경꾼 사이를 가르고 백천범을 집 안으로 호송했다.
마당에는 싸늘한 표정의 녹하와 바닥에 힘없이 주저앉은 녹하의 오빠, 그리고 거만한 표정의 두 모녀가 있었다.
백천범이 곧장 녹하에게 물었다.
“어떻게 됐어요? 얘기는 잘된 거예요?”
기세등등하던 두 모녀는 은색 갑옷을 입은 친위병들이 들어오자 크게 당황했다.
“대체 뭐 하는 사람이길래 민가에 난입한단 말이오?”
방령안이 입을 열려는데 백천범이 저지했다.
“내가 말할게요.”
백천범은 돌려 말하는 걸 싫어했다. 그녀는 곧장 모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봉채비 돌려줘요. 어서.”
녹하가 백천범을 끌어당겨 방금 있었던 일을 조용히 알려 주었다. 이야기를 들으니 기가 찼지만, 바닥에 주저앉은 녹하의 오빠를 보자 절로 탄식이 나왔다. 백천범은 그의 옆에 웅크려 앉아 속삭였다.
“정말 오빠 아기 맞아요?”
백천범의 면전에서 거짓을 고할 수 없던 그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그럼 저 여인에게 장가가고 싶어요?”
그는 잠시 주저하더니 다시 고개를 저었다.
“손도 잡고 입도 맞추고, 그리고 뭘 했는데요?”
녹하의 오빠는 얼굴을 붉히더니 이를 악물고 입을 다물었다. 화가 난 녹하가 그의 몸에 마구 발길질을 했다.
“이 못난 놈아, 그게 그렇게 하고 싶었니? 그럴 땐 겁도 없지!”
녹하의 오빠는 수치심에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백천범은 대충 어떤 상황인지 눈치채고 조용히 물었다.
“저 여인이 먼저 나섰죠?”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의로 그런 거네요. 이걸 빌미로 밀어붙이려 했나 본데,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요. 동네 사람들이 입을 모아 말하더군요. 이미 여러 사내들과 정을 나누었다고요.”
녹하의 오빠가 번뜩 고개를 들었다. 그가 무언가를 깨달은 듯 입술을 바들바들 떨었다.
“저, 저 애가 제게 몸을 보여 줬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