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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219)화 (218/1,192)

제219화

조금씩 흔들리는 가마 밖에서 질서정연한 가마꾼들의 발소리가 들려 왔다. 곧 금성대로 저자에 다다랐는지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제야 백천범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왕야, 왜 벌하신 거예요? 저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잖아요.”

그 목소리가 묵용감을 처량하게 했다. 바보 같이, 그녀는 입맞춤을 벌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한참 뒤에야 답했다.

“스스로를 벌한 것이오.”

백천범에겐 어리둥절한 대답이었다.

“예?”

고개를 든 그녀는 어두운 눈망울을 마주하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이 일을 덮어 두기로 했다. 변덕이 심한 그의 심기를 건드려 괜히 혼쭐이 나긴 싫었다.

그녀는 마음을 다잡은 뒤, 우산을 들어 품에 안았다. 그녀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했다.

“술만 드시고 식사는 못 드셨으니까 기홍 언니한테 야식을 만들어 달라고 하는 게 좋겠어요.”

묵용감은 흠칫 놀랐다. 그녀가 지금 관심을 주고 있단 말인가?

그녀가 말을 먼저 꺼냈으니 그도 슬그머니 대화를 시도했다. 딱딱하게 대하면 또다시 며칠 동안 못 만날지도 몰랐다.

“왕비도 들 것이오?”

“저는 배가 부른걸요.”

그녀는 자그마한 이가 다 보이도록 웃어 보였다.

“돌아가서 쉬고 싶어요.”

그가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더니 퉁명스럽게 말했다.

“많이 먹긴 했나 보오. 반찬이 이에 다 꼈소.”

얼굴이 빨개진 백천범은 서둘러 입을 가렸다. 그녀가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그럴 리가요.”

묵용감이 피식 웃음을 터트리곤 다시 벽에 기댔다. 백천범은 그제야 놀림당한 걸 깨닫고 주먹을 가볍게 날렸다. 묵용감이 그녀의 주먹을 막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어찌 이리 찬 것이오. 시녀들이 손화로도 준비해 주지 않았소?”

“괜찮아요. 너무 자주 쓰면 습관이 되는걸요.”

묵용감은 우산을 한쪽에 세워 두고 그녀의 두 손을 꼭 감싸 쥐었다.

“습관이 되면 그만이지. 하인들이 시중을 드는데 걱정할 게 뭐가 있단 말이오.”

“오늘은 왕야랑 둘이서만 나왔잖아요.”

“하면 내가 들어 주겠소.”

“왕야께서 계시면 손화로 같은 건 필요도 없어요. 왕야의 손이 훨씬 따뜻한걸요.”

기분을 맞춰 주려는 듯 그녀가 얼굴을 그의 손에 문질렀다.

묵용감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녀가 무심코 하는 행동은 늘 그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어느새 가마가 저택에 들어섰다. 중문에 도착하니 학평관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발을 걷어 올리며 공손히 아뢰었다.

“왕야, 왕비 마마. 다녀오셨습니까.”

묵용감은 짧게 대답한 뒤, 가마에서 내려 백천범을 부축했다. 백천범은 우산을 품에 꼭 안고 있었다. 학평관을 본 그녀가 우산을 겨드랑이에 끼고 예를 갖췄다.

“어르신, 소인 무사히 다녀왔습니다.”

학평관은 황송함에 몸 둘 바를 몰라 앓는 소리만 냈다.

“아이고, 왕비 마마, 소인에게 이리 분에 넘치는 대접을 해 주시다니요!”

백천범이 입을 삐죽거리며 투덜댔다.

“재미없어.”

그녀가 묵용감에게 예를 갖췄다.

“왕야, 소인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묵용감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정말이지 영락없는 아이가 아닌가. 하인 분장을 했다고 끝까지 하인 흉내를 내다니.

“날이 어두워졌으니 내가 데려다주겠소.”

“아닙니다. 소인은 어두운 길 따윈 하나도 무섭지 않습니다. 혼자 갈 수 있으니 왕야께서는 그만 쉬십시오. 소인,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그녀는 예를 갖춰 인사를 올린 뒤 그대로 몸을 돌려 앞으로 향했다.

학평관이 서둘러 하인들에게 분부했다.

“왕비 마마께 등을 밝혀 드리지 않고 뭣들 하는 것이냐?”

등불을 든 시녀가 그녀의 뒤를 쫓으려 했지만 묵용감이 손을 내저었다.

“따르지 말거라. 본왕이 가 볼 것이다.”

초왕의 말에 다들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인들은 두 주인이 멀어지는 모습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백천범은 워낙 길눈이 밝은 데다 익숙한 길이라 어두워도 빠르게 걸어갈 수 있었다. 그때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눈을 가늘게 뜬 그녀가 우산으로 있는 힘껏 왼쪽 뒤편을 내리치며 소리쳤다.

“누구냐, 수상쩍게 뒤를 쫓는 사람이!”

물론 묵용감이 그녀 정도의 실력을 가진 이에게 가만히 맞고 있을 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가 손을 뻗어 그녀의 우산을 가볍게 빼앗았다. 힘이 훨씬 부족했던 백천범은 눈 깜짝할 사이에 우산을 빼앗기고 말았다. 유일한 무기를 빼앗긴 그녀는 당황하기는커녕 얼굴을 치켜들고 원망스럽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왕야, 이렇게 기습하시는 게 어디 있어요?”

묵용감이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나라는 걸 어찌 알았소?”

“당연히 알죠. 왕야께서 재로 변하신다고 해도 전 알 수 있다고요.”

“…….”

어떻게 들어도 이상한 말이었다.

그래도 그는 기분이 좋았다. 그녀가 자신을 알아볼 수 있다지 않은가. 참 별나면서도 이런 면은 제법이었다. 백천범은 눈치도 빠르고 갑작스러운 일에도 크게 당황하거나 두려워하는 법이 없었다. 다른 여인이었다면 이런 상황에서 비명을 내지르거나 울음을 터뜨렸을 터였다.

그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어둠 속에서 그의 눈망울이 반짝였다.

“부인, 이 서방이 데려다주겠소.”

맞잡은 손은 무척 따스했다.

* * *

평소 녹하는 당당하고 남에게 지지 않는 성격이었다. 하지만 오늘의 그녀는 수심이 가득해 보였다. 백천범은 자연스레 궁금해졌다. 대체 누가 그녀를 이렇게 만들었단 말인가?

기홍에게 넌지시 물어보니 그녀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녹하와 다르게, 녹하의 오라버니는 성격이 무르답니다. 무슨 일만 생기면 늘 녹하가 나서야 한다니까요. 정말 큰일입니다.”

기홍은 그녀에게 간단하게 사건의 전말을 설명해 주었다. 녹하의 오빠는 혼사를 치를 예정이었고, 봉채비도 이미 신부의 집에 전달했다고 한다. 동네 이웃이 소개해 준 신부였다. 그런데 알고 보니 신부가 이미 다른 사내와 몸을 섞고 임신을 한 상태인 것이었다.

그녀는 배 속의 아이를 숨기고 혼사를 치르려 했다. 내막을 알게 된 녹하의 집은 혼사를 무르고 봉채비를 돌려 달라 요구했다. 하지만, 신부의 집안은 뻔뻔하게 맞섰다. 그들은 돈을 돌려주기는커녕 혼사도 무를 수 없다며 녹하의 오빠를 압박했다.

아이 아빠는 동네에서도 소문난 불량배 중 한 사람였다. 그자에게 시집을 갈 수도, 홀로 아이를 낳은 후에 받게 될 손가락질을 감당할 수도 없었던 신부는 서둘러 상대를 찾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걸린 상대가 바로 녹하의 오빠였다. 혼사를 물리지 않으면 이번엔 녹하의 오빠가 난처해질 것이 분명했다.

녹하의 부모님은 성실하고 순박했으나, 그런 성정은 지금과 같은 상황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따로 도움을 받을 친척도 없으니 이대로 두면 불량배에게 무슨 보복을 당할지도 몰랐다. 결국 녹하의 부모님은 봉채비를 포기하겠다고 했지만, 신부 측에선 여전히 혼사를 밀어붙이고 있었다.

손쓸 방법 없이 시간만 흐르고, 녹하의 부모님은 날마다 눈물로 밤을 지새우고 있었다. 녹하는 며칠 전에 집에 다녀오면서 그간의 상황을 전해 들었다. 이러한 이유로 그녀는 저택에 돌아온 이후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사정을 들은 백천범이 말했다.

“왕야께 말씀드리면 되잖아요. 왕야께서 나서시면 해결 안 되는 일이 없어요.”

기홍이 고개를 저었다.

“저도 얘기해 봤는데 녹하 저 계집애가 말을 들어야지요. 평소엔 그리 사납게 굴어도 사실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려고 하지 않는 성격입니다. 왕야께는 더욱 그럴 테지요. 저희는 노비이지 않습니까. 주인의 걱정을 나누기도 부족한데 도리어 폐를 끼치다니요. 녹하는 절대 그리하지 않을 것입니다.”

백천범이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제가 알아 버린 이상 보고만 있을 수는 없어요.”

그때 학평관이 발을 걷어 올리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가 백천범에게 예를 갖춰 인사를 올린 뒤 기홍에게 말했다.

“녹하 아가씨가 집에 일이 있다며 휴가를 내고 떠났네. 오늘은 홀로 시중을 들어야 하니 필요하다면 하인을 더 붙여 줄까 하네.”

기홍이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췄다.

“직접 찾아와 주시다니, 송구합니다. 일은 저 혼자서도 할 수 있습니다. 갑작스레 시녀가 바뀌면 왕야께서도 불편하실 것입니다.”

“알겠네.”

학평관이 활짝 웃으며 백천범에게 말했다.

“왕비 마마, 분부하실 일이 없으시면 소인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백천범이 고개를 저었다.

“안 그래도 방금 어르신을 찾아갈 생각이었어요.”

“말씀하십시오, 왕비 마마.”

학평관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백천범은 시중들기 편한 주인이었다. 그녀는 난처한 일을 분부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내리는 분부는 대개 토끼 먹이 따위를 가져와 달라는 식이었다.

“왕야께서 필요할 땐 친위병을 불러도 좋다고 하셨어요. 저택 밖으로 잠시 나가려는데 친위병 좀 배치해 주세요.”

그러니 그가 이런 분부를 받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학평관이 황급히 물었다.

“왕비 마마, 어디를 가시려는 것입니까?”

“저택 안이 좀 답답해서 밖에 나가 보려고요.”

“친위병은 몇 명 정도를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백천범이 잠시 고민하다 답했다.

“서른 명 정도 필요해요.”

학평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늘 혼자 다니던 왕비가 별안간 친위병을 서른 명이나 이끌겠다고 하니, 무엇을 하려는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저택에 상주하는 친위병은 대략 쉰 명 정도로, 왕비에게 서른 명을 딸려보내도 상관은 없었다. 그러나 학평관은 괜스레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학평관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백천범이 물었다.

“안 돼요? 그럼 조금 줄일게요. 어르신을 난처하게 할 수는 없죠. 스무 명은 괜찮아요?”

“황공하옵니다, 왕비 마마. 왕비 마마께서 몇 명을 필요로 하시든 문제 될 것 없지요. 다만, 감히 여쭙겠습니다. 갑자기 그리 많은 수의 친위병을 인솔하시려 하시다니, 혹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입니까?”

“옛말에 사람이 많으면 담도 커진다고 하잖아요. 친위병이 많이 있으면 밖에 나가서도 겁이 안 날 것 같아서요.”

학평관이 속으로 생각했다.

‘왕비 마마께서 겁이 나신다고요? 소인은 왕비 마마처럼 담이 크신 분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왕비의 지시를 거부할 수는 없었다. 어쨌든 많은 친위병을 딸려 보내면 그도 마음이 놓일 테니 따르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계산을 마친 그가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예. 소인이 준비를 마친 뒤에 다시 왕비 마마께 말씀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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