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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218)화 (217/1,192)

제218화

백천범은 이렇게 아름다운 곳은 처음 보았다. 커다란 호수 위에 큰 정자가 자리잡고 있었다. 정자 기둥에 걸려 있는 연등이 호수를 비춰 수면이 아름답게 반짝거렸다. 기둥에는 명주실도 휘감겨 있었는데 등불 빛을 받아 원래의 색을 알 수 없을 만큼 붉게 빛났다. 기둥 꼭대기에는 풍경이 걸려 있었는데 바람이 불 때마다 흔들리며 맑은 소리를 냈다.

정자 주변에 두른 두꺼운 발이 내부의 빛이 새어나가지 않게 막고 있었다. 그 덕분에 정자는 신비로운 분위기로 가득했다. 대체 안에서 무얼 하고 있단 말인가?

하인이 발을 올리자 따뜻한 공기와 함께 은은한 향냄새가 풍겨 왔다. 백천범은 묵용감과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 있던 훤칠한 외모의 사내가 두 사람을 반겼다. 수려한 용모의 사내는 가느다란 끈으로 머리를 대충 올려 묶었는데 관을 쓰지 않아 편안하게 보였다. 긴 도포의 소매와 깃에 담비 털을 둘러 놓아서인지 짙은 풍류가 느껴졌다.

이런 모습의 묵용택을 처음 본 백천범은 넋을 놓고 그를 바라보았다.

오늘은 초왕비가 아닌 하인이었기 때문에 묵용택은 그녀에게 예를 갖추지 않았다. 그가 웃으며 말했다.

“도련님도 자리에 앉으시지요.”

백천범이 우산을 안고 예를 갖췄다.

“나리, 제게 이리 예를 갖추시다니요. 저는 하인이니 마땅히 서 있겠습니다.”

“하인이라니요.”

묵용택이 그녀를 의자에 데려가 앉혔다.

“이곳에 온 이상 모두 저의 손님이지요. 앉으세요. 여기엔 우리뿐입니다.”

식탁 옆에 두 여인이 서 있었다. 두 여인은 백천범과 묵용감을 바라보며 예쁘게 미소를 짓더니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오셨습니까, 나리. 어서 앉으십시오.”

백천범은 이 상황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두 여인은 대갓집 규수처럼 보이지 않았다. 묵용감이 의자에 앉자마자 한 여인이 그의 곁에 다가갔다. 여인은 뼈가 없는 사람처럼 몸을 유연하게 흔들며 그에게 기댔다. 이내 여인이 고운 손으로 작은 술잔을 들어 올리더니 간드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나리께 술 한 잔 올리겠습니다.”

백천범은 그제야 묵용택이 기녀들과 함께 술을 마시기 위해 초대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시집을 오기 전, 오빠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몰래 들은 적이 있었다. 이 상황은 오빠들이 말하던 내용과 똑같았다.

묵용감은 이따금 그녀에게 입을 맞추거나 꽉 껴안곤 했지만, 그래도 그녀의 눈에는 여전히 위엄 있는 존재였다. 평소 그의 사소한 행동들은 그녀에게 아무런 효과도 없었지만 오늘은 양옆에 미인들이 앉아 있으니……. 오늘 밤 제대로 된 구경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그녀의 마음이 설렜다.

나오는 음식도 훌륭했다. 기홍의 솜씨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었다. 그녀는 우선 요기를 한 뒤에 턱을 괴고 히죽히죽 웃으며 제대로 구경할 자세를 잡았다.

그녀의 모습에 묵용택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의 부인은 이쯤 되면 화를 내며 얼굴을 굳혀야 정상이었다. 정도가 더 심하면 젓가락을 던지거나 술잔을 깨뜨려야 했다. 그런데 어찌 환하게 웃을 수 있단 말인가?

오히려 그녀는 부군보다 더 기다리기 힘들어하는 표정이었다……. 어린 형수의 머리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고서야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한편 묵용감도 괴롭긴 마찬가지였다. 안 그래도 불을 때서 더운 데다가 양옆에 달라붙어 추파를 던지는 불덩이 같은 여인들까지……. 등줄기에서 땀이 주륵 흘러내렸다. 게다가 백천범이 앞에 있으니 도무지 몰입을 할 수 없었다. 외도 현장을 들킨 남편이 된 기분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상황은 기이하게 흘러갔다. 두 남자의 얼굴은 울긋불긋하게 상기된 반면, 젊은 하인만 미소를 잃지 않고 있었다.

묵용감은 이쯤에서 포기하고 싶었다. 두 여인에게 이만 물러가라고 말하려는 찰나, 묵용택이 진지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곧 배수진이라도 치려는 듯 그 기세가 사뭇 결연했다.

그가 손뼉을 치자 이번엔 눈부신 미인이 안으로 들어왔다. 시녀들이 외투를 벗겨 주어 그녀가 입은 옷이 드러났다. 은사로 정교하게 짜낸 듯한 생김새의 옷이었다. 움직일 때마다 은빛이 반짝이며 여인의 새하얀 피부가 언뜻 드러났다. 은빛 옷 아래에는 얇은 보랏빛 면을 겹겹이 둘러 입었는데 그 모습이 설원에 만개한 꽃처럼 아름다웠다.

맑고 투명한 눈망울을 가진 그녀가 광채 어린 아름다움을 뽐냈다. 피부는 백옥처럼 매끄러웠고, 가느다란 허리는 늘씬한 자태를 한껏 돋보이게 했다.

백천범은 아름다운 자태로 사뿐사뿐 걸어오는 미인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한참 뒤에야 숨을 내쉬었다. 가히 절세가인이라 할 만했다. 자신도 넋을 놓게 되는데 사내들은 오죽할까?

묵용택은 본래 있던 기녀를 물리고 방금 들어온 미인을 묵용감의 옆에 앉혔다. 그녀는 다른 기녀처럼 묵용감에게 달라붙거나 아양을 떨진 않았다. 그저 고아한 표정으로 술을 따라주려고 했다. 그에 묵용감이 손가락으로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

“네가 이 나리에게 직접 먹여 주거라.”

그녀가 우아하게 웃었다. 그녀의 눈빛은 보는 사람의 심장을 멎게 할 듯 매혹적이었다. 그녀는 술을 가볍게 한 모금 머금은 뒤 묵용감의 목을 감싸고 천천히 다가갔다.

바로 지금이 묵용택과 말을 맞춰 놓은 가장 중요한 대목이었다. 이번에도 백천범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단 하나! 백천범이 남자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뿐이었다.

묵용택은 술을 한 잔 들이켰다. 그 또한 긴장이 되었다. 작전대로라면 백천범도 화가 나서 자리를 뜰 것이 분명했다. 그 후에 묵용감이 따라 나가 입을 맞추면 그녀도 곧 사랑에 눈을 뜰 것이라며 호언장담했던 묵용택이다.

아직까지는 버틸 수 있었던 묵용감은 붉은 입술이 다가오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는 기분이 썩 좋은 척 이 상황에 몰입하려 노력했다. 심지어 미인을 품에 감싸 안기까지 했다. 두 사람의 입술이 맞닿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는 어서 백천범이 화를 내길 기다렸다. 하지만 곁눈질로 바라본 백천범의 표정은 지극히 평온했다. 설상가상으로 미인이 기다리지 못하고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술 내음이 퍼지면서 묵용감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가 서둘러 백천범을 곁눈질로 쳐다보았다.

그 순간, 그는 화가 나 죽을 것 같았다. 백천범은 여전히 히죽거리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모든 걸 다 알고 있다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더 이상 상황극을 이어갈 수 없던 그는 미인을 밀쳐내고 손수건을 꺼내 입을 벅벅 문질렀다. 이내 그는 묵용택에게 손수건을 집어 던지고 말 없이 삿대질만 해 댔다. 잔뜩 성이 난 그가 백천범을 데리고 그대로 밖으로 나가 버렸다.

묵용택은 멍하니 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대체 이게 어찌 된……?”

그가 서둘러 묵용감의 뒤를 쫓았다.

“셋째 형님, 이건 제 탓이 아닙니다. 형님, 형님! 제 말 좀 들어 보십시오.”

마침 묵용감은 백천범을 가마에 태우고 있었다. 묵용택이 가까이 다가오자 묵용감은 그의 옷깃을 잡고 한쪽으로 끌고 갔다. 묵용감이 목소리를 낮게 깔고 화를 냈다.

“이것이 네가 말한 좋은 방법이더냐? 백날 해 봤자 소용도 없는 일을 해서 괜히 내 체면만 깎이지 않았느냐!”

묵용택이 울상을 지었다.

“이게 어디 제 탓입니까?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형수께서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으면 그 이유는 한 가지라고 말입니다. 형수님께서는 사내를 좋아하지 않으시는 겁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왕비가 여인을 좋아하기라도 한단 말이냐?”

“그럴 가능성도 있지요.”

묵용택이 턱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방금 연고蓮姑가 들어왔을 때도 미색에 홀린 듯 넋을 잃고 바라보지 않으셨습니까?”

묵용감이 그를 힘껏 밀치며 소리쳤다.

“한 번만 더 헛소리를 지껄이면 발이 날아갈 테니 조심하거라!”

묵용택은 잠시 비틀거리다 겨우 중심을 잡았다. 그 또한 형이 적잖은 충격을 받았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차라리 하지 않는 편이 나았을 것을, 괜스레 일을 꾸며 백천범의 마음만 알게 된 꼴이었다. 무엇보다 묵용감에게 큰 상처를 남겼으니 정말 큰일이었다.

묵용감은 백천범과 멀찍이 떨어져 앉아 침묵만 지켰다.

그는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었다. 묵용택의 바보 같은 제안을 수락하지 말아야 했다. 엄청나게 큰 바위로 제 발등을 찧은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그나마 이전에는 작은 기대라도 있었다면, 이젠 희망 한 점마저 사라진 듯했다.

백천범은 반대쪽 벽에 바짝 붙어 앉아 조심스레 그의 눈치만 살폈다. 그가 왜 갑자기 화를 내는지 알 수 없었다.

지금의 그는 처음 만났을 때의 모습과 똑같았다. 뼛속까지 냉기가 흐르는 것처럼 차갑고 누구보다 위엄 있어 보였다.

백천범은 자신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고 생각했다. 묵용감이 기녀와 입을 맞추고 있을 때, 그녀는 자신을 향한 그의 시선이 퍽 당혹스러웠다. 그의 눈빛에는 그녀가 이해하기에는 너무 복잡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 감정은 맹렬히 타오르는 불 같았고, 설원에 시리게 피어난 얼음꽃 같기도 했다. 그녀는 할 말을 찾아 입술을 달싹였지만, 알 수 없는 웅얼거림만이 입 속에서 겨우 맴돌았다.

사슴처럼 겁에 질린 그녀가 불그스름한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묵용감은 묵묵히 그녀를 응시했다. 시선이 천천히 그녀의 입술에 닿은 순간 어두운 눈망울에 한 줄기 빛이 번득였다. 그의 눈빛을 본 백천범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순간, 그가 그녀를 감싸 안고 뜨거운 입술을 마주 대었다. 그것도 아주 사나운 기세로, 사람을 잡아먹는 맹수처럼 매섭게 그녀의 입술을 깨물고 또 핥았다.

백천범은 발버둥을 치고 싶었지만 힘이 부족했다. 머릿속이 점점 하얗게 물들었다. 꼭 그가 그녀의 혼을 빨아들이기라도 한 듯. 가슴이 걷잡을 수 없이 뛰면서 그녀의 의식이 혼미해지기 시작했다. 눈앞이 서서히 어두워지다 짙은 연기가 그녀를 집어삼켰다…….

그녀는 이대로 질식하는 줄만 알았다. 그때, 그녀를 놓아준 묵용감이 나직하게 투덜거렸다.

“바보 아니오? 어찌 숨 하나 제대로 쉬질 못한단 말이오?”

그녀가 제대로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그가 또다시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 가볍게 그녀를 토닥이는 커다란 손이 따스했다. 조금 전까지의 냉랭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녀가 늘 보았던 따뜻한 그의 모습, 그녀를 총애하는 묵용감만이 여기에 있었다.

기력이 빠진 백천범은 그의 품에 기대어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한참 후에야 몸을 일으켜 세운 그녀의 눈에 우산이 보였다. 언제 떨어트렸는지 알 길이 없었다.

백천범은 눈을 내리깐 채 바닥의 우산만 바라보았고, 묵용감은 다시 벽에 기대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둘 사이에 기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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