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7화
입술을 깨물린 백천범이 황급히 입을 가렸다.
“왕야, 개띠도 아니고 깨무는 걸 왜 이렇게 좋아하시는 거예요.”
묵용감이 코웃음을 쳤다.
“깨무는 건 아주 가벼운 편이지. 내 심기를 건드려 화나게 하면 그대를 잡아먹을 것이오.”
백천범이 겁을 먹은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와, 왕야, 왕야는 사람도 드세요?”
묵용감이 웃음을 참으며 그녀를 놀렸다.
“다른 사람은 먹지 않지만 그대는 먹을 수 있소.”
그 말에 백천범은 오히려 웃기 시작했다.
“절 놀리시는 거 다 알아요.”
잠시 후 그녀가 웃음을 멈추고 다시 입을 열었다.
“지난번 일은 제가 잘못했어요…….”
묵용감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잘못한 일이 너무 많지 않소. 무슨 일을 말하는 것이오?”
“그게…….”
백천범이 입술을 짓씹더니 말을 이었다.
“기홍 언니 일이요. 언니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왕야께 말씀드린 거였어요. 언니도 동의할 줄 알았거든요. 왕야와 함께 부귀영화를 누리면 좋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억지로 밀어붙이는 일은 성사시키기 힘든가 봐요. 언니도 원치 않으니까 왕야께서도 못 들은 걸로 해 주세요.”
묵용감은 또다시 화가 나면서도 우스워졌다. 그가 원치 않을 땐 가만히 있다가 기홍이 반대하니 못 들은 걸로 해 달라니. 정말 이 아이는… 그의 총애를 휘두르는 무법자가 따로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엉덩이를 때려 주고 싶었지만 또 멍이 들까 봐 차마 그럴 수도 없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모습에 백천범은 두려움이 엄습했다.
“왕야, 왜 그리 빤히 보시는 거예요?”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녀에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백천범은 피하려 했지만 그의 커다란 손에 뒤통수를 꼭 붙들려 있었다. 어느새 그가 코앞까지 다가왔다. 또다시 자신을 깨물 줄 알았던 그녀는 저항을 포기하고 물릴 준비를 했다. 어차피 한 번 물리는 것뿐이라면, 참을 만했다.
하지만 그는 예상을 벗어나, 가볍게 그녀의 입술을 빨았다. 순간, 그녀의 머리가 굉음을 내며 폭발하는 것 같았다. 그가 깨물었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충격이 밀려왔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녀는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그를 밀쳐 내고 달려 나갔다.
뒤에서 묵용감의 느긋한 목소리가 들렸다.
“앞으로 잘못을 저지르거든 이렇게 벌할 것이오.”
그의 말에 허겁지겁 도망치는 자그마한 모습이 보였다. 묵용감은 자신의 입술을 어루만지며 소리 없이 웃었다.
백천범은 그 길로 곧장 기홍에게 달려갔다. 그녀는 초왕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으니 걱정할 것 없다고 말해 주었다.
기홍이 멋쩍게 웃었다.
“소인이 괜스레 떼를 썼습니다. 마음에 두지 마시어요, 왕비 마마.”
백천범은 부뚜막에 앉아 솥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에 코를 가까이 가져갔다.
“그런 말 마세요. 함부로 연을 이어 주려 하다니, 제 생각이 짧았어요. 언니, 왕야가 싫다면 누굴 좋아하는 거예요? 저택 안에 있다면 말해 줘요. 제가 왕야께 맺어 달라고 말씀드릴게요.”
기홍은 이제 울 수도 웃을 수도 없었다.
“왕비 마마, 소인이 이렇게 부탁드릴게요. 이 일은 여기서 끝내 주세요.”
백천범이 그녀의 팔을 끌어안았다.
“그렇지만 전 언니가 저택을 떠나는 게 싫단 말이에요.”
“그리 조급하실 것 없습니다. 학평관 어르신께서 새해가 지난 뒤에 소인을 대신할 노비를 구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소인은 후임자가 정해지면 저택을 떠날 것입니다.”
그제야 백천범은 조금 마음을 놓았다.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천천히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면 된다.
식사 시간이 되자 마음의 안정을 되찾은 기홍은 평소처럼 무수리들과 곁채에 상을 차렸다. 식탁 앞에 앉아 기다리고 있던 백천범은 한참을 기다려도 묵용감이 오지 않자 슬며시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녹하가 그녀를 훑으며 말했다.
“왕비 마마,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아직 왕야께서 오지 않으셨습니다.”
백천범이 우물거리며 말했다.
“앞으로 규율을 정할 때 먼저 온 사람이 먼저 먹고, 나중에 온 사람은 나중에 먹는 걸로 해요. 밥 먹는 것보다 중요한 게 어디 있겠어요?”
기홍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 어린 왕비에게 밥은 무엇보다 중요한 대사大事였다. 하지만 초왕에게는 모든 일이 밥보다 중요했다.
조금 더 기다리자 학평관이 묵용감을 모시고 왔다. 멀리서 느긋하게 걸어오는 그의 모습에 백천범이 손짓을 하며 말했다.
“왕야, 얼른 오세요.”
묵용감은 조급하게 자신을 부르는 그녀의 모습을 보자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리도 내가 보고 싶었던 것이오?”
“아뇨. 배고프단 말이에요.”
묵용감은 군사 공문을 읽느라 학평관의 재촉에도 식사 시간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백천범이 왜 이리도 조급하게 구나 했더니 역시나 배가 고팠기 때문이었다.
그가 자리에 앉았다.
“앞으로 배가 고프면 먼저 먹어도 좋소. 한창 클 때 잘 먹지 못하면 안 되오.”
신이 난 백천범이 녹하를 돌아보았다.
“언니, 들었죠? 앞으로 먼저 먹어도 된대요. 왕야께서 저를 얼마나 살뜰히 돌봐 주시는데요.”
녹하가 속으로 혀를 찼다. 왕비는 깊게 고민하는 법이 없다. 초왕이 이런 왕비를 만난 게 행운인지 불행인지 알 수 없었다.
백천범이 있으면 식사 시간이 조용할 날이 없었다. 처음에는 음식마다 맛을 평가하더니 이내 새끼 토끼에 대해 떠들다가 학평관의 새 옷에 대해서도 한바탕 늘어놓았다. 그녀의 말을 듣고만 있던 묵용감이 이따금 잔소리를 했다.
“어서 드시오. 말은 좀 적게 하고. 사레가 들릴 수도 있소.”
백천범은 그를 향해 환하게 웃었다. 일렁이는 물결처럼 커다란 두 눈이 반짝이는 게 무척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녀가 이런 표정을 지을 때마다 묵용감은 설명할 수 없이 기분이 좋았다. 한참 후에 그는 그 감정의 이름을 깨달았다. 행복이다. 그는 지금 행복을 느끼고 있었다.
백천범이 겨우 조용해지자 묵용감이 태연한 척 물었다.
“진왕이 저녁 식사에 초대했소. 왕비도 함께 가지 않겠소?”
백천범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진왕야께서 저도 초대하셨어요?”
“왕비는 내 식솔이니 날 초대하면 왕비도 초대한 거나 마찬가지지. 어떻소, 이 서방과 함께 가겠소?”
엄격하기만 하던 초왕이 스스로를 서방이라고 부르자 두 시녀와 학평관은 새어 나오는 웃음을 겨우 억눌렀다. 하지만 백천범은 무엄하리만큼 큰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하하, 이 서방이요? 좋아요. 이 부인과 함께 가요!”
그가 나름의 노력을 할 때마다 그녀는 늘 놀리곤 했다. 묵용감이 그녀를 흘겨보았다.
“그대가 늘 저택을 갑갑해하는 것 같아 바깥 구경 좀 시켜 주려는 것이오. 하지만 공공연하게 외간 남자를 만날 수는 없으니 하인으로 꾸미는 게 좋겠소.”
그야말로 백천범이 바라던 바였다. 초왕비라는 신분으로 갈 땐 뒤꽂이를 잔뜩 꽂고 비단 옷을 입어야 하니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동작을 크게 했다간 장신구가 떨어지거나 예쁜 옷이 찢어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하인 분장이라면 훨씬 편하게 행동할 수 있다.
그녀는 오후 내내 저택을 돌아다니며 그녀와 체격이 비슷한 하인을 찾아다녔다. 옷을 빌릴 요량이었지만 학평관이 진즉 준비를 다 해 놓았기 때문에 그녀가 힘을 들일 필요는 없었다.
저녁 무렵 기홍과 녹하가 그녀의 환복을 도왔다. 청색 웃옷과 바지를 입고 각반을 찬 뒤, 머리에 청색 두건까지 쓰니 파릇파릇 어린 하인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뭔가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겨드랑이에 우산을 끼고 소매에 장갑을 넣은 뒤 거울 앞에 서서 이리저리 자신을 비춰 보았다.
그녀가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기홍과 녹하에게 물었다.
“비슷해요? 진짜 하인 같아요?”
기홍이 웃으며 말했다.
“예. 아주 멋있는 도련님 같습니다.”
백천범이 고개를 숙여 자신의 몸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 도령 같아요? 그럼 너무 귀티 나 보이는 거 아니에요? 이렇게 입었는데도 하인 같지 않다니.”
녹하가 담담하게 받아쳤다.
“멋있는 도련님이라니요. 누가 봐도 덜렁거리는 하인 같습니다. 우산이 아니라 어깨에 수건을 걸쳤으면 일꾼이 따로 없을 지경입니다. 우리 마마께서는 꾸미는 대로 다 똑 닮으셨습니다.”
그때 학평관이 문 앞에서 물었다.
“왕비 마마, 준비는 다 끝나셨는지요. 왕야께서 출발하자고 하십니다.”
백천범은 곧장 분장에 몰입했다. 그녀가 우산을 들고 학평관 앞에서 굽실거리며 웃었다.
“기다리시게 해서 송구합니다, 총관리인 어르신. 소인, 준비를 모두 마쳤습니다.”
깜짝 놀란 학평관은 왕비의 인사를 받지 않기 위해 황급히 몸을 틀었다. 그가 난감한 표정으로 웃었다.
“왕비 마마, 이만 가시지요. 왕야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날씨가 추웠기 때문에 묵용감은 그녀의 몸이 상할까 봐 가마를 준비했다. 가마 옆에 서 있던 그는 백천범의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다가 우산을 알아차리고 의아해했다.
“비도 안 오는데 어찌 우산을 들고 있는 것이오?”
백천범이 당당하게 말했다.
“저는 하인이잖아요. 하인들은 늘 우산을 끼고 다니던데요.”
“되었소. 계속 들고 있으면 힘들 테니 가져가지 마시오.”
“안 돼요. 우산을 들어야 하인 같단 말이에요.”
그녀가 한번 고집을 피우면 머리가 다 아플 지경이기에 묵용감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가져가고 싶으면 그리 하시오. 일단 가마에 타시오.”
가마에 탄 묵용감은 곧바로 후회가 밀려왔다. 그녀와 바짝 붙어 앉으려고 일부러 작은 가마를 준비했건만. 그놈의 우산이 두 사람의 사이에 떡 하니 놓여 있었다. 게다가 우산 손잡이가 팔을 계속 찔러 대는 통에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시작부터 그리 순탄치 않으니 왠지 모르게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묵용택이 이 방법을 말했을 때, 묵용감은 도리에 어긋난다는 생각에 수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묵용택은 백천범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며 그를 끈질기게 설득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질투심이 생기기 마련이라 백천범이 화를 낸다면 절반은 성공한 셈이라며 묵용택은 자신만만했다. 화를 내지 않아도 이번 일로 아내로서의 본분을 일깨울 수 있다는 것이다.
지아비가 다른 여인과 시시덕거리며 다정하게 구는데, 어느 부인이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
묵용감은 거듭 고민한 끝에 황당무계한 일인 줄 알면서도 승낙하고 말았다. 이 일로 백천범의 눈을 트이게 할 수 있다면, 그동안의 고통에서 구원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온 마음을 다해 그녀를 사랑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그를 오빠로 여겼다. 남들이 그의 외사랑을 알면 분명 크게 비웃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