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6화
처음으로 다른 이들의 대화를 엿듣게 된 묵용감은 복잡한 감정이 밀려왔다. 그가 발걸음을 돌리려는 순간, 사장풍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 이 아들은 기필코 다시 일어설 겁니다. 구문제독이 뭐 그리 대수라고요. 나중에 장군이 되는 모습을 반드시 보여 드리겠습니다!”
묵용감은 흠칫 놀랐다. 그리 긴 시간 동안 사람 구실을 하지 못하더니 드디어 정신을 차린 모양이다. 사장풍의 아버지는 여전히 아들에게 욕을 퍼부었다. 묵용감은 더 엿듣지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막 정원 입구에 도착했을 때, 그를 향해 걸어오는 영구와 진왕의 모습이 보였다.
아까와 달리 진왕은 얼굴에 웃음꽃이 만발해 있었다.
“셋째 형님, 술을 마시려고 절 찾으셨다면서요?”
묵용감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네가 먹고 마시며 즐기는 것 말고 또 무얼 할 수 있단 말이냐?”
“고쟁 연주와 바둑, 서예, 그림, 시사詩詞 운문까지 다 할 줄 알지요. 형님의 취향만 말씀해 주시면 이 아우가 뭐든 보여 드리겠습니다.”
묵용감이 고개를 내저었다.
“폐하께서 무슨 일로 널 찾으신 것이냐?”
“말도 마십시오.”
너스레를 떨던 진왕이 죽상을 지었다.
“제가 제일 상대하기 쉬우셨는지 보낼 곳 없는 여인들을 다 제게 욱여넣으실 작정인가 봅니다.”
묵용감이 피식 웃었다.
“미인을 주시겠다는데도 기쁘지 않은 것이냐? 폐하께서도 분명 네가 이런 일에 관심이 많다는 걸 아시고 상으로 내리신 거겠지.”
“정말 그랬다면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다 명분이 있는걸요.”
진왕이 한숨을 내쉬었다.
“유시랑 댁 아가씨를 첩으로 들이라고 하십니다. 이미 제 후원은 여인들로 가득 차 혼잡스럽기 짝이 없는데 말입니다. 다들 보통이 아닙니다. 오죽하면 제가 집에 돌아지 않겠습니까?”
묵용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난번 황제가 언성을 높인 일만 아니었다면, 이번 혼사의 주인공은 그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황제는 어진 군주였지만 수단이 그리 훌륭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군주로서 황제는 다소 여린 편이었다. 늘 대신들의 기분을 맞춰 주려 했고, 견제를 할 땐 연혼 외에 다른 방법은 찾지 못하는 듯했다. 악역은 늘 그들이 해야 했고 어진 군주는 황제여야 했다.
묵용감은 악인이 되는 건 개의치 않았지만, 황제가 계속 이런 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군자의 근본은 자신에게 있는 법이었다. 만약 제대로 처신하지 못했다간 조정에 큰 혼란이 빚어질 수도 있었다.
그는 황제를 직접 설득하기도 했다. 황제는 자신의 권위를 세우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리 쉽게 되는 일은 아니었기 때문에 결국 지금 같은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차라리 황후 쪽이 결정을 내릴 때도 과감했고 시야도 넓었다. 그런 황후의 말을 황제가 곧잘 따랐기에 지금껏 큰 탈 없이 지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셋째 형님, 그만 갑시다. 오늘은 취옹루醉翁樓에서 마시는 게 좋겠습니다.”
진왕이 묵용감을 끌어당겼다.
하지만 묵용감은 그의 손을 뿌리쳤다.
“술은 되었다. 짬이 생기거든 그때 생각해 보지. 오늘은 물을 것이 있어 널 부른 것이다.”
그가 영구에게 눈짓을 보내자 영구는 곧장 멀찍이 물러났다.
진왕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아니, 무슨 비밀스러운 일이길래 영구마저 들으면 안 된단 말입니까?”
묵용감은 잠시 머뭇거렸다. 막상 물으려 하니 괜히 부끄러웠다. 하지만 진왕은 이쪽 방면으로는 전문가였으니, 그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설사 진왕이 비웃어도 친형제이니 괜찮았다.
묵용감이 코끝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그… 너는 어찌 여인의 환심을 사느냐?”
그의 말에 진왕은 헤벌쭉 웃으며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셋째 형님, 이쪽 일이 궁금하셨던 거군요. 사람을 아주 잘 찾으셨습니다. 어떤 여인이든 제 손에 들어오면 빠져나가지 못하지요.”
묵용감이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소리냐. 난 그저 어찌해야 여인의 마음을 살 수 있는지 물었거늘?”
진왕이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형님께서 누구를 마음에 두고 계신 것입니까?”
“누구긴 누구겠느냐. 그 귀여운 아이지.”
그가 괴로움이 담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진왕은 괴상한 것을 봤다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한참이 지나자 박장대소를 하기 시작했다.
“아이고 형님, 형님께서 이리 다정한 분일 줄 몰랐습니다!”
* * *
백천범은 기홍이 이렇게나 화를 낼 줄은 몰랐다. 새삼 후회가 밀려왔다. 그녀는 다른 이들을 신경 쓰지 않는 성격인지라 기홍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못했다. 청렴결백한 여인들은 이런 일에 크게 화를 내는 듯했다.
백천범은 조심스레 기홍의 눈치를 살폈다. 백천범은 차와 다과를 기홍의 앞에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기홍을 더욱 불편하게 할 뿐이었다. 왕비의 시중을 받고 싶어 하는 노비가 세상천지 어디에 있을까.
기홍은 사실 화가 이미 다 풀린 상태였지만 아직 마음이 불편했다. 초왕이 돌아왔을 때 그를 볼 낯이 없었다.
그때 녹하가 발을 걷어 올리고 들어와 말했다.
“아이고, 우리 기홍 언니께서 아직도 화가 안 풀렸나 봅니다. 그만하고 어서 향 좀 피워 줘. 왕야께서 곧 돌아오실 테니까.”
기홍은 자리에 앉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내가 무슨 낯으로 왕야를 뵙겠어. 네가 대신 좀 해 줘.”
“그게 무슨 말이야. 왕야를 뵐 낯이 없다니.”
녹하가 그녀를 놀리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설마 찔리는 거라도 있는 거야?”
“이 나쁜 계집애!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기홍이 탁자에 있던 수틀을 던졌지만 녹하는 히죽히죽 웃을 뿐이었다.
“거봐, 부끄러우니까 괜히 화를 내는 거잖아.”
“너.”
기홍이 화를 내며 다가와 녹하를 찰싹 때렸다.
“한 번만 더 그런 식으로 말하면 입을 때려 줄 거야.”
두 시녀가 소란을 피우자 백천범이 얼른 말했다.
“기홍 언니, 쉬고 있어요. 제가 향을 피울게요.”
기홍이 결국 손을 내려놓았다.
“그건 안 됩니다. 소인의 일을 어찌 왕비 마마께서 하실 수 있겠습니까. 왕야께서 아셨다간, 주인은 안중에도 없는 방자한 시녀라고 여길 것입니다.”
“왕야께서는 그러실 리 없어요. 제 말대로 해요, 언니.”
백천범은 기홍이 말하기 전에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언니, 제가 사죄의 뜻으로 하는 거니깐 한 번만 봐주세요. 왕야께 온전히 제 생각이었다고, 언니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말씀드릴게요.”
그녀의 말에 기홍은 머리가 터져 버릴 것 같았다. 지난 일을 언급하면 똑똑한 초왕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차리고도 남을 터였다. 기홍이 서둘러 백천범을 쫓으려 하자 녹하가 기홍을 막아섰다.
“내버려 둬. 왕비 마마께서 말씀드리면 왕야께서도 이해하실 거야.”
부끄러움이 많았던 기홍도 당장은 묵용감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난 부엌에 가 있을 테니까 왕야는 네가 잘 챙겨드려.”
“말 안 해도 그렇게 할 거네요.”
녹하가 그녀를 흘겨보며 말했다.
“이렇게 성격이 물러서는, 누가 서방이 될진 모르겠지만 꽤나 애 먹겠다. 그냥 왕야 곁에 있는 게 더 낫겠어.”
기홍이 또다시 손을 올리자 녹하는 쏜살같이 방을 빠져나왔다.
방에 불을 땐 덕에 훈훈한 공기가 가득했다. 백천범은 손에 들고 있던 얇은 향 쟁반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연꽃이 새겨진 구리 향로에서 가느다란 흰색 연기가 쉴 새 없이 피어올랐다. 끊임없이 피어오르는 향이 평소보다 조금 짙었다.
깊게 숨을 들이마시는데 문발을 걷어 올리는 소리가 들렸다. 묵용감이었다. 그는 안으로 몇 걸음 걸어오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백천범의 얼굴이 조금 붉어져 있었다. 밖에서 찬 바람을 맞은 탓일까? 생각하던 그가 한참 뒤에 입을 열었다.
“경경卿卿(남편이 처를 친근하게 부를 때 쓰는 칭호).”
백천범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경경이 누구란 말인가? 방 안에 다른 이라도 있나? 그녀가 괜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왕야, 누구를 부르시는 거예요?”
그녀가 어리둥절하게 물었다.
묵용감이 천천히 다가왔다. 깊은 그의 눈망울이 그윽하게 반짝였다. 그가 한 번 더 그녀를 불렀다.
“경경.”
백천범은 그의 진지한 모습에 웃음을 참지 못했다.
“왕야, 제 이름이 헷갈리시는 거예요? 전 천범이에요. 경경이 아니라고요.”
어렵사리 진왕에게 배워 온 수단이 낭만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도 낭만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전투를 치르는 것보다 달빛 아래에서 사랑을 속삭이는 상황이 더 낯설고 어려웠다.
낯간지러운 말을 두 차례나 내뱉으니 그조차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몸을 돌려 가까운 의자에 앉은 그가 굳은 얼굴로 물었다.
“어째서 왕비가 향을 피우는 것이오? 시녀들은?”
백천범은 그가 기홍과 녹하를 혼낼까 봐 서둘러 대답했다.
“그냥 제가 피운 거예요. 늘 왕야의 심기를 건드리기만 하니까 오늘은 왕야를 기쁘게 해 드리고 싶어서요.”
묵용감이 속으로 생각했다.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게 이보다는 기쁠 텐데.’
그의 안색이 조금 풀리자 백천범은 용기를 내어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왕야, 방금 누굴 부르신 거예요?”
묵용감이 자연스레 그녀를 자신의 다리 위에 앉혔다.
“그대를 부른 것이오.”
“저는 경경이 아닌…….”
그때, 백천범은 아버지가 여섯째 부인을 경경이라고 부르던 모습을 떠올렸다.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는 그녀를 다정하게 부른 것뿐이었다.
조금 부끄러워진 그녀가 어색하게 웃기 시작했다.
“아이참, 그런 말은 언제 배우셨어요, 왕야.”
묵용감은 조금 언짢았다. 왕비를 위해 직접 배워 온 것인데……. 그가 그녀의 볼을 꼬집었다.
“부부 사이의 애칭인데 못 부를 게 뭐가 있소. 대답을 하면 그만이지.”
“너무 어색하잖아요.”
백천범이 해맑게 웃었다.
“왕야께서 그렇게 부르시면 아버지가 여섯째 이모를 부르던 게 생각나요. 그리고 무슨 귀염둥이, 우리 아기라고도 부르셨어요. 조금 우습죠?”
묵용감도 애칭이 낯간지럽긴 마찬가지였다. 잠시 고민하던 그가 입을 열었다.
“왕비는 어찌 늘 왕야라고만 부르는 것이오. 너무 멀게 느껴지질 않소. 나리라고 부르란 것도 내켜 하지 않았으니 차라리 이름을 부르는 게 좋겠소. 어떻소?”
백천범이 크고 까만 눈을 깜빡였다.
“왕야는 이름이 뭔데요?”
묵용감이 벌컥 화를 냈다.
“시집온 지 이렇게나 오래되었는데 내 이름도 모른단 말이오? 지난번에 붓글씨로 알려 주지 않았소?”
백천범이 목을 움츠리며 답했다.
“까, 까먹었어요.”
솔직히 털어놓는 모습에 웃음이 난 그는 그녀의 턱을 들어 올리고 벌을 주듯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행동하려 했지만 내심 그녀가 싫어할까 봐 초조해하고 있었다.
어제 일 이후로 그는 조금씩 그녀에게 스며들기로 했다. 이런 모습에 그녀가 적응하다 보면 자신이 그의 아내라는 사실을 잊지 않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