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5화
추문이 조심히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마마, 노여움을 푸십시오. 왕야께서 아무리 왕비 마마께 잘해 주셔도, 아직 이 저택에 마마를 남기시지 않으셨습니까. 왕야께서도 알게 되실 겁니다. 마마께서 왕비 마마보다 훌륭하시다는 것을…….”
수원상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이미 그녀를 내쫓으려고 했다. 안주인이 될 수 있는 혼사를 찾아 주겠다고 포장하긴 했지만, 그는 다른 이도 아니고 사장풍과 그녀를 맺어주려 했다.
그자는 겨우 구문제독에 불과하지 아닌가! 그녀와 격이 맞지 않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고, 무엇보다 묵용감을 향한 자신의 마음을 도무지 접을 수가 없었다. 초왕이 아니라면 그녀의 지아비가 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단 말인가?
“그만하거라.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든 굳이 알릴 필요 없다. 며칠이라도 조용히 지내고 싶구나.”
“마마.”
추문은 그녀의 잔머리를 곱게 빗어 넘기고 머리 위에 장신구를 꽂았다. 추문 역시 처량한 기분이 들긴 마찬가지였다.
“마마께서 이리도 젊으신데 평생 이대로 지내셔야 한답니까? 다시 대감마님을 찾아가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소용없었다. 이미 그녀는 추문의 성화에 못 이겨 친정에 묵용감의 말을 전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소식을 듣고 가슴 아파했지만, 어머니 역시 어쩔 도리가 없었다. 딸아이의 부군은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초왕이었다. 위로의 말을 건넨다 해도 에둘러 말할 뿐, 대놓고 초왕을 욕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반면 그녀의 아버지는 백 승상의 서녀에게 밀린 딸을 원망했다. 그래도 얼마 후 황제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다. 소문에는 아버지의 말에 황제가 초왕을 호되게 꾸짖고 무릎까지 꿇렸다고 하는데,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녀의 처지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희망이라고는 없는 이곳에서 암흑 같은 날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추문이 물었다.
“마마, 이렇게 시간을 허비하느니, 왕야께 은혜를 내려달라 청을 드려 저택을 떠나시는 건 어떠신지요, 어떻게든…….”
추문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수원상이 호통쳤다.
“헛소리는 집어치우라 하지 않았느냐. 이곳으로 시집을 왔으니 난 죽든 살든 초왕의 사람이다. 저택을 나갈 일은 절대 없단 말이다. 내가 더 비참해져야 속이 시원하겠느냐? 차라리 칼로 날 찌르거라. 그리하면 네 속이 시원하겠구나!”
깜짝 놀란 추문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자신의 뺨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소인이 눈치가 없어 입을 잘못 놀렸습니다. 소인은 맞아도 쌉니다…….”
수원상은 차가운 눈빛으로 추문을 바라보았다. 찰싹거리는 소리가 연거푸 들린 후에야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만하거라. 넌 내 측근이다. 친정에서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니 내 마음을 잘 알 텐데, 어찌 함부로 말하는 것이냐. 오늘 널 벌하긴 했지만 원망하진 말고 잘 기억하거라. 앞으로 그 말은 입에 올려선 안 될 것이다.”
얼굴이 퉁퉁 부어오른 추문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아침밥을 먹기 위해 수원상을 부축해 곁채로 향했다.
하인들은 묵용감이 그녀와 사장풍을 맺어 주려 했던 일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날 그가 낙성각을 찾아왔을 때도 수원상은 시녀들을 멀리 내보냈다. 하인들이 알게 되었다간 그녀의 체면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칠 게 뻔했다.
* * *
수원상이 크게 상심해 있을 때, 백천범의 기분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백천범은 새끼 토끼가 태어났다는 기쁜 소식을 기홍과 녹하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회림각에 도착한 그녀는 기홍이 보이지 않자 우선 녹하에게 새끼 토끼의 모습을 설명했다.
“요 정도 크기에 온몸이 매끈거리는 게 완자 같아서 못 만지겠더라고요. 총관리인 어르신이 그러는데 며칠 지나면 털이 자랄 거래요. 하인들한테 잘 지켜보라고 했어요. 설구가 새끼를 깔아뭉개면 큰일이니까요. 새끼를 잡아먹는 어미 토끼도 있대요. 설구는 안 그렇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요.”
녹하가 백천범을 놀리듯이 말했다.
“축하드립니다, 왕비 마마. 또 새로운 아기씨가 생기셨네요. 그것도 무려 여섯이나 말입니다. 앞으로 대대손손 복을 누리시겠습니다.”
백천범은 헤벌쭉 웃으며 그녀의 놀림에 개의치 않아 했다.
“토끼들이 조금 더 크면 언니에게도 한 마리 줄까요? 유리 구슬처럼 반짝거리는 눈이 얼마나 예쁜데요.”
“좋습니다. 저와 기홍에게 한 마리씩 주십시오. 기홍이 저택을 떠나면 토끼를 보면서 이곳을 떠올릴 수 있을 테니까요.”
녹하의 말에 백천범은 금세 시무룩해져서 한숨을 내쉬었다.
“저 기홍 언니가 안 떠났으면 좋겠어요. 왕야께도 말씀드렸는데 안 된다고 하실 줄 누가 알았겠어요. 그렇게 성실하고 좋은 언니가 또 어디 있다고. 대체 왕야는 왜 싫다고 하시는 걸까요? 몸매도 늘씬하고 얼굴도 예쁘고, 저보다는 훨씬 좋을 텐데…….”
그녀의 말에 의아해하던 녹하가 뒤늦게 그 의미를 파악하고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마마, 왕야께 무슨 말씀을 드렸단 것입니까? 설마 기홍을 후원에 들이라고 말씀하신 겁니까?”
“별로예요?”
백천범이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그렇게 하면 기홍 언니는 저택을 안 나가도 되잖아요. 함께 지낼 수 있고 얼마나 좋아요!”
녹하가 입을 떼려는데 별안간 기홍이 찬바람을 내뿜으며 다가왔다. 평소에는 늘 웃던 그녀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녀가 백천범 앞에 무릎을 꿇었다.
“소인, 이곳에서 지낼 면목이 없습니다. 왕비 마마, 부디 오늘로 소인을 저택에서 내쳐주시옵소서!”
깜짝 놀란 백천범이 서둘러 기홍을 일으켰다.
“언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예요?”
기홍은 고개만 숙이고 일어나려 하지 않았다. 마음이 너무나 괴로웠다. 어린 왕비가 기어코 초왕에게 얼토당토않은 이야기까지 꺼내고 말았다. 모르는 이들은 그녀가 왕비를 꼬드겼다고 여길지도 모른다. 다른 이들과 초왕이 그녀를 어찌 생각하겠는가?
그녀는 삼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주제넘은 생각을 하지 않았다. 초왕의 측근에서 수발을 드는 시녀였지만 떳떳하지 않은 행동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어린 왕비의 언행이 그녀에게 죽어도 씻어내기 힘든 오명을 안겨 주었다.
“언니, 어서 일어나요. 언니가 이러면 저는, 저는…….”
조급했던 백천범은 녹하를 바라보며 도움을 요청했다.
녹하가 하는 수 없이 기홍을 일으켰다.
“어서 일어나. 이러다 마마께서 울음을 터뜨리시겠어.”
녹하가 백천범에게 서둘러 눈짓을 보냈다.
백천범은 곧장 눈물을 떨구었다.
“언니, 저 때문에 화난 거예요? 제가 잘못했어요!”
백천범은 아예 고개를 숙여 기홍에게 절했다.
녹하의 눈에는 그저 우스울 뿐이었다. 하지만 웃음소리를 낼 수는 없었기에 얼굴이 파랗게 질릴 때까지 웃음을 참으며 상황을 지켜보았다.
기홍도 감히 왕비의 절을 받을 수는 없었다. 흐느끼는 소리에 기홍은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개를 들어 보니 백천범의 눈가에 눈물이 반짝이고 있었다. 왕비의 눈물을 바라본 순간, 그녀를 향한 원망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왕비가 좋은 마음에서 한 행동이라는 걸 기홍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너무 경솔했다. 귀띔이라도 주었다면 왕비가 그런 허튼소리를 하기 전에 어떻게든 막았을 텐데.
* * *
조정에 도착한 묵용감은 대열에 섞여 있는 진왕을 발견하고 꽤나 놀랐다. 최근 눈에 띄질 않아 또 기녀에게 푹 빠졌으리라 여기던 참이었다.
조회를 마친 후, 그는 진왕과 함께 저택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황제가 먼저 진왕을 불러 세웠다. 순간 묵용감은 진왕의 눈빛에 담긴 쓸쓸한 기색을 발견했다.
황제를 바라보니 냉랭한 기운만이 흘러넘쳤다. 황제는 이쪽을 쳐다보려 하지도 않았다. 수원상과의 일로 아직 화가 풀리지 않은 듯했다.
진왕에게 묻고 싶은 말이 있었기에 묵용감은 잠시 기다리기로 했다. 서쪽 문을 통해 밖으로 나오니 영구만 덩그러니 서 있었다.
“가동은?”
“왕야께 아룁니다. 소인에게 대신 휴가를 청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고향에서 사람이 찾아왔는데 물건이 많아 받으러 가야 한다고 합니다.”
초왕은 부하들을 엄격하게 관리했지만 이런 일에는 관대한 편이었다. 분명 부모님이 이 먼 곳까지 물건을 보냈을 테니 응당 받으러 가야 했다.
그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순포 오영관청을 바라보며 물었다.
“사장풍의 거처로 간 것이더냐?”
감출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영구는 곧장 그렇다고 대답했다. 묵용감이 고개를 끄덕였다.
“관청에서 바람 좀 피해야겠으니 넌 이곳에서 진왕을 기다리거라. 진왕이 보이면 본왕을 찾아오라고 꼭 전하거라.”
“예, 왕야.”
묵용감은 말에 올라타고 천천히 관청으로 향했다. 사장풍은 구문제독의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여전히 관청 뒤뜰에서 머물렀다. 다만 신분이 바뀌었으니 독방에서 여러 명이 묵는 아래채로 방을 옮겨야 했다.
입구에 다다라 말에서 내린 묵용감은 고삐를 졸병에게 넘기고 뒷짐을 진 채 뒤뜰로 향했다.
뒤뜰에 그가 들어서자마자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자세히 들어 보니 누군가 우는 소리 같았다. 차마 크게 울지 못하고 억누르는 울음소리였다. 사내들밖에 없는 이곳에서 어찌 울음소리가 난단 말인가?
그는 조심스레 문 앞으로 다가갔다. 문은 열려 있었지만 발이 내려져 있어 안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 누군가 흐느끼며 목소리를 내었다. 서럽다는 듯 소리가 뚝뚝 끊겼다.
“내가 창피해 죽겠다……. 돌아가면 마을 사람들이 쑥덕대겠지……. 다른 사람들이 뭐라 해도 난 안 믿었다. 네 아우가 이 일로 동네에서 주먹다짐까지 했다기에 함부로 지껄이는 놈들 입 다물게 해 주려고 찾아온 것인데… 내가 이리 될 줄은 몰랐구나. 이 아비가 화병으로 죽길 바라는 게 아니면 무엇이란 말이냐…….”
곧이어 그자를 타이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동이었다.
“아저씨, 화 푸십시오. 장풍이 잘못만은 아닙니다. 사실 이 일은…….”
“입 닥쳐.”
냉랭하고 매서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버지, 제가 잘못한 거예요. 그래서 상부에서도 절 해임한 거고요. 말하기 곤란한 게 뭐가 있어요. 사람들한테도 솔직히 말씀하세요. 다른 이들이 함부로 말하든지 말든지, 왜 눈치를 봐요. 아버지가 잘못을 한 것도 아니잖아요.”
“이런 뻔뻔한 놈 같으니라고!”
사장풍의 아버지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민 듯 목소리를 높였다.
“사람이 낯짝 하나 보고 사는 거지! 너는 체면 따위 필요 없어도 우리는 필요하다. 너 때문에 우리가 마을에서 고개를 들 수가 없다. 내가 가는 걸 알고 이장이 특별히 곡주까지 싸 줬다, 고향의 곡주니까 너한테 주라면서. 네가 무슨 낯짝으로 이 곡주를 마셔!”
뒤이어 쨍그랑하는 소리가 울렸다. 사장풍의 아버지가 술 단지를 깨부쉈는지 곡주 향이 은은히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