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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214)화 (213/1,192)

제214화

백천범이 그의 가슴을 팔로 힘껏 밀어냈다.

“왕야, 왜 이렇게 약속을 안 지키시는 거예요. 이러실 거면 이곳에서 주무시지 마세요.”

하지만 묵용감은 손에 힘을 풀지 않고 태연히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오. 내가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니?”

“그건 안 하시겠다고 했잖아요?”

“합례를 하지 않겠다는 거지, 다른 건 약속한 적 없소.”

그가 그녀의 얼굴에 마구 입을 맞추었다. 이 기회를 틈타 한껏 사심을 채우려는 듯 즐거워 보였다.

백천범은 그간 묵용감이 그녀를 안거나 손을 잡는 건 아무렇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가 이렇게까지 친밀하게 대한 적은 없었기에 크게 당황했다. 그녀는 얼굴부터 목까지 온통 붉은 빛으로 물들었고, 입술 또한 더더욱 붉게 도드라졌다.

마음이 들뜬 묵용감은 이렇게 된 김에 그녀에게 부부 사이의 애정을 알려 주고 싶었다. 그래야 두 사람이 부부라는 사실을 그녀가 더 잘 기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의 손이 가늘고 부드러운 그녀의 허리를 두 차례 쓰다듬었다. 그때, 그가 별안간 눈을 부릅뜨더니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백천범도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머뭇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죄송해요. 저는 그저, 본능적으로… 왕야, 노여움을…….”

잠시 뒤, 묵용감이 파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의 말은 꽉 깨문 잇새를 뚫고 나오는 듯했다.

“감히… 지아비를 모해하려 하다니!”

백천범은 정말 본능적으로 취한 행동이었다. 그녀의 유모는 그녀에게 사내들을 제압할 수 있는 공격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건 정말 유용한 동작이었다.

백천범이 열 살쯤 되었을 무렵, 한 관리인이 모친이 백 부인의 신임을 얻는 유모인 것만 믿고 백천범을 골목으로 몰아붙였다. 그때 백천범은 유모가 알려 준 대로 힘껏 그 부위를 걷어찼다. 관리인은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며 고통스럽게 울부짖었다. 외진 곳이라 그의 비명을 들은 사람은 없었다.

그녀는 관리인이 벽을 짚으며 도망칠 때까지 지켜본 후 아무렇지 않게 훌쩍 자리를 떴다. 그날 이후로 그 관리인은 그녀를 마주칠 때마다 피해가곤 했다.

그런 습관 때문에 묵용감의 손이 그녀의 허리에 닿자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올려 차고 말았다. 이불을 덮고 있어서 힘이 많이 실리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녀는 번뜩 정신이 들었다. 그는 자신의 지아비가 아닌가!

반면 묵용감은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대체 이게 어디를 봐서 부인이 할 수 있는 행동이란 말인가? 자신을 방탕한 불량배라고 여겨야 가능한 행동이 아닌가?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백천범을 제대로 구슬리지 못해서 시녀들의 비웃음을 사고 싶진 않았다. 그는 돌아누운 채 그녀를 무시했다.

백천범은 입술을 깨물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따뜻한 말이라도 건네고 싶었지만 그의 기분을 더 상하게 할까 봐 말이 나오지 않았다. 결국 그녀도 그에게서 돌아누웠다. 두 사람은 가운데를 비워 놓은 채 서로를 등졌다. 둘 사이의 공간이 얼마나 넓던지, 마치 초나라와 한나라의 경계선처럼 보일 정도였다.

백천범은 베개에 닿기만 해도 쉽게 잠드는 편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쉽사리 잠이 들지 못했다. 죄책감 때문인지 아니면 등 뒤에 누워있는 그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갈수록 정신이 맑아졌다. 그녀는 가만히 누워 묵용감의 고른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백천범의 걱정처럼 코를 골지도, 이를 갈지도 않았다. 다만 침을 흘리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평온하게 이어지는 그의 숨소리를 듣고 있으니 꼭 노래 장단 같았다. 끊임없이 들려오는 숨소리가 그녀의 마음을 평온케 했다. 결국 그녀는 묵용감의 숨소리를 자장가 삼아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

* * *

묵용감은 한밤중에 눈을 떴다. 정확히는 걷어차여 깼다. 그의 품에 웬 발 하나가 놓여 있었다. 벽에 거의 붙어있을 만큼 멀찍이 떨어진 그녀였지만 발만큼은 그의 품에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발을 쓰다듬었다. 작고 여린 발은 매끄럽고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동월국의 여인은 지아비 외에 다른 이에게 발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 그녀의 발이 그의 손에 있었다. 그는 그녀의 발을 움켜쥐었다. 손을 떼기 아쉬울 만큼 자그맣고 예쁜 발이었다.

별안간 미묘한 느낌이 들어 그는 그녀의 발을 살짝 들어 올렸다. 침대 맡 희미한 불빛에 비추니 역시나 전족을 하지 않은 발이었다. 하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환경에서 자랐는데 어떤 시녀가 발을 동여매 줬겠는가.

여인의 발이 작을수록 아름답다고 여긴 동월국은 전족을 한 발을 금련金蓮이라고도 불렀다. 풍류가들은 기녀들의 신발을 술잔으로 삼아 술을 돌려 마시기도 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역겨운 광경이었다.

신발을 벗은 기녀들의 발에는 말이 신겨져 있었는데, 그 속의 작은 발은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접혀 흉측한 모양이었다. 백천범의 발과는 판이하게 다른 형태였다. 전족을 한 발이 진정 아름답다면 말을 벗었을 때 발의 주인이 당당히 내놓을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괜스레 생각이 많아진 자신의 모습이 우스워 그는 작게 실소했다. 소중한 아내의 발을 어찌 다른 이에게 보여 줄 생각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감히 보려는 자가 있다면 그가 직접 눈알을 뽑을지도 모른다!

그저 그녀의 발이 품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잠들기 전에 치밀었던 화는 흔적도 없이 녹아 버렸다.

다시 잠든 그는 인시에 눈을 떴다. 아래를 바라보니 백천범이 그의 품속으로 파고들어 있었다. 품에 꼭 들러붙어 그의 허리에 손까지 올려놓은 그녀가 그의 목덜미에 자잘한 숨을 내뱉었다. 꼭 봄바람에 가볍게 흔들리는 버들가지 같았다.

묵용감은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예전에 부하들이 농담 삼아 어느 병사는 한번 기방에 들면 열흘을 넘게 나오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당시에는 그런 자들을 경멸했지만 지금은 그 또한 여인의 품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지 않는가. 이대로 종일 누워 있고 싶을 만큼, 그는 이 순간이 만족스러웠다.

늘 이렇게 그녀와 함께 누워 있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녀가 그의 품에 기댄 채 귀엽고 천진난만한 모습을 보일 때면 그는 더 바랄 게 없이 그저 행복했다.

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머리에 입을 맞췄다. 부드러운 머리칼에서 풍겨 오는 한란의 향기가 무척 향기로웠다. 백천범이 잠귀가 밝은 탓에 함부로 몸을 움직일 수 없었지만, 그녀의 얼굴을 보니 걷잡을 수 없이 가슴이 요동쳤다.

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그녀의 얼굴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동그란 이마와 부드러운 눈썹, 기다란 속눈썹까지……. 그의 입술이 나비의 날갯짓만큼이나 가볍게 그 위를 스쳐 지나갔다.

백천범은 무어라 중얼거리더니 그의 품에서 잠시 꿈틀거렸다. 단잠을 방해받아 투정을 부리는 모양이다. 묵용감은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지만 그녀의 귀가 눈에 들어온 순간, 한 치의 망설임도 자그마한 귓불을 입에 머금었다.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는 없다.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잠시나마 소소한 행복을 누리는 것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만족했다.

그때, 학평관이 창문 밖에서 기침을 했다. 그는 한참 전부터 묵용감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방 안에서 인기척이 없어 초조해하던 참이었다. 초왕은 매일 인시에 일어났다. 그때 일어나야 묘시에 가야 하는 조회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인시 삼각이 다 되었는데도 그는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무리 여인의 치마폭에 빠졌다 한들, 초왕은 큰일을 하는 사람인 만큼 사리 분별에 밝았다. 학평관의 기침 소리에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는 걸 깨달은 그는 조심스레 팔을 빼내고 몸을 일으켜 앉았다. 다시 그녀를 바라보니 역시 떠나기 아쉬웠다.

그는 고개를 숙여 다시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마침 백천범이 똑바로 누워 있어 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기에 제격이었다. 불그스름하면서 부드러운 감촉이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짜릿했다.

입맞춤은 여기에서 그치기로 했다. 더 참지 못하면 조정에 가기는커녕 침소 밖으로 나오기도 싫어질 듯했다.

침소 앞을 지키던 월규가 기척을 알아차리고 침대 장막을 걷어 올렸다. 월향이 묵용감의 옷 시중을 들었다. 두 시녀는 그를 보필한 적이 없었으니 조금 긴장한 상태였다. 그의 도포 매듭에 머리카락 몇 가닥이 함께 묶였고, 요대는 자꾸만 빠져 버렸다. 옷을 입혀주는 내내 두 시녀는 허둥거리고 있었다.

잠에서 깬 직후엔 늘 심기가 좋지 않은 묵용감이다. 평소 같았으면 진즉 발이 올라갔겠지만 오늘은 백천범을 생각해서 참기로 했다. 그는 더 이상 두 시녀에게 시중을 맡기지 않고 서둘러 밖으로 향했다.

월규와 월향이 그의 뒤를 따르자 그의 날 선 목소리가 들렸다.

“평소 왕비의 시중도 이리 쩔쩔매는 것이냐?”

겁에 질린 월규와 월향은 고개를 숙인 채 동시에 대답했다.

“소인들이 어찌 감히…….”

“시중을 제대로 들지 못했다가는 너희들 몸이 성치 못할 것이다. 너희의 시중은 더 이상 필요 없으니 가서 왕비 곁을 지키거라. 왕비가 깨지 않게 조심히 행동하고 떠들지 말아야 할 것이다.”

초왕이 왕비를 끔찍이 아낀다는 사실은 월향과 월규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초왕이 이렇게 세심하게 명을 내리는 모습은 조금 뜻밖이었다.

두 사람은 허리를 숙이고 묵용감에게 인사를 올렸다. 밖에서 학평관과 가동, 영구가 일찍부터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세 사람은 서둘러 회림각으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회림각에서 세안과 환복, 아침 식사까지 한 뒤에 입궁해야 했기 때문이다.

묵용감은 떠나기 전, 작은방에 들러 갓 태어난 새끼 토끼를 확인했다. 예전의 그였다면 이런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겠지만 백천범이 좋아하는 일에는 그도 자꾸만 마음이 갔다. 작고 여린 생명이 한데 모여 꼼지락거리는 광경에 그의 입가에 저절로 따스한 미소가 지어졌다.

* * *

추문은 수원상의 머리를 빗겨 주고 있었다. 거울을 통해 망설이는 추문의 모습을 알아차린 수원상이 물었다.

“무슨 일이냐, 말해 보거라.”

추문이 한참을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왕야께서 어젯밤 남월각에서 주무셨다고 합니다.”

새끼손가락을 만지작거리던 수원상이 멈칫했다. 손가락 끝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고개를 숙여 보니 손톱이 반 치나 부러져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그간 백천범은 회림각에서 살다시피 했다. 게다가 묵용감이 자신을 그토록 미워하는 걸 보면 두 사람은 진즉 살갗을 맞댄 게 틀림없었다. 처량한 기분이 들어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미 마음을 다 진정시킨 줄 알았건만, 추문의 말이 그녀의 마음에 돌덩이처럼 턱 걸렸다.

그녀가 이곳에 온 후로 묵용감은 한 번도 후원에서 잠을 청하지 않았다. 오늘이 그가 후원에서 잠을 청한 첫 번째 날이었을 것이다. 역시나 그는 그 첫 번째의 자격을 정비에게 주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 가슴 깊숙한 곳에서 솟아오르는 떫고 시린 기운을 억누르려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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