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3화
그들은 학평관을 필두로 줄줄이 남월각 문턱을 넘었다. 잔뜩 긴장한 백천범은 그날 있었던 일은 까맣게 잊고 묵용감의 손을 덥석 잡아 함께 토끼 우리로 향했다.
“왕야, 어서 와 보세요. 설구가 새끼를 낳으려고 해요.”
내내 그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고민하던 묵용감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녀가 먼저 다가와 손을 잡아 주었다. 그녀의 손길에 케케묵은 화는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렸다.
그가 여전히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며 물었다.
“확실한 것이오? 잘못 본 것은 아니오?”
“아니에요. 저기 좀 보세요.”
백천범이 우리 안에 쌓인 토끼털을 가리켰다.
“털을 뽑아 둥지를 만들었어요. 마구간 영감 말이 새끼를 낳을 때 하는 행동이래요.”
그때, 설구가 갑자기 미친 듯 날뛰더니 우리를 빠르게 뛰쳐나왔다. 우리 앞에 서 있던 백천범이 설구와 부딪힐 뻔했기에 묵용감은 재빨리 그녀를 품에 안고 설구와 거리를 두었다.
평소 온순한 설구였지만 날뛰니 매섭게 돌변해 시녀들을 놀라게 했다. 깜짝 놀란 하인들이 서로 도망치고 피하느라 정원은 한순간에 난장판이 되어 버렸다.
백천범은 묵용감의 품을 필사적으로 벗어나려 했지만 그는 그녀를 더욱 높이 들어 올렸다.
“왕비를 물 수도 있으니 조심하시오.”
백천범은 어쩔 수 없이 그의 품에 안긴 채 하인들에게 소리쳤다.
“어서 문을 닫아. 밖으로 나가면 안 돼!”
하인 두 명이 서둘러 문 앞을 가로막았다.
설구는 마구 날뛰다 다시 우리로 들어가더니 발톱으로 벽을 긁기 시작했다. 엄청난 고통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자신이 직접 기른 토끼가 고통스러워하자 백천범은 초조해 미칠 것만 같았다.
“어떻게 된 거야, 마구간 영감을 불러오면 안 돼?”
학평관이 차분하게 말했다.
“왕비 마마, 긴장하실 필요 없습니다. 사람이든 가축이든 출산을 할 땐 고통이 따르는 법입니다. 설구의 산통을 잘 지켜보시면 후에 왕비 마마께서 출산을 하실 때…….”
그는 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묵용감이 그를 베어 버릴 것처럼 차가운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멋쩍은 표정으로 입을 닫고는 말실수를 저지른 자신의 입을 원망했다.
백천범은 겨우 묵용감에게서 벗어나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그건 저도 알아요. 어릴 때 여섯째 이모가 아기를 낳을 때 고통스럽게 소리 지르는 걸 봤거든요. 숨어서 소리만 들었는데도 정말 끔찍해 보였어요.”
묵용감이 달래듯이 말했다.
“그것은 끔찍한 게 아니오. 산모가 아이를 낳는 것은 당연한 이치오. 고통이 두려워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은 안 될 일이오. 그렇게 하면 대를 어찌 이을 수 있겠소?”
백천범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도 맞는 말씀이에요. 측왕비가 고통이 심하겠네요.”
정원에 있던 사람들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말은 초왕의 대를 측왕비에게 맡긴다는 뜻이다. 그럼 왕비는?
백천범은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여기는 듯했다. 그녀는 다들 자신을 바라보자 오히려 그 모습을 의아하게 여겼다.
“왜 다들 날 보는 거야? 내 얼굴에 뭐 묻었어?”
묵용감은 화를 내야 할지 웃어야 할지 감이 오질 않았다. 그녀는 또다시 초왕비라는 신분을 잊고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 여기고 있었다. 너무도 자주 일어나는 일이이라 이제 그는 일일이 화를 내지도 않았다.
“쉬, 설구가 새끼를 낳으려고 합니다.”
학평관이 조용히 하라는 손짓을 했다.
모든 이들의 시선이 다시 설구를 향했다. 어느새 안정을 되찾은 설구가 몸을 둥글게 웅크리고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다.
다들 숨을 죽이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묵용감이 감싸 쥔 백천범의 손은 어느새 땀으로 흥건했다. 심하게 긴장해서인지 그녀는 양손으로 그의 손을 있는 힘껏 움켜쥐며 그에게 의지했다.
묵용감은 조금 의아했다. 평소에는 차갑기만 하던 그녀의 손이 지금은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순간 그의 가슴에도 작은 불길이 일었다. 그는 다른 한쪽 손으로 백천범을 가볍게 끌어안고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난 당신과 둘이서만 아이를 낳고 싶소. 다른 이들은 안 되오.”
* * *
길고 긴 사투 끝에 설구가 여섯 마리의 새끼를 낳았다. 손가락만 한 크기의 새끼들은 아직 털이 나지 않아 반들반들한 분홍빛 살갗을 드러냈다. 아직 눈도 뜨지 못하고 꿈틀거리는 모습이 꼭 고깃덩이 같았다.
초산이었던 설구는 출산 내내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특히 처음 두 마리를 낳을 땐 시간이 아주 오래 걸렸다. 설구는 연신 고통스러운 울음소리를 터트렸다. 그 이후부터는 일각마다 한 마리씩 낳았다.
백천범은 우리 앞에 쪼그려 앉아 하염없이 설구를 지켜보았다. 묵용감은 다리가 저리면 안 된다며 의자를 가져다주었다. 그녀는 의자가 너무 높다며 앉기 싫어했다. 묵용감은 하는 수 없이 다시 낮은 의자를 가져오라 분부했다.
그녀는 무릎에 턱을 괴고 설구를 지켜보았다. 새끼를 다 낳은 설구의 뱃속에서 물컹한 것들이 흘러나왔다. 설구는 고개를 숙여 정체 모를 것을 핥아먹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백천범이 소리쳤다.
“설구가 뭘 먹는 거야? 새끼 아니야?”
“아닙니다.”
학평관이 고개를 저으며 설명했다.
“태반과 새끼를 감싸고 있던 막이 함께 나온 것입니다. 어미 토끼가 새끼를 낳은 후에 먹어야 하지요. 아, 어서 따뜻한 물을 준비하거라. 조금 있으면 어미가 물을 찾을 것이다. 물이 없으면 새끼를 잡아먹을 수도 있다.”
진즉 따뜻한 물을 준비해 두었던 월규가 서둘러 우리 한쪽에 놓아주었다. 잠시 뒤 설구는 새끼들을 깨끗하게 핥은 뒤, 앞으로 뛰어나와 물을 먹었다.
설구의 출산이 얼추 끝나자 백천범은 그제야 긴 한숨을 쉬며 한시름 놓았다. 그녀가 한쪽에 있던 구구를 품에 안고 쓰다듬었다.
“설구 정말 대단하다. 다음엔 구구 너도 아기를 많이 낳아서 나한테 보여 줘야 해.”
곁을 지키던 시녀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시녀들이 왜 웃는지 이해하지 못한 백천범이 구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보여? 다들 널 보고 비웃고 있어.”
월향은 하도 웃어서 얼굴이 빨개졌다.
“왕비 마마, 구구는 수컷이라 새끼를 낳지 못합니다.”
깜짝 놀란 백천범이 구구를 들어 올리고 유심히 바라보았다.
“구구가 수컷이었구나. 난 몰랐어.”
묵용감이 그녀를 흘겨보며 말했다.
“어찌 그리 어리석단 말이오. 수컷 토끼도 없이 설구가 어찌 새끼를 가졌겠소?”
백천범은 설구와 구구를 번갈아 바라본 뒤에야 모든 걸 깨달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설구와 구구가 부부였군요!”
“이제야 아셨군요.”
월규가 웃으며 말했다.
“날마다 설구와 구구를 데리고 노셔서 알고 계신 줄 알았습니다.”
백천범은 조금 부끄러워졌다.
“난 둘이 사이 좋은 자매인 줄 알았어. 어쩐지 아주 다정하게 붙어 있더라니.”
묵용감이 그녀를 일으켰다.
“오랜 시간 지켜보느라 힘들었을 텐데 그만 쉬시오.”
월규는 서둘러 구구를 받아 들고 옆에 있던 시녀에게 넘겼다.
“왕비 마마, 걱정하지 마시고 이만 주무십시오. 이곳은 소인들이 지키겠습니다. 마마께서는 내일 아침에 다시 구경하시지요.”
확실히 피로가 밀려오긴 했다. 백천범은 묵용감이 이끄는 대로 얌전히 방에 들어갔다. 방에 들어선 뒤에야 이상함을 느낀 그녀가 묵용감을 바라보았다.
“왕야, 회림각에 안 가세요? 왜 제 방으로 들어오시는 거예요.”
묵용감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며칠간 정무가 바빠 왕비를 신경 쓰지 못했소. 해서 오늘은 왕비와 함께 침소에 들려 하오.”
그는 두 시녀 앞에서 자연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백천범의 귓가에는 그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들렸다. 그녀가 자신의 소맷자락을 만지작거리며 우물거렸다.
“그, 그건 규율에 맞지 않잖아요.”
“부부가 함께 침소에 드는데 규율에 맞지 않을 게 뭐가 있소?”
“왕야께서도 약속하셨잖아요. 그, 그것은 하시지…….”
묵용감도 시녀들 앞에서 그녀와 했던 이야기를 다 털어놓긴 민망했다. 그가 서둘러 그녀의 말을 잘랐다.
“걱정하지 마시오. 남아 일언 중천금이라 했소.”
월향과 월규는 묵용감이 남월각에서 묵는다는 말에 크게 기뻐하며 물을 떠 와 두 주인의 세안을 도왔다. 그리곤 방 안에 특별히 빨간 초를 밝히고 연등을 침대 머리맡에 빙 둘러 장식까지 해 주었다.
묵용감과 함께 침소에 드는 일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대부분 그녀가 아팠을 때 일어났던 일이었다. 그녀는 나중에 기홍에게 그 사실을 전해 듣고도 그리 부끄럽지 않았다. 어쨌든 그가 그녀를 도와주려고 한 것이었으니 크게 신경 쓰이진 않았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그와 함께 침소에 들기엔 그녀의 정신이 너무나 또렷했다. 침의만 입은 채 머뭇거리는 그녀는 한눈에 보아도 매우 불안한 기색이었다. 태연하게 행동하고 싶어도 처음으로 남자와 함께 침소에 드는 순간이었다. 백천범은 도저히 불편함을 떨쳐 낼 수 없었다.
묵용감은 그녀가 자신과 부부란 사실을 자꾸 잊는 듯하니 앞으로 날마다 함께 침소에 들기로 마음을 정했다. 그리하면 부부 사이를 기억 못 할 일은 없지 않겠는가?
그가 태연하게 이불을 걷고 침대에 걸터앉더니 시선을 올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불 속을 따뜻하게 데워 놓아야 들어올 것이오? 어찌 그리 계속 서 있는 것이오.”
“방에 불을 때서 이불 속도 따뜻해요.”
이렇게 된 이상, 백천범도 어쩔 수 없었다. 묵용감이 하는 말은 이치에 맞는 말이었다. 혼사를 치렀으니 그녀는 그의 아내였다. 혼사를 치른 날에도 두 사람은 한 침대에서 잠을 청했으니 따지고 보면 별일도 아니었다. 부부가 함께 침소에 들지 않는 집이 어디 있단 말인가?
하지만 잠을 청하기 전에 그에게 알려 줘야 할 게 있었다. 그래야 다음 날 아침에 그가 그녀를 원망하지 않을 터였다.
백천범은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 그의 옆자리에 누우며 말했다.
“저는 잘 때 조금 많이 움직이는 편이에요. 유모랑 함께 잘 때 제가 늘 유모 배를 발로 찼다고 했거든요. 만약 제가 왕야를 발로 차더라도 화내시면 안 돼요. 어차피 제가 깊게 잠들어 있을 테니 화내도 소용없으시겠지만요. 맞다, 왕야. 코를 골진 않으시죠? 저는 잠귀가 밝아서 그러시면 잠을 못 자요.”
묵용감이 몸을 틀어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웃었다.
“난 코를 골지 않소.”
“이를 갈진 않으세요? 듣기 싫은 소리가 나거든요.”
“이도 갈지 않소.”
“침은요? 잘못해서 제 몸에 침을 흘리시면 안…….”
묵용감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듣다 보니 본인의 잠버릇을 말하는 것 같소.”
백천범은 그와 간격을 좁히지 않고 옆으로 누워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살짝 붉어진 얼굴로 진지하게 말했다.
“그럼 이렇게 떨어져서 자도록 해요.”
묵용감이 긴 팔을 뻗어 그녀를 품으로 끌어당겼다. 그의 얼굴에는 능청스러운 미소가 가득했다.
“가까이 오시오. 밀어내지 마시오. 나도 그댈 밀어내지 않을 테니. 앞으로는 늘 이렇게 잠을 청하는 게 좋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