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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212)화 (211/1,192)

제212화

“또 무엇이오?”

그녀의 대답이 늦어지자 묵용감은 안달이 난 듯 미간을 찌푸렸다.

“어찌 이리 안달이 나게 한단 말이오. 어서 말해 보시오! 또 무엇이오?”

“기홍 언니가 저택에 남아 있으면 좋겠지만 언니의 인생을 허비하게 할 수는 없잖아요. 다 큰 아가씨가 평생 시집을 안 갈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서 제 생각에는…….”

묵용감도 그녀의 의도를 파악했다. 저택 안에서 그녀의 짝을 찾아 주자는 것이다. 그래야 저택을 떠나지 않고 가정을 이룰 수 있었으니. 허, 그녀가 중매를 서려고 할 줄이야.

하지만 괜찮은 방법이었다. 기홍을 홀로 두지 않고도 저택에 남길 방법이다. 그녀는 대체 기홍의 짝으로 누구를 눈여겨 보았단 말인가?

그가 그녀의 얼굴을 꼬집으며 놀렸다.

“나이도 어리면서 중매를 서려는 것이오? 말해 보시오. 기홍의 짝으로 누가 좋겠소?”

백천범은 아무 말 없이 웃으며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묵용감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말해 보시오. 그것 하나 못 도와주겠소? 내 말에 복종하지 않는 자가 어디 있단 말이오. 게다가 기홍은 집안일도 잘하니 다들 좋아할 것이오. 어서 말해 보시오. 누가 좋겠소?”

“왕야요.”

“응?”

“왕야요.”

“뭐라 하였소?”

“왕야가 좋겠다고요.”

“…….”

묵용감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 말이 화도 나면서 우스웠다. 설마하니 그를 지목할 줄이야.

그가 담담한 표정으로 물었다.

“내가 기홍을 아내로 삼았으면 좋겠단 것이오?”

“안 돼요?”

그녀가 그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언니는 예쁘잖아요. 신분이 조금 낮긴 하지만, 왕야께서도 그러셨잖아요. 언니는 집안일도 잘한다고요. 언니는 뭐든지 다 잘해요. 음식 솜씨는 말할 것도 없고요. 왕야께서도 언니가 만들어 주는 음식에 익숙해지셨을걸요? 다른 사람이 만들어 주는 음식은 입에 맞지 않을 거예요.

게다가 성격까지 좋아서 다른 사람의 말을 마음에 담아 두는 법이 없어요. 이렇게 좋은 아내는 눈 씻고 찾아봐도 찾기 힘들걸요. 안 그래요, 왕야?”

“그러니 본왕에게 첩을 들이란 말이오?”

그녀 앞에서 잘 쓰지 않았던 호칭마저 나올 만큼, 그는 화가 나 있었다.

“안 그럼 어떡하겠어요?”

그의 기분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백천범은 재잘거리며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다.

“이 방법이야말로 일석이조인걸요. 언니는 저택을 떠나지 않아도 되고, 왕야를 모실 사람이 한 명 더 늘어나는 거니까요. 부끄럽지만 저는 몸집이 작아 합방을 할 수 없잖아요. 왕야께서 이렇게 참으시다가 혹여 병이라도 나시면…….”

그 사실을 본인도 알고 있었다니, 묵용감은 속으로 냉소를 지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그녀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심장도 내어 줄 것처럼 애지중지 아껴 준 그였다. 모든 이들이 다 아는 이 사실을 그녀만 몰랐다. 정녕 그가 심장을 꺼내 보여 주어야 그의 진심을 알아줄까?

지난번에는 사장풍의 일로 소란을 피우더니, 지금은 기홍을 첩으로 들이라고? 이런 상황에서 어찌 화를 내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그는 더 이상 억누를 수 없을 정도로 화가 났다. 아무리 둔감한 성격이라 해도 이제 모를 수가 없었다.

본능적으로 자리를 피해야겠다고 직감한 백천범이 몸을 움직이려는 찰나, 그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허리를 움켜쥐었다. 고개를 들어 보니, 그가 깊고 그윽한 눈망울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먹처럼 새카만 눈동자는 그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깊었다. 그 안에서 마구 뒤섞이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백천범은 최대한 밝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와, 왕야. 화내지 마시어요. 모, 못 들은 걸로 하시면 되잖아요.”

그녀를 한참이나 그윽하게 바라보던 묵용감이 천천히 입을 뗐다.

“내가 기홍을 첩으로 들이면, 왕비는 기쁠 것 같소?”

고개를 끄덕이려는 순간, 그의 눈망울에 섬뜩한 빛이 스치는 걸 발견한 그녀는 입술만 꿈틀거렸다. 기쁘다고 해야 하는지 아닌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잠시 침묵하던 묵용감이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왕비는 평생 한 명의 지아비와 단둘이 살고 싶어 하질 않았소? 어찌 내게 또 첩을 들이라는 것이오?”

백천범은 고개를 반쯤 숙인 채 중얼거렸다.

“이미 후원에 한 명 있으니까요.”

그녀가 수원상을 언급하자 묵용감은 잠시 머뭇거렸다.

“측왕비를 들인 것은 뜻하지 않은 일이었소.”

백천범은 솔직히 털어놓았다.

“왕야께서는 원상 언니를 첩으로 들이셨으면서 왜 아이도 낳지 못하게 하시는 거예요. 오늘 언니를 만났는데 얼마나 가여웠는지 몰라요.”

입에 올리기 쉽지 않은 주제였지만 묵용감은 그녀에게 숨기고 싶지 않았다.

“난 측왕비가 싫소.”

“싫은데 왜 첩으로 들이신 거예요?”

사실은 정치의 문제였다. 수원상을 들이지 않으면 다른 여인을 들여야 했을 터였다.

그가 어쩔 도리가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폐하께서도 수없이 많은 후궁을 들이셨지만 전부 좋아하시지는 않소. 게다가 혼사를 올리기 전에 왕래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어찌 좋고 싫음을 따질 수 있단 말이오.”

백천범이 말했다.

“왕야께서는 저와 혼사를 치르셨을 때도 절 싫어하셨잖아요.”

“좋아하는 사람이 없었을 땐 누굴 들여도 상관없지만, 좋아하는 마음이 생겼으니 이제는 안 될 일이오.”

백천범은 조금 혼란스러워졌다. 그녀와 혼사를 치를 땐 좋아하는 사람이 없었으니 누구와 혼인을 해도 상관없었다는 말이었다. 또 수원상을 들일 때도 그녀를 좋아하지 않으니 가능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그는 대체 언제부터 그녀를 좋아했단 말인가?

묵용감은 그녀의 찌푸린 미간을 바라보며 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이오?”

백천범이 탄식을 내뱉었다.

“정말 운명의 장난이네요. 왕야께서 절 조금만 더 일찍 좋아하셨다면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왕야께서 원상 언니를 들이지 않으셨을 거잖아요.”

“신경 쓰이는 것이오?”

아주 조금이라 할지라도 그녀가 수원상을 신경 쓴다면, 조금이라도 질투해 준다면 묵용감은 정말 기쁠 터였다.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라 원상 언니가 가여워서 그래요.”

백천범이 차분하게 말했다.

“왕야께서는 사내대장부시잖아요. 대장부들은 책임감이 있어야 한다고요. 시집을 왔는데 왕야께서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으시니 얼마나 상심이 크겠어요.”

“내가 왕비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을 때도 상심이 컸소?”

“저랑은 다르죠. 저는 백 씨 가문이잖아요. 왕야께서 아무런 신경도 쓰시지 않는 게 당연하죠.”

그녀는 꼭 그가 원하는 대답만 피해서 말하는 것 같았다. 억누르고 있던 화가 다시 꿈틀거리는 탓에 묵용감은 피로감이 밀려왔다. 그가 손에 힘을 풀며 말했다.

“그만 나가시오. 조용히 있고 싶소.”

“네.”

백천범도 바라는 바였다. 그녀는 빠르게 그의 다리에서 내려와 문 앞으로 쪼르르 뛰어갔다.

“왕야,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기홍 언니는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결국 폭발해 버린 묵용감이 서진을 내던졌다.

“썩 나가시오!”

백천범은 생쥐처럼 방을 빠져나갔다.

* * *

백천범은 최근 묵용감과 충돌이 잦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말다툼을 벌이고 나니 회림각에 찾아갈 엄두가 나질 않았다. 괜스레 눈에 띄었다가 그의 심기를 건드릴 것 같았다.

게다가 설구가 곧 새끼를 낳을 때가 되어 늘 설구의 곁을 지켜야 했다. 마구간 영감 말이 맞았다. 그를 만난 후 아흐레가 되던 날 밤, 설구가 이상한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설구는 자신의 가슴 털을 뽑아 대고 있었다.

깜짝 놀란 백천범이 월규에게 물었다.

“곧 새끼를 낳으려는 거지?”

“그런 듯합니다.”

월규가 그녀 옆에 쪼그려 앉아 설구를 바라보았다.

“마구간 영감 말이, 어미 토끼는 새끼를 낳을 때 자신의 털을 뽑아 둥지를 만든다고 합니다.”

백천범이 기운차게 말했다.

“우리가 둥지를 만들어 줬잖아. 이걸로는 부족한가 봐. 솜을 더 가져오는 게 좋겠어. 그럼 더 따뜻할 거야.”

월규가 그녀를 흘겨보며 말했다.

“그 목화솜은 왕야께서 왕비 마마의 새해 솜옷을 만들 때 쓰라고 주신 것입니다. 솜을 못 쓰게 낭비할 수는 없지요.”

“그럼 설구는 어떡해? 털을 죄다 뽑으려고 하잖아.”

월향이 그녀를 타일렀다.

“왕비 마마, 그날 마구간 영감이 하는 말 못 들으셨습니까? 어미 토끼가 털을 뽑는 건 본능입니다. 둥지를 깔기 위해 털을 뽑는 것이니, 오히려 털을 뽑지 않으면 좋지 않을 것입니다.”

하는 수 없이 솜은 포기하기로 했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가 또다시 월규에게 물었다.

“그날 마구간 영감이 했던 말은 다 기억하지?”

월규가 웅얼거리며 말했다.

“말이 하도 빠르셔서 많이는 기억나진 않습니다.”

월향이 말했다.

“총관리인 어르신의 기억력이 가장 좋으니까 잠시 와서 봐 달라고 부탁드리는 게 어떠신지요.”

“그게 좋겠다.”

설구가 새하얀 털을 뽑아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백천범은 자꾸만 긴장되었다.

“그럼 어서 어르신을 모셔와.”

서둘러 밖으로 향한 월규가 한달음에 회림각으로 뛰어갔다. 그녀는 학평관을 만나 사정을 설명했다.

문 앞에 서 있던 묵용감은 남월각의 시녀가 달려오자 신경이 쓰였다. 게다가 창백해진 얼굴로 무어라고 숙덕거리는 모습이 좋은 일로 찾아온 게 아닌 듯했다. 결국 그는 참지 못하고 백천범을 보러 나섰다.

서둘러 밖으로 향하는 그의 모습을 발견한 학평관이 다가와 물었다.

“왕야, 어디를 가시려는 것입니까?”

묵용감은 발걸음을 멈추지도 않고 그에게 물었다.

“남월각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이냐?”

“설구라 불리던 토끼가 곧 새끼를 낳을 것 같다고 하옵니다. 왕비 마마께서 시녀를 보내 소인을 부르셨습니다.”

묵용감은 마음이 놓였지만 발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분명 왕비가 초조해하고 있을 것이다. 어서 가 보거라.”

학평관은 대답을 올린 뒤 서둘러 앞으로 향했다. 월규와 등불을 든 하인이 헉헉대며 그의 뒤를 쫓았다.

그날 기홍의 일로 다툰 뒤, 그녀가 회림각을 찾지 않은 탓에 묵용감은 며칠 동안이나 백천범을 보지 못했다. 왕이자 그녀의 지아비인 그는 넉살 좋게 먼저 찾아갈 수 없었다. 하지만 오매불망 기다리기에는 그녀가 미칠 듯이 보고 싶었다. 때마침 설구가 새끼를 낳는다고 하니 좋은 핑곗거리가 생긴 셈이다.

토끼가 새끼를 낳는 건 그도 본 적 없는 진귀한 일이었다. 그는 절대 누굴 찾아가려는 게 아니라 단순히 토끼를 보기 위해 남월각으로 향하는 것이라고 속으로 되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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