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1화
마음이 심란했던 백천범은 기홍과 주방에서 춘권을 튀길 때도 집중하지 못했다. 그때, 솥에서 기름이 심하게 튀어오르기 시작했다. 아얏! 소리와 함께 그녀가 얼굴을 감싸 쥐었다.
기홍은 들고 있던 기다란 젓가락을 내려놓고 서둘러 그녀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어느새 나타난 검은 그림자가 순식간에 그녀를 안아 올리더니 곧장 밖으로 데려갔다.
부엌을 나온 백천범은 묵용감에게 안긴 채 방까지 옮겨졌다. 그가 굳은 얼굴로 녹하에게 분부했다.
“서둘러 청초고靑草膏를 가져오너라. 왕비가 기름에 데었다.”
깜짝 놀란 녹하가 서둘러 궤로 달려가 연고를 찾았다.
묵용감은 백천범을 등불 아래로 데려가 상처를 살폈다. 미세하게 붉은 자국이 남았지만 심하게 데인 것 같진 않았다. 그가 조심스레 상처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아프오?”
기름이 튈 땐 아팠지만 지금은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하지만 묵용감이 이렇게 가까이에서 관심을 보이니 며칠 동안 그를 보지 못했던 그녀는 괜스레 속상한 감정이 밀려왔다. 금세 눈시울을 붉힌 그녀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파요.”
그녀의 말에 묵용감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상처를 다시 살펴보니 크게 다친 것처럼 보이지 않아도 피부 속이 심하게 상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늘 강한 모습만 보이던 그녀가 이리 아프다는 말을 꺼내겠는가?
“어찌 아직도 약을 가져오지 않는 것이냐?”
그의 목소리에서 초조함과 화가 묻어났다.
“아프다는 말이 안 들리는 것이냐?”
녹하가 연고를 들고 뛰어왔다. 일부러 늦게 가져온 게 아니라 궤 안에 약병이 너무 많이 하나씩 확인하다 보니 늦고 말았다.
뚜껑을 열자 청초고의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연고를 바를 생각이 사라진 백천범은 몸을 틀고 뒷걸음질 쳤다.
“어서, 이리 오시오.”
묵용감이 손끝에 연고를 묻히고 그녀를 불렀다.
“약을 바르면 통증이 가라앉을 것이오.”
“이, 이제는 아프지 않은 것 같아요.”
백천범이 입꼬리를 잔뜩 늘어뜨리며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바르기 싫어요, 왕야.”
“정말 안 아픈 것이오?”
“안 아파요.”
백천범이 손으로 얼굴을 쓰다듬어 보였다.
“이것 보세요. 정말 하나도 안 아파요.”
그제야 마음이 놓인 묵용감이 의자에 앉았다.
그녀를 보지 못했던 며칠 동안 늘 그녀를 그리워했다. 하지만 그도 부끄럽긴 마찬가지였다. 그날 그녀에게 좋아한다고 털어놓은 것은 그 나름대로의 고백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질 않았다. 마음이 뒤숭숭하고 심란해진 그는 그녀를 만나려고 하지 않았다.
백천범은 푸대접이라는 게 무엇인지 몸소 체험하는 기분이었다. 방금까지 정성스럽게 약을 발라 주더니, 다시 거리를 두는 건 또 뭐람. 그녀는 그대로 방에서 나가고 싶었지만 기홍의 일을 말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백천범은 우두커니 서서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망설였다.
묵용감은 아주 분주해 보였다. 그는 책상 위의 물건을 정리하면서도 곁눈질로 그녀를 힐끔거렸다. 원래는 오늘도 저택에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갑작스레 마음을 바꾸고 돌아온 것이었다. 마음이 통한 것인지 그가 회림각에 발을 들이자마자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며칠 전만 해도 상대방이 먼저 찾아오지 않으면 만나지 않을 것처럼 미묘한 기 싸움을 벌이던 두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먼저 회림각에 와 주니 왠지 모르게 승리를 거둔 기분이었다. 어깨가 조금 으쓱해지는 건 물론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기분이 밀려왔다. 묵용감은 티를 내지 않고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가만히 지켜보았다.
잠시 서 있던 백천범은 그의 분주한 모습을 보고는 말없이 밖으로 향했다.
결국 마음이 급해진 그가 그녀에게 물었다.
“어딜 가려는 것이오?”
“곧 밥을 먹어야 하니까 가서 좀 보려고요.”
“주방에 가려는 것이오? 또 기름이 튀면 어쩌려고, 가지 마시오.”
백천범은 문 앞에 서서 잠시 고민했다.
“왕야께서 바쁘신 것 같아서 방해하지 않으려고요. 밥을 먹을 때 다시 얘기해요.”
그는 그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게다가 밥을 먹기 시작하면 그녀에게 그의 존재감은 식탁에 차려진 음식보다 못했다. 음식을 눈앞에 두고, 그녀가 그를 신경이나 쓰겠는가?
“이리 오시오.”
그가 반짝이는 눈빛을 보내며 두 팔을 벌렸다.
백천범은 그 자리에 서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정말 이상했다. 지난번처럼 벼락에 맞은 기분이 들었다가 또다시 금세 사라져 버렸다. 그녀는 가만히 서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이런 기분이 들까. 몸에 문제가 생긴 게 틀림없었다. 그녀는 나중에 유일첩 의원에게 진료를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묵용감이 다시 한번 그녀를 불렀다.
“이리 오시오.”
백천범은 그제야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왕야, 왜 부르시는 거예요?”
묵용감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를 자신의 다리에 앉혔다. 그리곤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싸더니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내가 보고 싶었소?”
백천범은 왠지 민망해져 대답을 회피했다.
“왕야께서는 제가 보고 싶으셨어요?”
“보고 싶었소.”
백천범이 몸을 살짝 떨었다. 또다. 그녀는 또다시 벼락에 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잠시 뜸을 들이다 미소를 지었다.
“그럼 저도 보고 싶었어요.”
“내가 먼저 말해야 보고 싶었다고 해 주다니, 이런 못난 심보가 어디 있소?”
묵용감이 투덜거리면서도 사랑스럽다는 듯 그녀의 얼굴을 꼬집었다.
“내가 보고 싶지 않았다고 하면 그대도 그렇게 말할 작정이었소?”
백천범이 잠시 고민하는 듯 눈을 깜박였다.
“사실은… 그래도 왕야가 보고 싶었어요.”
거의 종일을 붙어 있다가 갑자기 떨어져 지내면 누구나 보고 싶기 마련이다. 며칠 동안 설구와 구구를 보지 못하면 무척이나 보고 싶은 것처럼.
그래도 묵용감은 그녀의 대답이 꽤 만족스러웠다. 방에 불을 때서인지 발그스레하게 물든 그녀의 새하얀 얼굴이 무척 아름다워 보였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감싼 손을 차마 뗄 수 없었다.
“천범.”
그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낮고 목이 멘 듯한 목소리였다.
“내가…….”
그녀에게 입을 맞추고 싶었다. 그러나 지난번처럼 그녀가 거부할까 봐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그는 입을 다물고 그녀의 얼굴을 더욱 꽉 붙잡았다.
이럴 때마다 백천범은 당황하며 어쩔 줄 몰랐다. 그녀가 손을 뻗어 그의 가슴을 밀어냈다.
“왕야, 이게 무슨 짓이에요. 말로 하시면 되잖아요. 대체 왜…….”
“움직이지 마시오.”
그의 목소리에서 짙은 애처로움이 묻어났다.
“입을 맞추려는 것이오.”
“안 돼요. 전 다 큰 아가씨라고요. 이건 규율에 맞지 않는 짓이에요!”
그녀의 말에 묵용감은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대체 몇 번이나 말해 주어야 잊지 않겠소? 당신은 내 아내요. 그저 다 큰 아가씨가 아니란 말이오. 지난번엔 잊지 않겠다더니, 대체 뭘 기억하고 있는 것이오?”
백천범은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분명 잊지 않겠다고 했지만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그녀는 그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하지만 묵용감이 이렇게 대하는 게 싫었다. 자꾸만 겁이 났다. 뭐가 그리도 무서운지 모르면서, 그녀는 겁을 내었다.
“늘 이렇게 봐주기만 하니 안 되겠소.”
묵용감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벌로 그대가 내 아내라는 말을 열 번 읊으시오.”
백천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런 벌이 어디 있어요?”
“어렵소?”
“아뇨.”
“그럼 어서 읊으시오.”
백천범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청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왕야의 아내입니다. 저는 왕야의 아내입니다. 저는… 왕야의 아내입니다…….”
묵용감은 오물거리는 그녀의 작은 입술을 바라보았다. 그 자그마한 입으로 내뱉는 말이 어찌나 듣기 좋은지 몰랐다. 흐뭇했던 그는 눈이 가느다래질 만큼 환하게 웃었다. 그런데 왠지 백천범이 점점 더 즐거워하는 듯했다. 의아해진 그가 그녀의 말을 자세히 들어 보니 단어를 바꾸어 말하고 있었다.
“왕야는 저의 아내입니다. 왕야는 저의 아내입니다…….”
그가 웃으며 짐짓 혼내듯이 말했다.
“엉덩이가 또 근질거리는 것이오?”
백천범은 웃음을 멈추지 못하고 그의 품에서 가쁜 숨을 내쉬었다. 이대로 넘어갈 수 없던 그가 손을 뻗어 간지럼을 태웠다. 하지만 그녀도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를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긴 했지만, 있는 힘껏 반격해 대는 통에 두 사람은 웃으며 한바탕 소란을 피웠다.
백천범은 그의 기분이 좋아 보이는 틈을 타 마음에 담아 두었던 말을 꺼내기로 했다.
“입맞춤을 하지 말라는 게 아니에요. 하지만 그 전에 제 청을 들어주시겠다고 약속하셔야 해요.”
묵용감이 빙그레 웃었다. 아내에게 입 한 번 맞추려는 것뿐인데, 조건까지 내걸다니! 그녀가 이만큼 양보한 것도 흔치 않은 일이니,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말해 보시오. 청이 무엇이오?”
“기홍 언니가 곧 저택을 나가야 한다는 거, 왕야께서도 알고 계셨어요?”
“학평관에게 들은 것 같소.”
“왕야께서는 아무렇지도 않으셔요?”
백천범이 그의 옷자락에 새겨진 자수를 만지작거렸다. 방 안의 온기 때문인지 볼록 튀어나온 금사를 만져도 차가운 느낌이 없이 그저 매끄러웠다.
묵용감이 고개를 숙여 그녀의 하얀 손을 내려다보았다. 자수를 따라 손가락으로 끊임없이 쓸어내리는 탓에 간지러웠다. 꼭 자수가 아니라 그의 가슴을 간지럽히는 기분이었다.
“아쉬워도 어쩔 수 없질 않소. 규율상 일정 나이가 되면 저택을 떠나야 하오.”
“하지만 기홍 언니가 떠나면 누가 왕야의 음식을 해 주겠어요. 다른 사람이 만드는 음식이 왕야 입맛에 맞으시겠어요?”
묵용감은 그녀의 의도를 알 것 같아 코웃음을 쳤다.
“왕비는 그 애의 음식 솜씨가 아쉬운 것 아니오? 한데 내 탓으로 돌리려 하다니. 정말 이런 못된 심보가 어디 있소.”
백천범이 그제야 솔직히 털어놓았다.
“언니의 음식을 먹지 못하는 것도 아쉽지만 언니가 떠나는 게 더 아쉬워요. 언니가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언니도 떠나고 싶지 않대요.”
기홍의 의지야 어찌 되었든 백천범이 원한다면 들어주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녀가 기홍의 음식을 좋아하면 기홍을 평생 저택에 두면 될 일이었다.
“왕비가 원한다면야. 그 애도 나가길 원치 않는다고 하니 계속 저택에 두겠소.”
묵용감이 빙그레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왕비의 청을 들어주었으니 이제 된 것이 아니오?”
그는 그녀에게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다가갔다.
그때 백천범이 그의 팔을 힘주어 잡았다.
“왕야, 왜 이렇게 급하신 거예요. 아직 할 말이 남았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