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0화
묵용감은 아예 팔을 괴고 침대에 누워서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의 목소리가 점점 낮아져, 그녀가 아니라면 누구도 듣지 못할 정도였다.
두 사람이 장막 안에서 귓속말을 속삭이자 밖에 있던 녹하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 기홍도 웃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잘 지내다가도 한 번씩 소란을 피우는 둘의 모습은 꼭 어린아이 같았다. 어린 왕비야 워낙 아이 같다고 해도, 위엄 넘치던 초왕은 사랑에 빠지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두 사람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누워 있자 두 시녀는 금세 민망함이 밀려왔다.
특히나 묵용감은 머리에 팔을 괴고 백옥같이 하얀 피부에 찍힌 시퍼런 자국을 힐끔거렸다. 자신의 무자비한 행동이 남긴 흔적을 바라볼 때마다 죄책감이 밀려왔다. 그는 차마 백천범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이렇게까지 난처했던 적이 없어, 그는 말을 더 이을 수 없었다.
“잠시 눈 좀 붙이시오. 약이 마르면 깨워 주겠소.”
백천범 또한 부끄러웠기에 손으로 코를 비비적거리며 대답했다.
“왕야께서도 바쁘시면 돌아가 보시어요. 언니들이 돌봐 주니까 괜찮아요.”
“아무 데도 가지 않고 이곳에 있을 것이오.”
묵용감이 그녀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속죄를 하려는 것이오. 내가 지키고 있을 테니 눈 좀 붙이시오.”
백천범은 하는 수 없이 눈을 감았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잠이 올 수 있을까. 결국 그녀는 실눈을 뜨고 묵용감을 훔쳐보았다.
그녀가 눈을 감자 묵용감은 그제야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바들거리는 그녀의 눈가를 알아차린 그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잠들지 못하자 그가 그녀의 손을 꼭 쥐었다.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 보시오. 선물로 주겠소.”
백천범은 눈을 감은 채 대답했다.
“까닭도 없이 선물을 주시려고요?”
그녀를 다치게 했다는 죄책감으로 마음이 아팠다. 그는 조금이라도 빚을 갚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는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내가 그대를 좋아하기 때문이오.”
그 순간 백천범이 눈을 떴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꼭 벼락을 맞은 것처럼 찌릿하고 얼떨떨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느낌이었다.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기이한 기분이었지만 되새길 방법이 없었다.
“무슨 일이오?”
멍한 그녀의 모습에 묵용감이 가볍게 그녀의 손을 움켜쥐었다.
“추운 것이오?”
“왕야.”
백천범이 머뭇거렸다. 마음속으로 생각했던 일을 묻고 싶었다.
“만약에요, 만약에 말이에요. 만약에 제가 왕야를 선택하지 않았다면 왕야께서도 사 제독님처럼 되었을까요?”
묵용감은 대답 없이 그녀의 치마를 잘 정돈하고 허리를 숙여 신발을 신겨 주었다. 그리곤 장막을 걷어 그녀를 밖으로 내보냈다. 밖을 지키던 녹하와 기홍은 방을 나간 지 오래였다. 두 사람이 은밀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니 자리를 피한 듯했다.
미묘한 침묵에 백천범은 괜스레 눈치를 보았다. 자신의 말에 묵용감이 다시 화가 난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된 그녀는 그저 고개를 숙이고 그의 뒤를 따라갔다. 막 방문을 나서려는데 불쑥 대답이 들려왔다.
“그리되진 않았을 것이오.”
사장풍처럼 되진 않았을 것이다. 그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훨씬 더 아파하고, 괴로워하다 나락에 떨어질 터였다.
* * *
묵용감과 화해를 하긴 했지만 그 후로 백천범은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사장풍 때문인지, 녹하가 해 준 말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묵용감에게 엉덩이를 보인 게 민망해서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며칠간 회림각을 찾지 않았다. 회림각에 있던 설구도 하인을 보내 남월각으로 데려왔다.
묵용감도 남월각을 찾지 않았다. 두 사람은 기 싸움이라도 하듯 상대방이 먼저 찾아오기 전까지 서로를 찾지 않을 기세였다. 막상 겨울이 되니 묵용감은 정무가 더욱 바빠져 찾아올 겨를도 없었다. 새해가 되기 전에 많은 일을 처리해야 했다.
끊임없는 업무만큼이나 그의 지시를 바라는 사람들이 줄줄이 저택을 찾아오자 그는 아예 관청에 머물렀다. 정오가 되어도 돌아갈 수 없던 그는 하인들이 점심으로 가져다준 찬합을 먹거나 부하 무관들과 주루酒樓에서 술을 마셨다.
주루에 향하기 전엔 저택으로 하인을 보내 알려 주어야 했다. 그래야 기홍이 찬합을 보내지 않을 수 있었다.
찬합을 보내지 않게 되어도 애써 준비한 음식을 버릴 순 없었기에, 학평관은 음식을 남월각으로 보냈다. 초왕을 위해 준비한 음식이었으니 왕비가 먹어도 문제는 없었다.
두 차례나 음식을 전해 받은 백천범은 그제야 묵용감이 저택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희미하게 안도의 숨을 내쉬고 회림각으로 향했다.
남월각의 문을 나설 때, 그녀는 낙성각 정원에 누군가 서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목을 길게 빼고 바라보니 다름 아닌 수원상이었다. 사장풍이 저택에 왔던 날에 함께 식사를 한 후로 마주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요즘 수원상은 백천범이 처음 저택에 왔을 때처럼 존재감 없이 지내고 있었다. 이렇게 마주치지 않으면 그녀를 거의 잊고 지낼 정도였다. 거처가 가까운 백천범도 이 정도이니, 초왕은 더더욱 그녀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하지만 수원상은 백천범과는 달랐다. 백천범은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의 사랑도 받지 못하는 서녀였지만, 수원상은 대학사의 적녀이자 장녀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귀하디귀한 존재였다. 항상 격식을 중시하던 여인이 지금은 온종일 처소에만 틀어박혀 지내고 있었다. 쓸쓸하게 홀로 지내는 모습이 어찌나 처량해 보이는지 절로 탄식이 나왔다.
잠시 고민하던 백천범은 길을 틀어 낙성각으로 향했다. 입구에 선 그녀가 수원상을 불렀다.
“원상 언니, 저 왔어요.”
멍하니 정원에 서 있던 수원상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급히 방 안으로 들어가며 뒷모습만 보여 줄 뿐이었다.
백천범은 황당한 표정으로 문 앞에 계속 서 있었다. 수원상은 그녀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그렇다면 굳이 눈에 띄어 미움을 살 필요는 없었다.
기분이 좋지 않았던 백천범은 회림각에 도착한 뒤에도 울적했다. 녹하가 그녀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아니, 오늘 무슨 일이 있었길래 다들 우거지상이 되었답니까? 전염이라도 된 것입니까?”
백천범이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언니, 제 얘긴 아니죠? 전 우거지상이 아닌걸요.”
녹하가 그녀를 보며 작게 웃더니 슬쩍 방 안을 가리켰다.
“우거지상을 한 사람은 방 안에 있습니다. 가서 한번 보십시오.”
백천범은 녹하가 말하는 사람이 기홍이란 걸 눈치챘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기홍의 성격은 더할 나위 없이 무던했다. 심성이 고와 말을 붙이기도 편해서 초왕도 그녀를 아꼈다. 그간 한 번도 그녀의 찌푸린 얼굴을 본 일이 없었는데…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마음이 다급해진 백천범은 서둘러 발을 걷어 올리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기홍이 화장대 앞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녹하의 말처럼 우거지상 정도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웃음기 없는 얼굴은 어딘가 우울해 보였다.
“언니, 무슨 일이에요?”
백천범은 기홍에게 달려가 허리를 굽히고 눈을 맞췄다.
기홍은 조금 민망했는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기홍이 백천범의 손을 쓰다듬었다. 백천범의 손이 차가운 걸 눈치챈 기홍은 서둘러 손에 대고 입김을 불어 주었다.
“날이 추운데 어찌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언니 보러 왔죠.”
백천범이 헤헤 웃으며 말했다.
“언니, 무슨 생각 중이었어요? 설마 낭군님을 떠올린 거예요?”
기홍과 녹하에게 아무런 거리낌 없이 대하던 백천범은 생각나는 대로 말했다.
평소 같았으면 그런 농담에 얼굴을 붉힐 기홍이지만, 오늘은 웬일인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그녀의 손만 비볐다.
“소인은 평생 왕비 마마를 모시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습니다. 소인이 저택을 나가면 누가 왕비 마마께 간식을 만들어 드린단 말입니까?”
백천범이 화들짝 놀랐다.
“언니, 저택을 떠날 거예요? 왜요?”
“너무 많은 걸 묻지 마시어요.”
기홍이 천천히 그녀의 손을 놓았다.
“이제 좀 따뜻해지셨지요? 오늘은 소인이 춘권을 만들어 드릴까요?”
지금의 백천범은 예전에 비해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고 해도 이런 상황에까지 먹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가 기홍의 팔뚝을 잡고 흔들었다.
“언니, 어서 말해 줘요. 어째서 저택을 나간다는 거예요? 저택을 나가서 무얼 하려고요? 다시 돌아올 거예요?”
그녀에게 기홍은 가족이나 마찬가지였다. 다들 그녀를 신경 쓰지도 않았을 때, 기홍만이 그녀에게 따뜻하게 대해 주었다.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 보여 준 기홍의 진심을 백천범은 평생 잊지 말자고 다짐했었다.
거의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백천범의 모습에 기홍이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왕비 마마, 소인은 이제 나이가 차서 저택을 나가야 합니다. 설마 왕비 마마께서는 소인이 평생 시집도 가지 않길 원하시는 것입니까?”
그런 이유였다니? 나이가 되어 출가하는 것은 좋은 일이었지만, 백천범은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안 그래도 며칠 동안 울적했는데, 기분이 더욱 가라앉은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리어 기홍이 그녀를 위로했다.
“소인도 계속 저택에 남고 싶습니다. 하지만 규율이 있지 않습니까. 총관리인 어르신을 난처하게 할 수는 없지요. 저의 집은 성 밖에 있으니 나중에 왕비 마마를 뵈러 오면 될 일입니다.”
“안 돼요.”
백천범이 울상을 지었다.
“언니가 가면 절 아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예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왕야께서 계시지 않습니까. 왕야께서는 왕비 마마를 가장 아껴 주시는 분이십니다. 소인이 왕비 마마께 해 드리는 것은 왕야께서 해 주시는 것의 절반도 되지 않는걸요. 소인이 떠나면 다른 사람이 소인의 자리를 메우겠지요. 새로 오는 아가씨도 분명 소인처럼 진심으로 왕비 마마를 모실 것입니다.”
기홍의 말에 백천범은 더욱더 슬퍼지고 말았다. 그녀가 기홍을 안았다.
“저는 언니가 좋아요. 언니는 제게 가족이나 마찬가지예요. 제가 왕야께 언니를 내보내지 말라고 청을 드려 볼게요.”
기홍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만약 왕야께서 허락하시면 소인도 저택을 떠나지 않고 평생 왕야와 왕비 마마의 시중을 들 것입니다.”
순간 수원상이 떠오른 백천범의 마음에 가시 하나가 꽂힌 듯했다. 그녀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언니가 이대로 사는 것도 싫어요. 언니도 언니의 부군과 아이가 있어야 하는걸요. 곁에 붙잡아 놓고 인생을 허비하게 할 수는 없어요.”
“소인은 시집을 가고 싶지 않습니다. 이렇게 왕야 곁에서 시중을 드는 일도 충분히 좋은걸요.”
백천범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이렇게 된 이상, 묵용감에게 기홍을 거두어 달라고 말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후원에 기홍을 들인다고 해도 수원상과 기홍밖에 없으니, 첩이 많은 편도 아니다. 게다가 묵용감도 기홍을 각별하게 여기는 만큼 아내로 삼으면 분명 아껴 주지 않을까.
그녀를 끔찍이 아끼는 만큼이나 기홍에게도 잘해 줄 터였… 잉? 마음이 왜 점점 더 괴로운 거지……? 기홍 언니가 저택을 떠나야 할지도 모르니까. 그래, 그래서 그런 게 분명했다.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