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9화
그녀가 자그마한 입으로 한바탕 쏘아붙이자 정말 이상하게도 묵용감의 화가 사그라들었다. 잔뜩 끼었던 먹구름이 물러나고 해가 고개를 내밀 때처럼 세상이 환하게 변한 기분이었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두 식구’니 ‘부부’니 하는 말을 썼다. 저자의 백성들이 흔히 쓰는 표현이었지만 그녀 입에서 흘러나오니 그렇게 듣기 좋을 수 없었다. 마치 천상의 곡조처럼 그의 귓가에 달콤하게 맴돌았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투계처럼 그를 무섭게 노려보고 있다. 이성을 되찾으니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는 것도 퍽 재미있었다. 그는 언제든 그녀의 모습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낼 수 있었다. 웃을 때, 웃지 않을 때, 밥 먹을 때, 조용히 있을 때, 잘 때 등등…….
화를 내는 모습마저 이렇게 사랑스럽다니! 그녀는 흠잡을 데 하나 없는,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사람이었다.
기분이 좋아진 그의 목소리가 저절로 온화해졌다.
“천범, 말다툼은 그만하는 게 좋겠소. 상관도 없는 사람 때문에 무엇 하러 다퉈야 한단 말이오? 곧 식사를 해야 하니 세수부터 하시오.”
백천범은 힘껏 콧방귀를 뀌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묵용감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따라나섰다.
문 앞에는 눈을 내리깔고 손을 떠는 가동이 서 있었다. 묵용감이 그를 슬쩍 쳐다보며 물었다.
“네가 알려 준 것이냐?”
가동이 털썩 꿇어앉으며 울상을 지었다.
“소인이 순간적으로 입을 잘못 놀렸습니다. 벌하여 주시옵소서, 왕야!”
“그리도 원하니 가서 채찍이나 맞고 오든지. 기억하거라. 화는 늘 입에서 나오는 것이다.”
“예, 왕야. 명심하겠습니다.”
가동이 자리에서 일어나 막 형방으로 가려는데 묵용감이 다시 입을 열었다.
“기다리거라. 내 우선은 기억해 둘 것이니 며칠 뒤에 받으러 가거라.”
놀란 가동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초왕의 벌에 외상 따위는 없는데…….
묵용감은 얼이 빠진 가동의 모습을 한심하다는 듯 쳐다봤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백천범이 보이지 않자 그가 발을 들어 올려 가동의 가슴팍을 힘껏 찼다.
“썩 꺼지거라, 이 불충한 놈 같으니!”
가동은 차마 신음도 내지 못하고 줄행랑을 쳤다. 그가 썩 꺼지라고 할 땐 재빨리 눈앞에서 사라져야 했다. 안 그랬다간 다시 그의 발에 걷어차일 게 뻔했다.
멀리 도망친 뒤에야 그는 초왕의 생각을 알아차렸다. 초왕은 지금 그를 벌했다가 이 사실을 왕비가 알까 걱정하고 있었다. 어쨌든 그는 왕비의 사부이니 앞으로 쉽게 벌을 내리진 못할 터였다. 금세 기분이 좋아진 가동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방으로 들어섰다.
* * *
백천범은 멀리 도망간 게 아니라 기홍의 방에 가 있었다. 탁자에 엎드린 그녀는 두 눈이 빨갛게 부은 채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옆에 있던 기홍이 그녀를 놀렸다.
“아이고, 이 새빨개진 눈 좀 보십시오. 꼭 토끼 같습니다. 토끼들과 지내시더니 이제 생김새까지 닮아 가시나 봅니다!”
백천범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폐가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사람을 그 지경으로 만들어 놓았는데 어찌 마음이 편할 수 있을까? 묵용감은 정말 미안한 마음이 조금도 없단 말인가?
서재 앞을 지키던 녹하는 두 사람이 다투는 소리를 토씨 하나 빠트리지 않고 전부 들었다. 녹하는 솔직한 성격인 데다 옳고 그름을 먼저 따졌기 때문에 기홍처럼 온화하게 말하지 않았다.
“우리 왕야께서는 성격이 참으로 좋으십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왕비 마마를 내버려 두시다니요!”
그녀의 말에 기분이 언짢아진 백천범이 고개를 들었다.
“녹하 언니, 말도 안 돼요. 왕야가 성격이 좋다니요? 성격이 좋은 사람이 그런 일을 저질러요?”
“무슨 일 말씀이십니까?”
녹하는 똑 부러지게 말했다.
“사 제독을 벌하신 일 말씀이신지요? 관가의 일은 소인도 잘 모릅니다. 하지만 파면을 했다 해도 관청에 남겨두시지 않으셨습니까? 왕야께서 관대하게 처리하신 거예요.
왕비 마마, 예전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지금은 왕야께서 모든 걸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왕비 마마를 정식 초왕비로 삼으시겠다고 말입니다. 외간 남자와 가깝게 지내지 않도록 주의하셔야 합니다. 마마께서는 혼인하신 분입니다. 사 제독의 일로는 안달을 내시면서, 왕야를 이리 생각하신 적은 있으십니까?
왕야의 마음이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자신의 아내가 늘 다른 사내를 생각하다니요! 어찌 괴로워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마마께서는 화가 나시면 왕야를 책망하시지요. 하면 왕야께서는 누구에게 화를 푸셔야 한답니까?”
녹하는 미간을 바짝 좁히며 말했다. 백천범은 놀란 듯 입을 떼지 못했다.
“왕야께서는 평범한 분이 아니십니다. 무려 친왕 초왕야이시지요. 존귀하고 권력이 막강한 분이 아닙니까. 그런 왕야께서 마마 때문에 고통을 삼키고 계시질 않습니까?
소인은 왕야 곁에서 제법 오래 시중을 들었습니다. 그동안 왕야께서는 늘 감정을 쉽게 드러내는 법이 없으셨습니다. 하지만 마마께만큼은 깊은 정을 감추지 않으시지요. 옆에서 보고 있으면 절로 부러워질 정도입니다.
왕야께서는 마마를 그토록 아껴 주시는데, 마마께서는요? 스스로에게 한번 물어보십시오, 마마의 마음은 어디를 향해 있습니까? 이보다 더 가슴 아픈 일이 세상 천지에 또 어디 있단 말입니까?”
백천범은 얼이 빠진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그녀의 말이 맞고 틀린 걸 떠나 듣는 내내 충격에 휩싸였다. 그간 그녀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던 문제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묵용감의 마음은 그녀에게 있어 유모의 사랑과도 같았다. 두 사람 다 그녀를 아끼고 돌봐 주었다. 때리고 혼내는 것도 그녀가 잘되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껏 묵용감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 적도 없었고, 그의 마음이 남녀 간의 정이라고 여겨 본 적도 없었다.
녹하의 꾸짖음에 어안이 벙벙해진 그녀는 한참 뒤에야 꾹 참고 있던 말을 내뱉었다.
“그래도 절 때려선 안 되잖아요.”
왕비의 피부는 아직 여려 상처가 나기 쉬웠다. 아무리 초왕이 화가 나도 왕비를 다치게 해선 안 될 일이었다. 기홍이 걱정스럽게 그녀를 살폈다.
“어디를 맞으셨습니까, 소인이 한번 보겠습니다.”
백천범은 조금 부끄러워져 목소리를 낮췄다.
“보지 마세요. 엉덩이를 때리셨으니까요.”
기홍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초왕도 왕비를 아직 어린아이라고 여기는 게 분명했다. 화가 난다고 왕비를 붙잡고 엉덩이를 때리다니.
엉덩이를 문지르던 백천범이 입을 쩍 벌렸다. 손을 대지 않으면 괜찮았지만 손이 닿으니 통증이 느껴졌다.
녹하가 재촉했다.
“얼른 보여 주셔요. 피가 맺히면 더 곤란해질 것입니다.”
백천범은 어쩔 수 없이 탁자 위에 엎드렸다. 치마를 들친 녹하는 상처가 심하지 않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기홍은 헉 소리를 내고 말았다. 새하얀 엉덩이에 난 손자국을 따라 시퍼런 멍이 들어 있었다. 멍 자국만으로도 묵용감이 얼마나 화가 났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기홍이 멍을 살피며 말했다.
“연고를 발라야지 안 되겠습니다. 그냥 두었다간 어혈이 생기겠습니다. 마마, 어서 침대에 가서 누우십시오. 소인이 연고를 찾아오겠습니다.”
기홍이 서둘러 묵용감의 방으로 들어가 자개장에서 연고를 꺼냈다. 그때, 갑자기 묵용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엇을 찾는 것이냐?”
깜짝 놀란 기홍이 고개를 들자 의자에 앉아 있는 묵용감의 모습이 보였다. 아무런 인기척도 없던 데다 마음이 급했던 나머지 경황이 없었다. 기홍이 우물쭈물 답했다.
“왕야, 방에 계셨군요.”
묵용감이 그녀의 손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물었다.
“무얼 꺼낸 것이더냐?”
“그것이, 지난번 황궁에서 내리신 옥고입니다.”
“옥고는 왜? 누가 다치기라도 한 것이냐?”
거짓을 고할 수 없던 기홍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 그것이 왕비 마마께서…….”
묵용감이 튀어 오르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기홍의 손에 있던 연고를 뺏어 들고 성큼성큼 밖으로 향했다.
“왕비가 어쩌다 다쳤단 말이냐, 언제? 대체 왕비를 어찌 돌본 것이냐?”
기홍은 어떻게 얘기해야 할지 몰라 입을 꾹 다물고 그의 뒤를 따라갔다.
기홍의 방으로 들어가니 녹하가 침대 옆에 서 있었다. 서둘러 침대 앞으로 다가가 장막을 걷어 올린 그는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저 시퍼런 손자국은 그가 한 짓이 아닌가?
순간 심장을 칼로 베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는 당장이라도 자신의 뺨을 힘껏 갈기고 싶었다. 세상에, 인정머리도 없이 이리 험하게 손을 대다니!
그는 조용히 침대 옆에 앉았다. 백천범은 엉덩이를 드러내 부끄러웠는지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누워 있었다. 묵용감은 연고를 손에 덜어 멍 위에 발랐다. 조금만 힘을 줘도 찢어지는 얇은 금박을 다루듯이 세심하고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부드러운 손길이 간지러웠는지 백천범이 몸을 꿈틀거렸다.
“언니, 약을 왜 이렇게 간지럽게 바르는 거예요.”
묵용감은 그저 묵묵히 약을 발랐다.
곧 백천범은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는지 고개를 돌렸다. 그의 모습을 확인한 그녀가 본능적으로 이불을 끌어 올려 몸을 꼭꼭 덮었다. 이불 아래에서 덜덜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와, 왕야, 여기는 어떻게, 오, 오신 거예요? 기홍 언니는, 어디 가고, 왜 왕야께서 약을 바르시는 거예요?”
“움직이지 마시오. 약이 이불에 다 묻겠소.”
묵용감이 이불을 붙잡은 그녀의 손을 떼어 냈다.
“잠시 누워 약을 말리고 일어나시오.”
백천범은 새빨개진 얼굴로 꾸물거리며 답했다.
“저는 아가씨라고요. 이러시면 곤란해요, 왕야.”
묵용감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대는 내 부인이오. 어찌 그리 기억을 못 하는 것이오.”
녹하가 해 준 말이 떠올라 백천범은 화를 내지 않았다. 사실 그녀는 묵용감과 더 가까운 사이였다. 사장풍이 파면되었다는 말에 죄책감이 들어 초왕을 원망하긴 했지만 가동의 말도 틀리지 않았다.
사장풍은 스스로 일을 그르쳤으니 그녀가 안타까운 시선으로만 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만약 그녀가 사장풍을 택했다면 묵용감은 절대 사장풍처럼 행동하지 않았을 것이다.
“저는 부인을 해 본 적이 없으니까 아직 적응이 안 되는걸요.”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뭐든지 다 과정이 있는 법이잖아요. 앞으로는 기억할게요.”
순순히 따르는 그녀의 모습이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묵용감이 허리를 숙이고 그녀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아직도 아프오? 내 잘못이오. 걱정하지 마시오. 앞으로 이런 일은 절대 없을 테니.”
“하나도 안 아파요. 언니가 너무 놀란 것뿐이에요. 엉덩이는 원래 때리라고 있는 거예요. 안 그러면 뭣 하러 붙어 있겠어요.”
그녀의 논리는 늘 신기하면서도 우스웠다. 그가 그녀의 이마에 얼굴을 대고 조용히 물었다.
“왜 그리 생각하오?”
“벌을 받을 때 채찍이든 곤장이든 다 엉덩이를 맞잖아요. 어릴 때 하인들이 매 맞는 걸 봤는데 하나같이 엉덩이를 맞던걸요. 그러니까 맞으려고 있는 거 아니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