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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208)화 (207/1,192)

제208화

백천범은 소매와 옷깃에 얇은 털을 두른 갖옷에 미색의 겹치마를 입었다. 그녀는 손에 토끼를 담은 바구니를 들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길목에 서 있었다. 왠지 잔뜩 기대에 찬 모습이었다.

묵용감이 반월문에 들어서자 서로를 발견한 두 사람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한 사람의 미소는 한 떨기 고운 꽃 같았고, 다른 한 사람은 봄볕에 막 녹기 시작한 호수 같았다.

“날 기다렸소?”

그녀의 손을 잡은 그는 맞잡은 손에서 냉기가 전해지자 눈썹을 찌푸렸다. 반대편을 바라보니 토끼 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결국 그는 화를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다들 정신이 나갔단 말이냐? 이렇게 추운 날 왕비에게 이런 걸 들고 있으라고 하다니!”

그의 분노에 시녀와 하인들은 곧장 무릎을 꿇었다. 월규는 바구니를 넘겨받은 뒤에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백천범이 떨떠름하게 말했다.

“왕야, 이렇게 하시는 법이 어디 있어요. 까닭도 없이 화를 내셔서 다들 깜짝 놀랐잖아요. 어서 일어나.”

그녀의 말에 감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하인은 아무도 없었다. 묵용감이 또다시 호통쳤다.

“다들 귀가 먹었느냐, 왕비의 말이 안 들리는 것이냐?”

무릎을 꿇었던 하인들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묵용감은 그들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백천범의 손을 꼭 감싸 쥐었다.

“날이 추울 땐 방 안에서 기다려도 되오. 무엇 하러 이리 밖에 나와 있단 말이오?”

“왕야, 이것 좀 보세요.”

백천범이 그의 앞에 다시 토끼 바구니를 가져왔다.

“설구의 배 좀 보세요. 아기가 있는 것 같아요.”

묵용감이 유심히 설구를 바라보았다. 이미 많이 큰 데다 백천범이 잘 먹인 덕에 공처럼 살이 올라 있었다. 배가 둥글둥글하긴 했지만 살인지 임신인지 알 길이 없었다.

군대를 배치하는 문제라면 전문가인 그가 충분히 답해 줄 수 있었겠지만 토끼의 임신 여부를 물어오자 그는 당혹스러워했다.

그때, 학평관이 다가와 의견을 내놓았다.

“이런 일은 앞뜰 마구간 영감이 전문입니다. 잠시 와서 확인해 보라고 할까요?”

묵용감은 짤막하게 그러라고 답한 뒤, 백천범을 끌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곤 기홍에게 따뜻한 물을 가져와 그녀의 손을 씻어 주라고 분부했다.

“날마다 토끼와 어울려 지내는 것은 좋지 않소. 손을 깨끗하게 씻고 나면 만지지 마시오. 굳이 손을 대야 하거든 시녀들을 불러 분부하시오.”

백천범은 소매를 접고 손을 씻으며 투덜거렸다.

“제 손으로 직접 만져야 즐겁죠. 왕야는 이런 걸 모르신다니까요.”

그가 어찌 모를 수 있을까, 그 역시 그녀를 날마다 만지고 싶은 것을. 아쉽게도 그녀는 손만 닿으면 도망가 버렸다. 조금 심하게 장난을 칠 땐 눈물을 흘리며 그를 난감하게 만들곤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구간 영감이 도착했다. 영감은 설구의 배를 만지작거리더니 이내 활짝 웃으며 묵용감에게 고했다.

“왕야께 아룁니다. 새끼를 밴 게 맞습니다. 수도 많은 것 같습니다.”

백천범은 묵용감 옆에 바짝 붙어서 신기해하고 있었다.

“만지기만 해도 바로 알아맞히시다니, 정말 신기하네요.”

영감은 허허 웃으며 허리를 숙인 채 답했다.

“그간 봐 온 일이 많아 쉽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백천범이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럼 언제 새끼를 낳는 거예요?”

영감이 토끼를 다시 자세히 살펴보았다.

“열흘 뒤면 낳을 듯합니다. 지금은 날이 추워져 토끼가 병을 얻기 쉽습니다. 왕비 마마께서 시녀들에게 잘 보살피라 분부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안 그랬다간 낳자마자 얼어 죽을 것입니다.”

“알겠어요.”

백천범이 눈을 반짝이며 설구의 배를 바라보았다. 꼭 금광이라도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학평관은 영감에게 토끼 키우는 법을 자세히 묻고는 꼼꼼히 외워 두었다. 왕비가 아끼는 토끼라 학평관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토끼 사육을 전담할 시녀 두 명을 골라 무슨 일이든 곧바로 보고해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묵용감은 백천범에게 그만 방으로 들어가자 했지만, 그녀는 쪼그려 앉아 설구만 바라보았다. 당장이라도 설구가 새끼를 낳을 것 같다고 여기는 듯했다.

처리해야 할 정무가 있는 묵용감은 결국 홀로 방 안에 들어갔다.

임신을 한 탓에 설구는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백천범은 결국 흥미를 잃고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가동이 풀이 죽은 얼굴로 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걱정이 가득한 그의 얼굴에 백천범은 깜짝 놀랐다. 평소와 달라도 너무 다르지 않은가. 그녀가 곧장 그에게 물었다.

“사부님, 안 좋은 일이라도 있어요?”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백천범의 얼굴을 보니 또다시 사장풍이 떠오른 가동은 탄식을 내뱉었다.

백천범은 가동을 존경하는 제자였다. 사부에게 어려운 일이 생겼는데 제자인 그녀가 모른 척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사부님, 대체 무슨 일이에요. 얘기해 보세요. 제가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별일 아닙니다.”

말로는 별일 아니라고 했지만 표정은 씁쓸하기 짝이 없었다.

“사부님, 이 제자를 얕보시는 거예요?”

백천범이 자그마한 얼굴을 치켜들고 뽐내듯 웃었다.

“잊지 마세요. 저는 이제 진정한 초왕비라고요. 말해 보세요. 돈이 필요한 거예요? 아니면 색시? 이 제자가 전부 다 구해 줄게요.”

가동이 결국 미소를 지었다.

“왕비 마마, 정말 자신만만한 말투이십니다. 마마께서 구해 주실 필요는 없고 그저 왕야께 몇 마디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 애…….”

순간적으로 말이 튀어나왔지만 그는 곧장 말을 멈췄다.

그가 이럴수록 백천범은 더 의심스럽기만 했다.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다. 결국 가동은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제야 상황을 깨달은 백천범이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제가 그렇게 한 거예요. 제가 사 제독님을 그렇게 만든 거예요.”

“왕비 마마 탓이 아닙니다. 그 애가 자초한 일입니다.”

가동이 서둘러 덧붙였다.

“그 애가 스스로를 망친 것입니다. 왕비 마마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습니다. 부디 마음에 담아 두지 마시고 모르는 일처럼 여기십시오.”

그러나 이미 알게 된 일을 모른 척할 수 있을까. 백천범의 고운 눈썹이 일그러졌다.

“그건 안 돼요. 제가 가서 만나 봐야겠어요.”

깜짝 놀란 가동이 황급히 그녀를 막아섰다.

“왕비 마마, 제발, 어리석은 일은 하지 마시옵소서. 왕야께서 저택에 계시지 않습니까? 제가 이 소식을 흘렸단 사실을 아시면 분명 제 목을 치실 것입니다.”

가동의 말은 오히려 백천범을 더 화나게 했다.

“대체 왕야께서는 왜 사 제독님을 강등하신 거예요? 쉽게 용서할 수 있는 일이잖아요. 따지고 보면 왕야께서 이 일의 원흉인데!”

그녀는 황급히 서재로 향했다.

가동이 서둘러 그녀를 막아서려 했지만 어찌나 빠른지, 그녀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가동은 문 앞에 서서 긴 한숨을 내쉬었다. 참 잘된 일이다. 이제는 그까지 묶여 혼쭐 날 일만 남았다.

방으로 들어선 백천범은 묵용감에게 정면으로 다가가 물었다.

“왕야, 왜 사 제독님을 강등하신 거예요? 왕야께서는 아무런 죄책감도 없으신 거예요? 왜 안 그래도 힘든 사람한테 돌을 던지시는 거예요?”

묵용감은 안으로 들어온 그녀에게 미소를 짓다가 이내 미간을 좁혔다. 설마 그녀가 이 일을 꺼낼 줄이야.

“누가 그러오?”

“제가 누구한테 들었든 사실이잖아요!”

자그마한 얼굴을 잔뜩 굳힌 게 그의 잘못을 단단히 따져 물을 기세였다.

황제를 제외하고 그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묵용감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녀의 태도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사장풍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마음은 아직도 그를 향해 있는 것일까?

결국 격노한 묵용감이 언성을 높였다.

“무엄하오! 대장부들의 일을 따져 물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오?”

“다른 이의 일이면 몰라도 사 제독님의 일은 꼭 물어봐야겠어요!”

백천범은 한 마리 투계처럼 고개를 빳빳이 세운 채 소리를 질렀다.

기가 찬 묵용감은 그녀를 제 다리 사이에 끼운 뒤 손을 내리쳤다. 화가 치밀어 오르긴 했지만 차마 그녀를 아프게 할 수 없었던 그는 손에 힘을 거의 싣지 않았다. 하지만 백천범에게는 그조차도 아프게만 느껴졌다. 찰싹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지자 그녀의 입이 절로 벌어졌다. 그녀는 이제 더 거리낄 것 없이 소리쳤다.

“때리세요, 맞아 죽으면 그만이죠!”

그녀의 말이 묵용감의 가슴을 마구 뒤틀어 놓았다. 분노가 폭발할 것 같았지만, 그는 손을 내려놓았다. 그녀의 몸에 손을 대 봤자 정말 고통을 받는 쪽은 그였다.

그가 그녀를 밀어내며 말했다.

“처소로 돌아가 지아비가 누구인지 잘 생각해 보시오. 제대로 생각하지 않으면 밥은 없소!”

“걸핏하면 밥을 안 준다고 하시고, 고작 이 정도밖에 안 되는 분이셨군요!”

백천범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지만 고집을 꺾을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대장부라면서 도량은 바늘귀보다도 작으시네요. 사 제독님이 왜 저를 좋아하게 되었는데요? 왕야께서 오해하게 만드셨기 때문이잖아요? 사 제독님이 이 꼴이 되었는데 도와주진 못할망정 돌을 던지시다니요. 왕야는 정말 비열한 사람이에요!”

이젠 하다 하다 그에게 욕까지 퍼붓는다. 묵용감은 몇 차례 심호흡을 했다. 이렇게까지 그의 화를 돋운 사람은 없었다. 절로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그의 총애만 믿고 이리 방자하게 굴다니! 오늘은 이렇게 욕을 퍼붓지만 다음엔 그에게 손을 휘두를지도 몰랐다.

그도 화나긴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도 그녀는 그자를 잊지 못했다. 묵용감은 그만 울적해졌다. 그는 그녀에게 조금도 성가시게 구는 법이 없었는데, 그녀는 이렇게 자신에게 시비를 걸었다. 나쁜 계집 같으니! 왜 그녀만 그의 무서움을 모르는 걸까?

그는 도리어 차가운 웃음을 보였다.

“그래, 좋소. 아주 맞는 말이오. 감히 조정의 친왕에게 욕설을 퍼붓다니. 본인의 목에 머리가 몇 개나 달려 있는지 잘 생각해 보시오.”

눈물이 곧 흘러넘칠 것 같아 백천범은 소매로 얼굴을 힘껏 닦은 뒤, 코를 한번 훌쩍였다. 이내 그녀는 자그마한 얼굴에 사나운 표정을 짓고 잔뜩 날을 세웠다.

“우스운 말씀 마세요. 왕야께서는 친왕이시지만 저도 친왕비예요. 두 식구가 싸우는데 욕도 할 수 없다니요. 한번 황제 폐하께 가서 말씀해 보세요. 폐하께서 부부끼리 말싸움한 것까지 신경 쓰시나 볼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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