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7화
황제가 또다시 화를 내며 그에게 삿대질을 했다.
“보시오. 고집불통이 따로 없질 않소. 내버려 두시오. 생각이 바뀐 다음에 일어나라고 하시오!”
황후가 어쩔 수 없이 묵용감을 타일렀다.
“셋째께서도 너무 하십니다. 수 아가씨가 대체 어디가 부족해서 헤어지겠단 것인지요? 대학사 수민이 화가 잔뜩 나서 폐하께 고했습니다. 폐하께서도 아주 난감하셨지요. 대학사는 명망 높은 조정 원로인 데다 조정 관리 대부분이 그의 제자입니다.
만약 이번 일을 문제 삼는다면 조정 문무백관이 전부 그의 편에 설 것입니다. 그땐 관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다 못해 다들 셋째를 해치려 들 것입니다.
폐하께서 셋째를 타이르는 것도 다 셋째를 위해서 그러시는 것입니다. 이 일은 시일을 두고 생각해 보는 게 어떨는지요. 수 아가씨도 죽기 전에는 저택을 나갈 수 없다고 했다면서요. 정말 그렇게 되면 만백성의 눈과 귀를 막지 못할 것입니다!”
황후가 간곡하게 말했다. 그녀의 말은 한마디도 틀린 게 없었지만 묵용감은 그녀의 말에서 황제의 속내를 파악할 단서를 찾을 수 있었다. 대학사 수민은 문관의 권위자였기 때문에 다들 그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그가 조정을 떠나면 황제 곁에 유능한 인재가 없어지니 그야말로 조정의 큰 폐단이었다.
황제의 권력 중 병권은 그가, 정권은 수민과 백 승상이 쥐고 있었다. 황제가 어진 정치를 펼칠 수 있는 것도 그들 덕분이었다. 후궁의 비빈들도 모자라 그의 세 왕비의 자리조차 조정 대신들의 딸이 차지하고 있을 정도였다. 사소한 일도 조정의 국면에 영향을 주는 법인데, 대신들을 의지해 자리를 지켜야 하는 황제도 분명 그만의 고충이 있을 것이었다.
묵용감이 한숨을 내쉬었다. 계속 이렇게 대치하고 있을 수 없다는 것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황후의 말에 대답했다.
“황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어찌 듣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 일은 시일을 두고 천천히 생각해 보겠습니다.”
황후가 슬그머니 그를 일으켰다.
“어서 일어나시지요. 부디 폐하를 원망하지 마십시오. 폐하께서도 아주 난처한 상황이십니다.”
“알고 있습니다.”
묵용감이 황제에게 예를 갖춰 인사했다.
“다 제 잘못입니다. 부디 노여움을 푸시옵소서, 폐하. 오늘은 이만 물러가 깊이 반성하겠습니다.”
황제는 코웃음만 칠뿐 그의 말을 무시했다.
황후가 묵용감에게 눈짓을 보내자 묵용감이 서둘러 밖으로 향했다. 황후는 고개를 저은 뒤 황제에게 다가가 그의 팔을 끌어당기며 온화하게 말했다.
“폐하, 노여움을 푸십시오. 셋째는 지금 잠시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일 뿐, 머지않아 전부 이해할 것입니다.”
황제가 탄식했다.
“짐은 그 애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소. 그리도 명석한 아이가 어찌 이리 어리석게 군단 말이오. 수민의 딸을 폐위하면 우리 가문의 사직이 흔들리거늘, 대체 짐을 생각하는 마음이 있긴 하냔 말이오!”
* * *
묵용감이 서쪽 문을 통해 밖으로 나오자마자 누군가 그에게 인사를 올렸다.
“왕야.”
자세히 바라보니 독찰원의 이李 독사督使였다. 묵용감이 담담히 물었다.
“본왕에게 할 말이 있느냐?”
“예, 예.”
이 독사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굽실거렸다.
“소관, 왕야께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이 독사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묵용감도 알고 있었다. 그는 뒷짐을 지고 천천히 가동과 영구를 향해 걸어갔다.
“사 제독에 관한 일이더냐?”
“아이고, 왕야께서는 참으로 비범한 분이시라니까요.”
이 독사는 얼굴이 다 찌푸려질 만큼 알랑거리며 웃었다.
“실은 사 제독이 요즘 좀 이상합니다. 닷새 중 사흘은 술에 취해 있습니다. 임안성은 황제 폐하께서 계신 곳인지라 사람도 많고, 지켜보는 눈도 많지요. 다들 어찌나 사 제독에 대해 보고를 하는지… 소관도 왕야를 찾아뵙는 것 말고는 도리가 없었습니다.
왕야께서 사 제독과 친분이 있으시다는 것은 소관도 잘 알고 있사옵니다. 하여 어찌해야 할지 의견을 여쭙고자 찾아온 것입니다.”
묵용감의 안색이 살짝 어두워졌다.
“본왕이 사 제독과 친분이 있는 걸 네가 직접 보았느냐?”
이 독사의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설마 그가 잘못 알고 있었단 말인가? 며칠 전만 해도 사 제독은 초왕의 초대를 받아 저택에서 술을 마시지 않았는가?
“소관이 경솔했사옵니다. 소관은 그저…….”
묵용감이 소매를 뿌리치며 말에 훌쩍 올라탔다.
“본왕이 가서 직접 살펴보고 처분을 내리겠다.”
“예, 예, 예.”
이 독사는 이마가 땅에 닿을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초왕을 마주할 때면 목숨을 걸고 외줄 타기를 하듯 위험천만한 기분이 들었다.
묵용감은 말을 몰고 순포 오영관청으로 향했다. 하지만 사장풍은 보이지 않았다. 묵용감을 발견한 공춘홍이 급히 다가와 예를 갖췄다.
“왕야께서 오신 줄도 모르고 소인이…….”
묵용감이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입을 열었다.
“사장풍은?”
“제독 나리께서는, 그러니까, 뒤뜰에 계십니다.”
묵용감은 몸을 돌려 뒤뜰로 향했다. 측문으로 돌아 뒤뜰에 다다르니 여러 채의 방이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뒤따라오던 공춘홍이 길을 안내하며 큰소리로 외쳤다.
“제독 나리, 초왕야께서 오셨습니다!”
하지만 방 안에서는 아무런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묵용감이 발로 문을 걷어차자 의자에 기대어 늘어진 사장풍의 모습이 보였다. 손에는 술병까지 쥐고 있었다.
공춘홍도 안타까워하며 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마시고도 모자라 또 마시고 있다니! 공춘홍이 황급히 그의 곁으로 다가가 술병을 빼앗고 조용히 일렀다.
“제독 나리, 초왕야께서 오셨습니다.”
사장풍은 취기가 오른 눈을 반쯤 뜨고 묵용감을 위아래로 훑었다. 경멸이 담긴 눈빛이었다. 이내 그가 휘청거리며 일어나더니 두 손을 맞잡고 인사를 올렸다.
“왕야께서 소인의 우스운 꼴을 구경하러 오셨군요? 하하, 제 부인을…….”
그는 뒷말을 내뱉지 못했다. 묵용감이 그의 가슴팍을 걷어차며 호통을 쳤다.
“뻔뻔한 놈,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것이냐?”
사장풍은 그대로 땅에 고꾸라졌다. 발에 걷어차이자 정신이 조금 돌아왔다. 공춘홍이 곁에 있는 걸 발견한 그는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다. 그는 자포자기한 상태라 상관없었지만 백천범의 명예까지 헐뜯을 수는 없었다.
묵용감이 손을 내저어 공춘홍을 밖으로 내보냈다. 이미 사장풍에게 이 일을 들은 적 있던 공춘홍은 증표까지 확인했음에도 믿지 않았다. 하지만 초왕이 직접 찾아온 데다 사장풍이 초왕 앞에서도 저리 포악하게 구는 걸 보면 그의 말이 진실인지도 몰랐다. 사장풍의 뒷말을 듣지 못한 게 안타까울 뿐이었다.
두 사람의 이야기가 궁금했던 그는 방을 나오자마자 문에 귀를 대었다. 그때 등 뒤에서 작게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보니 나무 밑에 가동과 영구가 서 있었다. 호기심에 정신이 팔려 잠시 두 호위 무사를 깜빡 잊고 있었다. 그가 멋쩍게 웃으며 손으로 문을 가볍게 훑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먼지가 묻어 있기에 문의 칠이 벗겨진 줄 알고 다시 옻칠을 해야겠다 생각하던 참입니다.”
가동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대단하십니다. 귀로도 보실 수 있으시다니요.”
공춘홍이 겸연쩍게 웃었다.
“저는 할 일이 남아 있어 이만 앞뜰로 가 보겠습니다. 혹 왕야께서 다른 분부를 내리시거든 두 나리께서 절 불러 주십시오. 곧장 달려오겠습니다.”
그는 몸을 돌려 앞뜰로 뛰어갔다.
한편, 사장풍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묵용감이 있는 힘껏 걷어찬 탓에 목에서 피비린내가 올라왔다. 그가 힘겹게 피를 삼키며 말했다.
“후환을 없애려고 절 때려죽이시려는 것입니까?”
묵용감이 냉랭하게 웃었다.
“거울도 보지 않는가. 네까짓 게 후환? 내 아내는 너처럼 형편없는 놈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을 것이다.”
사장풍은 탁자를 짚고 자리에 앉아 소매로 얼굴을 닦았다.
“이런 모습을 보셨으니 왕야께서도 참 통쾌하시겠습니다.”
“그래. 아주 통쾌하구나. 이리 책임감 없는 사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단 말이냐? 왕비의 안목이 뛰어나 널 고르지 않은 것뿐이다.”
서릿발같은 말이 사장풍의 마음을 세차게 내려쳤다. 억눌렀던 분노가 한꺼번에 터져 나온 사장풍은 탁자를 내리치며 묵용감을 노려보았다. 두 손은 있는 힘껏 주먹을 쥐고 있었다.
“왜, 본왕을 치려고?”
묵용감은 경멸에 찬 조소를 흘렸다.
“한 달 정도 침대에 누워 있고 싶은 거라면야, 얼마든지. 한데 참 기이하구나. 사장풍, 내 아내와 몇 번 만난 적도 없으면서 어찌 감정이 깊어진 것이냐? 일부러 나와 맞서려고 벌이는 짓은 아니겠지?”
사장풍은 묵묵히 사나운 눈초리로 묵용감을 바라보았다.
묵용감은 또다시 웃었다.
“본왕은 네게 통보를 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다. 비단처럼 훤히 빛나던 앞길은 이젠 끝이라고 말이다. 누군가 널 독찰원에 고발했고, 이 독사가 어찌하는 게 좋겠냐며 본왕을 찾아왔다. 만약 그자가 황제 폐하를 알현했다면 더 큰 일이 났겠지. 사내란 놈이 고작 사소한 오해 때문에 이런 꼴이라니, 입에 담기에 창피하지도 않단 말이냐?
키는 칠 척이나 되는 놈이 좌절 좀 겪었다고 이리 구렁텅이에 빠져 살다니. 그럴 바엔 저자에 나가 거지로 사는 게 더 나을 것이다. 본왕은 널 궁지에 몰아넣진 않겠지만 사사로운 정에 법을 어길 수도 없다. 어쨌든 제독의 자리는 맡을 수 없게 되었으니 네 살길은 알아서 찾거라.”
말을 마친 그는 사장풍의 눈도 마주치지 않고 그대로 밖으로 나왔다. 이제 막 도착한 이 독사가 문 앞에 서 있었다. 묵용감이 이 독사에게 말했다.
“사소한 일은 본왕이 처리하면 되니 일일이 황제 폐하께 고할 것 없다. 사장풍은 구문제독의 직위를 박탈하고 순포로 강등한다. 만일 같은 죄를 또다시 저지르거든 군의 기강 확립을 위해 서른 대의 매질 후 변방 군졸로 보낼 것이다.”
이 독사는 굽실거리며 연거푸 대답을 올렸다. 그의 처벌은 심하지도, 그렇다고 약하지도 않았다. 그의 위상에 걸맞은 공정한 처분이었다.
한쪽에 서 있던 가동은 긴 탄식을 내뱉었다. 결국 이는 초왕의 아내를 빼앗으려 한 자의 처참한 말로인 셈이었다……. 가여운 사장풍, 앞길이 탄탄대로였던 젊은 인재가 순포로 강등되다니. 그의 어머니가 이 소식을 들으면 분명 대성통곡을 할 터였다.
사장풍과 고향 친구인 가동은 그의 분노 또한 이해할 수 있었다. 분명 초왕이 말을 번복한 것인데, 사장풍만 관직에서 강등되며 크게 피해를 봤다.
돌이켜 보면 사장풍의 행동도 한심하긴 마찬가지였다. 세상의 절반이 여인인데 기어이 한 나무에만 매달려 이런 꼴을 자초하다니! 상대는 다른 이도 아니고 군신 초왕이었다. 감히 군신의 아내를 탐하다니, 목이 날아가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