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6화
슬쩍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가니 물소리가 났다. 백천범은 뜻밖에도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곡조가 하나도 맞지 않았지만 목소리만큼은 청아했다.
“낭군님이 십 리 길을 떠나시네. 비탈길을 따라 배웅한다네. 한걸음에 세 번씩 돌아보시는 낭군님. 처량한 마음에 소매만 흔드네. 가슴에는 눈물이 차오르네. 나의 낭군, 나의 낭군…….”
분명 슬픈 곡조였지만 그녀가 부르니 왠지 흥이 묻어났다. 끝음절을 길게 끄는 게 낭군의 십 리 길을 배웅하는 어린 부인이 독창하는 것처럼 들렸다. 묵용감은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는 그녀를 깜짝 놀라게 하려고 조용히 그녀 뒤로 다가가 허리를 굽혔다. 그때 그녀가 말했다.
“마침 잘 왔어. 나 등 좀 긁어줘, 간지러워.”
그녀가 물속에서 일어나 등을 내보였다. 희미하게 그려지는 곡선이 눈에 띄었다. 설익은 듯 풋풋한 모습은 정말이지 색다른 아름다움이었다.
바짝 마른 묵용감은 입안이 바짝 마르는 걸 느끼며 매끄러운 피부에 조심스레 손을 가져갔다.
“이곳이 가렵소?”
사내의 목소리에 깜짝 놀란 백천범은 곧바로 물속으로 들어가 몸을 숨겼다. 고개를 돌려 그의 모습을 확인한 그녀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물 밖으로 나오던 그녀는 이 또한 맞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가슴을 감싸 안고 다시 물속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오르락내리락하는 사이 설익은 과실 같던 것은 새끼 비둘기로 변하기라도 한 듯 당장 날아오를 기세로 파닥거렸다.
그 순간, 묵용감은 자신의 마음을 단단히 옥죄던 나사가 풀리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그가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천범…….”
그의 모습에 더 깜짝 놀란 백천범이 몸을 잔뜩 웅크렸다. 부끄러움이 어느새 화로 변한 듯 그녀가 미간을 찌푸렸다.
“왕야, 어떻게 다 큰 아가씨가 목욕하는 걸 보실 수 있어요! 빨리 나가세요!”
그녀의 말에 묵용감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는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쓰며 태연한 척 물었다.
“왜 못 본다는 것이오?”
그녀가 당차게 말했다.
“사내가 아가씨의 목욕 장면을 보다니요? 소문이라도 나면 제 체면은 땅에 고꾸라질 거라고요!”
그도 당당하게 말하긴 마찬가지였다.
“당신은 내 아내인데 당연히 볼 수 있지.”
백천범은 할 말을 잃었다. 늘 이렇다. 그가 일깨워 주어야 그녀는 자신의 신분을 떠올리곤 했다. 그녀는 그의 아내였다. 그가 그것만 하지 않으면 다른 건 상관없다고 하긴 했지만 이렇게 발가벗은 몸을 보이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다.
어릴 때야 스스로를 아이라고 여겼으니 그리 부끄럽지 않았지만, 지금은 머리도 올렸고 달거리까지 시작한 몸이다. 조금 어리긴 해도 엄연히 누군가의 부인이었다. 지아비와 함께 지내려면 이런 일도 익숙해져야만 하는 것일까?
머릿속이 복잡해진 그녀는 물속에서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왕야, 왕야와 저는 공평해야 해요. 왕야께서 절 보셨으면 저도 왕야를 한 번 봐야죠. 그렇지만 그렇게 하다간 끝이 없을 테니 여기서 그만두는 게 좋겠어요.”
“왕비 말이 맞소. 지난번에도 서로 공평하게 한 번씩 봤지. 오늘 내가 왕비의 몸을 보았으니 나도 보여 주겠소.”
묵용감이 손을 들어 도포의 매듭을 풀기 시작했다.
이건 더 안 될 일이었다. 벌거벗은 채 서로 마주하다니! 설마 그것이라도 하려는 것인가? 그녀는 단번에 기분이 나빠졌다.
그녀는 백 승상의 집에서 둘째 오빠가 시녀와 기괴한 짓을 하는 걸 몰래 본 적 있었다. 다리를 다 드러내 놓고 찰싹찰싹 부딪히자 그 시녀는 눈을 희번덕거리며 소리를 질렀다. 그 광경이 어린 백천범에게 어찌나 무시무시하던지… 그녀는 절대 그 시녀처럼 되고 싶지 않았다!
“왕야, 얼른 안 나가시면 사람을 부를 거예요!”
“부르시오. 감히 누가 들어올 수 있나 보겠소.”
묵용감이 옥대를 풀자 도포가 양쪽으로 갈라지면서 안에 입고 있던 중의가 드러났다.
백천범은 어쩔 수 없이 바가지에 물을 담아 힘껏 그에게 뿌렸다.
“이래도 안 가실 거예요? 안 가시면 물에 흠뻑 젖은 생쥐가 되실 거라고요!”
그녀의 행동을 예상치 못했던 묵용감은 정면으로 물을 맞았다. 그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본왕은 그저 장난을 치려던 것이었는데, 잘되었군. 벗고 싶지 않아도 이젠 옷이 다 젖어 벗을 수밖에 없겠소.”
백천범은 자신의 행동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그녀가 어깨를 들썩이더니 곧 흐느끼기 시작했다.
“왕야, 이러지 마세요. 너무 무서워요…….”
그녀의 눈물 앞에선 그도 어쩔 수 없었다. 그의 마음에 이는 불씨가 아무리 몸집을 키운들, 그녀가 눈물을 흘리면 곧바로 식혀야 했다. 물벼락을 맞아 온몸이 축축했지만 그는 서둘러 그녀를 달랬다.
“그저 왕비에게 장난을 친 것뿐이오. 찬기가 들 수 있으니 너무 오래 씻지 마시오. 월규와 월향에게 그만 옷을 입히라고 분부하겠소.”
* * *
매일 조회를 마치면 묵용감은 서둘러 집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오늘은 황제가 그를 부른 탓에 함께 남서방으로 향했다.
황제의 안색이 심상치 않기에 묵용감은 가슴이 철렁했다. 차를 한 모금 들이켠 그가 조심스레 황제에게 물었다.
“폐하, 무슨 일로 이리 부르신 것인지요?”
황제가 시선을 올려 그를 바라보았다.
“아무 일 없으면 이리 부르지도 못하는 것이냐?”
“물론 아닙니다.”
묵용감이 뻔뻔하게 말을 이었다.
“다만 폐하께서는 정사를 돌보시느라 다망하시니 혹여 이 아우가 폐하께 폐를 끼칠까 걱정이 될 뿐이옵니다. 아무 일 없으시다면 저는 이만…….”
“그리 조급하게 굴지 말거라.”
찻잔을 내려놓은 황제가 그를 매섭게 쳐다보았다.
“수민의 딸을 폐위하려 했다는 게 사실이냐?”
황제의 단도직입적인 말에 묵용감은 조금 놀랐다.
“폐하, 무슨 연유로 이 일을 물으시는 것입니까?”
“대답만 하거라. 사실이냐?”
황제가 알게 된 이상, 묵용감도 굳이 숨길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폐위하려던 게 아니라 이혼을 하려던 것입니다.”
“어째서? 대체 무엇이 부족하길래?”
“전 측왕비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저택에 계속 남아 있는 것은 측왕비의 청춘을 버리는 일입니다. 그럴 바에는 측왕비에게 살길을 마련해 주는 게 더 낫질 않습니까?”
“짐의 후궁은 삼천 명쯤 될 것이다. 그들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짐도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그들을 모조리 폐위할 수 있겠느냐?”
“폐하께서는 황제이십니다. 대를 잇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니 후궁이 필요하지요.”
“국가와 집안은 결국 같다. 국가에 왕위를 계승할 사람이 필요하듯 집안에도 제사를 이을 사람이 필요하지. 너에게도 그 책임이 있다.”
“저는 그저 아이 몇 명으로 족합니다. 그리 많이 두고 싶지 않습니다.”
“그 자식을 누가 낳아 주는데? 왕비가?”
“왕비는 제 정실이니 제 아이를 낳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두 형제는 첨예하게 대립하며 누구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다 황제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백 승상의 딸을 그리도 좋아하는 것이냐?”
황제의 말이 맞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 인정하면 백천범에게 좋을 게 없었다. 조정에는 그의 적이 많다. 지금 그가 약점을 잡히면 그녀를 넘보는 사람도 많아질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꽁꽁 감춰 두기만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오랜 생각 끝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께서는 황후 마마와 부부의 정이 두터우시니 분명 아우의 고충을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폐하께서는 황제이시기 때문에 후궁을 많이 들이셔야겠지요. 하지만 이 아우는 왕비와 단둘이 살아가는 것 말고는 더 바라는 게 없습니다. 이번 생은 그녀를 저버리지 않는 것으로 족합니다.”
“평생 단둘이 살겠다!”
드물게 분노에 찬 황제가 탁자를 내리쳤다.
“넌 황실 종친이자 짐의 형제다. 일반 백성이 아니란 말이다. 이 나라는 짐의 혈통으로만 일으킨 게 아니다. 짐의 천하이기도 하지만 우리 묵용씨의 천하이기도 하단 말이다. 오늘은 짐이 여기까지만 하겠다.
수민의 딸에게 아무 짓도 하지 말거라. 네 맘에 들지 않거든 아이라도 낳을 수 있게 해 주거라. 차라리 아이라도 보며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어야지!”
묵용감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폐하, 용서해 주십시오. 그렇게는 할 수 없습니다!”
“네 이놈!”
황제가 탁자를 내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간 너그럽기만 하던 황제가 오늘은 버럭 화를 냈다. 그가 두 눈을 부릅뜨고 묵용감에게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뻔뻔한 놈 같으니, 어째서 할 수 없단 말이냐? 네 손으로 저택에 들였으면 남편의 도리는 해야 할 것 아니냐? 총애를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저 아이라도 갖게 해 주라는데 그조차도 할 수 없단 말이냐? 수민은 대학사다. 애당초 대학사의 장녀가 너에게 첩으로 가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이더냐?
네가 백 승상과의 원한으로 왕비를 오래 둘 것 같지 않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그랬다면 수민의 딸이 곧 정비가 될 테니까! 한데 지금 와서 이혼을 하겠다니, 짐이 수민의 낯을 어찌 보란 말이더냐?”
말을 할수록 분노가 치밀어 올라, 결국 황제는 매섭게 발을 굴렀다.
“네가 동의한 혼사였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단 말이다. 혼례를 치른 지 얼마나 지났다고 이혼이라니. 수민의 딸을 내치려는 것은 짐을 어질지 못한 군자로 몰아세우는 것이나 다름없다. 물론 황후도 마찬가지다. 이, 이, 못난 놈 같으니라고!”
분을 못 이긴 황제가 찻잔을 집어 던졌다.
청화 찻잔은 바닥에 닿자마자 그대로 산산이 부서졌다. 깨진 찻잔 조각이 묵용감의 손에 날아와 상처와 함께 욱신거리는 통증을 남겼다. 하지만 묵용감은 무릎을 꿇고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앞만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서 고집이 느껴졌다.
황제는 주변을 둘러보며 손에 쥘 물건을 찾았다. 그때, 황후가 황급히 그에게 다가왔다.
“폐하, 이게 다 무슨 일입니까? 친형제끼리 말로 풀면 될 것을, 이렇게까지 하시다니요?”
황후의 얼굴을 보자 황제의 분노가 조금 사그라들었다. 그가 묵용감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애에게 황후가 직접 물어보시오!”
황제에게도 전해진 소식을 황후가 모를 리 없었다. 그녀가 온화한 목소리로 황제를 타일렀다.
“셋째가 어린아이도 아닌데 이리 무릎을 꿇리시는 것은 옳지 않은 듯합니다. 하인들이 보면 곤란할 테니 그만 일어나라고 하시지요.”
“일어나도 상관은 없지만!”
황후의 온화한 목소리에도 황제는 여전히 불만이 가득한 기색이었다.
“생각은 잘 정리했는지부터 물어보시오. 이혼을 할 것인지 말이오.”
묵용감의 고집은 선황조차 손을 쓰지 못할 정도였다. 그는 목을 꼿꼿이 세우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