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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205)화 (204/1,192)

제205화

“방금 제가 기홍 언니를 칭찬했어요. 언니가 해 준 맛있는 음식이 아니었으면 그렇게 많이 먹지 못했을 거예요. 그럼 어떻게 키가 클 수 있었겠어요?”

“그래, 듣고 보니 맞는 말이오. 기홍의 공이 크오.”

묵용감이 백천범의 어깨를 움켜쥐며 말했다.

“하지만 키만 크는 것은 소용없소. 살도 쪄야지.”

그가 기홍에게 말했다.

“그럼 이렇게 하지, 네 주인의 살을 찌우면 본왕이 두 달 치의 봉급을 더 주겠다.”

기홍은 곧장 감사 인사를 표했다.

“소인의 살이 빠지는 한이 있어도 반드시 왕비 마마의 살을 찌우겠습니다. 왕야께서도 지켜봐 주십시오!”

백천범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되죠. 그러다간 제가 돼지가 될 수도 있는걸요!”

묵용감이 웃으며 말했다.

“왕비는 원래 아기 돼지이지 않소.”

돼지가 나쁠 건 없었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돼지라고 하다니! 아무리 어린 아가씨라도 체면은 있는 법이다. 그녀의 움켜쥔 주먹이 묵용감을 향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그는 이미 훌쩍 피한 뒤였다.

정원을 가득 메운 노비들은 초왕이 실없이 웃으며 도망치는 모습과 얼굴이 빨개진 왕비가 그 뒤를 쫓는 모습까지 코앞에서 지켜보았다.

학평관이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왕비 마마께서 우리 왕야를 다 버려놓으셨구나.”

녹하가 웃으며 말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한동안 걷어차이지 않으시니 그리워지셨나 봅니다.”

학평관이 민망한 듯 얼굴을 살짝 붉혔다.

“이 늙은이를 그리 놀리다니.”

기홍이 서둘러 해명했다.

“개의치 마시어요, 어르신. 녹하가 원래 입이 사납지 않습니까. 왕야께서는 예전보다 많이 좋아지셨습니다. 보십시오, 날마다 미소를 머금으시질 않습니까? 다 왕비 마마 덕분입니다.”

“맞는 말일세.”

학평관이 맞장구를 쳤다.

“왕비 마마와 왕야의 사이가 긴밀해진 후로… 아이고, 아가씨들의 비웃음을 살 말을 했군. 어쨌든 왕비 마마는 우리 왕야께 운명 같은 분이시라네. 요즘 왕야의 일도 순풍에 돛 단 듯 순조롭질 않으신가?”

녹하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

“어르신, 말씀이 청산유수이십니다. 운명도 모자라 순풍에 돛까지 달다니요. 그럼 어르신의 운명은 지금 어디에 계시는지요?”

“예끼, 오늘 나에게 끝까지 맞서겠다는 겐가?”

학평관은 눈을 크게 뜨고 녹하를 바라보았지만 입은 빙그레 웃고 있었다.

“내가 홀아비라고 업신여기는 게 아닌가!”

“어르신, 다른 이들은 몰라도 저는 다 압니다.”

녹하가 일부러 그를 놀렸다.

“전 다 보았거든요. 그날 저자에서 고운 과부와 애틋한 모습이시던데요.”

기홍이 신기하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여인이 과부라는 건 어떻게 알았어?”

“마침 알고 있는 사람이었거든.”

녹하가 히죽거리며 말했다.

“어르신, 이래도 인정 안 하십니까?”

녹하의 꿍꿍이를 알아차린 학평관이 능글맞게 말했다.

“아이고! 아가씨, 부디 소문내지 말아 주게. 이번 달에 휴가를 이틀 더 주겠네, 응?”

“감사합니다, 어르신!”

녹하는 서둘러 예를 갖춰 인사를 올리며 웃었다. 오라버니가 장가를 가는 일로 그녀의 집안은 정신이 없었다. 녹하의 부모는 수더분한 성격이었지만, 새색시의 어머니가 보통이 아니라고 했다. 그녀는 자신의 부모가 트집을 잡힐까 봐 가서 도움을 주고 싶었다.

저택의 규율대로라면 그녀에게 매달 하루의 휴가가 주어졌다. 하지만 초왕은 이런 일에 관여하지 않으니 총관리인의 허락을 받는 게 더 중요했다. 다만 지난번에 학평관에게 운을 떼니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그녀가 미리 청하지 않아도 그가 선뜻 휴가를 더 준 것이다.

기홍이 웃으며 그녀를 나무랐다.

“요망한 계집애, 좋은 건 안 배우고 어디서 그런 꾀만 배운 거야.”

녹하가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처마 밑에 서 있는 가동을 바라보았다. 그는 얼빠진 표정으로 서 있었다.

가동은 떠들썩한 일을 놓치는 법이 없었다. 평소 같았으면 웃고 즐기는 그들 곁으로 다가와 참견을 했을 텐데, 오늘은 뭔가 이상했다. 다른 아가씨에게 혼이 쏙 빠진 것은 아닐까?

그녀는 살금살금 그의 뒤로 다가가 묵직하게 헛기침을 했다. 가동이 깜짝 놀라 가슴을 두드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깜짝 놀랐잖아.”

녹하가 입을 삐죽거렸다.

“일급 호위무사가 담이 이렇게 작아서야.”

가동은 그녀를 만날 때마다 늘 물고기를 만난 고양이처럼 신이 나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런데 오늘은 그녀가 먼저 인사를 해도 살갑지 않고 어딘가 맥이 풀린 모습이었다.

녹하가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아이고, 가동 호위무사님. 누가 이렇게 무사님의 혼을 쏙 빼갔답니까?”

가동이 헤벌쭉 웃었다.

“누구긴 누구겠어. 너지.”

녹하가 코웃음을 쳤다.

“내가 뭘 어쨌다고? 괜히 둘러대지 마. 가동 무사님처럼 훌륭하신 분은 늘 여기저기 누비고 다니니까 자연스레 다른 이들의 관심을 살 테지. 뭐, 어쩌면 어느 여인에게 마음의 빚을 졌을 수도 있고.”

그녀가 억지를 부리자 가동은 식은땀이 다 날 지경이었다. 그가 얼른 두 손을 비비며 녹하의 비위를 맞췄다.

“녹하야,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아직도 모르는 거야? 난 오직 너뿐이야. 아무리 예쁜 여인이 앞에 있어도 나는 눈 하나 꿈쩍 안 한다고. 못 믿겠으면 영구한테 물어봐.”

“그럼 왜 이렇게 풀이 죽어 있는 건데? 뭘 잃어버리기라도 한 거야? 돈?”

“아니.”

가동이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길에서 사장풍을 만났거든. 근무 중인데도 술에 잔뜩 취해 있더라고. 반 리 밖에서도 술 냄새가 진동을 할 정도였어. 독찰원督察院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상소문을 올릴 테고, 그 친구는 구문제독에서도 물러나야 할 거야. 멀쩡했던 사내가 정 때문에 그리 망가지다니…….”

사장풍과 초왕, 왕비의 일은 녹하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녹하가 아는 사장풍은 기상이 넘치는 사내였다. 말을 타고 거리를 달려오던 모습이 제법 멋있었다. 물론 초왕과 견줄 정도는 아니었다. 멀쩡한 사람이라면 누구든 초왕을 고를 것이고, 어린 왕비도 옳은 선택을 했다. 두 사람은 그저 인연이 없었을 뿐이었다.

그녀가 가동의 어깨를 두드렸다.

“스스로 무너지겠다는데 네가 걱정한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가동이 그녀를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녹하야, 우리는 잘 지내자. 네가 날 원치 않으면 나도 사장풍처럼 될 거야.”

녹하가 코웃음을 쳤다.

“참나, 네가 그렇게 못난 사람이라면 나도 널 필요로 하지 않을 거야.”

그녀는 곧장 몸을 돌려 멀어졌다. 하지만 그녀의 가슴이 까닭 없이 두근거렸다.

그녀가 빠르게 몸을 돌려세우긴 했지만 가동은 그녀 입가에 번진 희미한 미소를 놓치지 않았다. 역시, 녹하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자주 한다니까!

* * *

요즘 들어 묵용감에게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아무래도 수원상과 관계된 일이었다. 그날 정자에서 다툰 후, 그는 여전히 그녀에게 미안한 감정이 남아 있었다.

그녀와 다시 한번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던 그는 짬을 내어 낙성각으로 찾아갔다. 그가 그녀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서로에게 좋은 일을 하는 것뿐이었다. 그는 그리 선량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백천범과 함께 지내다 보니 다른 이에게도 아량이 넓어졌다.

그러나 수원상은 지난번과 똑같은 말만 늘어놓았다. 그녀가 죽기 전까진 절대 저택을 나갈 수 없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분노한 묵용감은 그대로 낙성각을 빠져나왔다. 대체 어쩌자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체면이 뭐라고, 목숨보다 더 중요하단 말인가? 무슨 일만 있으면 죽네 사네 하며 목숨을 걸고넘어졌다.

고청접도 그러더니 수원상도 똑같았다. 왕비를 보고도 느끼는 게 없단 말인가? 백천범은 남들이 하는 말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제 마음은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는 듯 남들의 시선에 연연하지 않았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백천범과 수원상은 전혀 부류가 다른 사람이었다. 한 명은 성격이 제멋대로이기는 해도 꼭 생기 넘치는 초여름 같아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졌다. 다른 한 명은 품행이 단정하지만 낯빛이 늘 어두워 서늘한 겨울을 연상케 했다. 누가 그녀를 가까이 두고 싶겠는가?

거듭 비위를 맞춰 줘도 반응이 한결같으니 그의 인내심도 바닥이 나고야 말았다. 쉬운 길을 제시해도 수원상은 기어코 어려운 길을 택했다. 이제 길을 잃고 사달이 나더라도 그를 탓해서는 안 되었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길목에서 한참을 서성이던 그는 남월각에서 유달리 따스한 불빛이 흘러나오는 걸 보고 백천범을 떠올렸다. 시간이 늦었다는 것은 그 또한 잘 알고 있었지만 보고 싶은 마음은 억누를 수 없었다. 이미 잠든 모습을 볼 뿐이라도 좋았다.

마음을 정하자 그의 발걸음은 이미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대문 앞을 지키던 하인이 그를 보자마자 황급히 예를 갖췄다.

“오셨습니까, 왕야.”

“왕비는 침소에 들었느냐?”

“아마 아직 드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조금 전까지 토끼를 데리고 노셨거든요.”

묵용감은 짧게 대답한 후 곧바로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가 당황하고 있는데 시녀 한 명이 다가와 고했다.

“왕야, 왕비 마마께서는 목욕을 하고 계십니다. 곧 돌아오실 것입니다.”

목욕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묵용감은 예전의 일을 떠올렸다. 그녀에게 자신의 몸을 보인 그는 나중에 그녀가 목욕할 때 일부러 그녀 앞을 한 바퀴 돌았다. 부끄러움이라고는 모르는 그녀는 그보다 더 태연하게 행동하긴 했지만…….

그는 조용히 목욕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날이 추워졌는데 목욕간에 불은 제대로 때는지 걱정이다.

목욕간 입구에서 월향과 월규가 수문신처럼 앞을 지키고 있었다.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주인 곁에서 시중도 들지 않는 것이냐?”

월향과 월규는 서둘러 예를 갖춘 뒤 해명했다.

“왕비 마마께서 목욕을 하실 땐 편치 않으시다며 시중을 들지 못하게 하십니다.”

그녀의 습관은 그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시녀들을 탓할 순 없었다. 혼자 힘으로 하고 싶어 하는 그녀의 습관은 어릴 때부터 몸에 밴 것이라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천진난만한 성격인 그녀는 어린 시절의 혹독한 환경에서도 그녀만의 즐거움을 찾았다. 이제 그의 곁에서 있는 이상, 그는 그녀가 더 자유롭길 바랐다. 그녀만 기쁘다면 뭐든지 원하는 대로 해도 좋았다. 규율이나 예절 정도는 넘어가 줄 수 있었다.

황후가 몇 번이나 백천범을 궁으로 보내 달라고 했지만 그는 차마 그녀를 보낼 수 없었다. 어질고 너그러운 성품을 가진 황후가 궁 안의 수많은 음모까지 다 당해낼 수는 없다. 그러니 백천범은 차라리 저택에만 머무르는 편이 훨씬 안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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