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4화
초왕의 날들은 이렇게 늘 즐거웠다.
매일같이 부인과 함께 어울려 지내면서 머리를 쓰다듬고 손을 잡으며 웃고 떠들었다. 무얼 보아도 즐겁고 무얼 먹어도 다 맛있었다. 눈을 뜨면 절로 미소가 지어졌고 잠들기 전에도 그녀를 떠올리면 피식 웃음이 났다. 예전에는 늘 차갑기만 했던 그가 최근엔 웃고 있지 않아도 상냥하고 친근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렇다고 백천범과의 사이에 진척이 있는 건 아니었다. 조금 더 친근함을 표현하려고 하면 곧장 그를 경계했다. 매번 똑같은 반응에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녀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행동은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다.
돌이켜 보면 참 우스운 일이다. 대체 어딜 봐서 시집 온 부인이란 말인가? 누가 보아도 딸을 키우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누가 뭐라고 하든, 그에게는 이 또한 행복이었다.
붓글씨를 강요하지 않으니 두 사람 사이에 이렇다 할 갈등도 없었다. 백천범은 늘 활짝 웃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조정에서 돌아와 문 앞에 서면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왕야, 다녀오셨어요.”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니 백천범이 쏜살같이 뛰어나와 그의 너른 소매를 붙잡고 헤벌쭉 웃었다.
“제 귀가 밝잖아요. 왕야께서 오시는 것 같길래 녹하 언니랑 내기를 했는데 제가 이겼어요!”
“재미있소? 이런 것으로도 내기를 걸다니, 멀쩡한 시녀들까지 왕비에게 나쁜 물이 들었군.”
그녀의 손을 잡은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어찌 이리 얇게 입은 것이오? 날이 추워졌으니 두껍게 입어야지, 안 그럼 풍한이 들 수도 있소.”
“괜찮아요. 저는 매일 무술을 연마해서 몸이 아주 튼튼한걸요.”
그녀의 무술 실력이 뛰어나진 않았지만 그래도 몸이 튼튼한 편이었다. 다른 집 여인들은 바람만 조금 불어도 수양버들 한들거리듯 휘청거리기 일쑤였다. 하지만 백천범은 달랐다. 씩씩하고 생기발랄한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묵용감은 저절로 마음이 편안해졌다.
두 사람은 아름드리 기둥이 있는 곳까지 걸어갔다. 그때 기쁨에 잠긴 녹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폈다, 드디어 폈다. 아이, 예뻐라!”
구경거리를 놓칠 리 없던 백천범은 묵용감의 손을 뿌리치고 곧장 녹하에게 뛰어갔다. 묵용감은 빠져나가려는 그녀의 손을 움켜쥐었지만 결국 헛헛한 공기만 남았다. 그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빠르게 그녀의 뒤를 쫓았다.
녹하는 문 앞에 놓인 초록 국화 화분을 보고 있었다. 진귀한 품종인 데다 기르기 어려워 정원 관리사가 조심스레 돌보던 화분이었다. 세 해 만에 드디어 꽃봉오리를 맺더니 생각보다 빨리 꽃을 피웠다.
화분 안에서 탐스럽게 맺힌 꽃봉오리가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거렸다. 짙은 초록색의 가느다란 꽃잎을 늘어뜨린 모습이 어찌나 우아한지 매혹적인 자태의 미인을 보는 것 같았다.
꽃을 좋아하는 백천범이 쪼그려 앉아 꽃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진짜 예쁘다.”
옆에 서 있던 학평관이 입을 열었다.
“왕야, 날이 추워졌으니 얼어 죽기 전에 화분을 방으로 들이는 게 좋겠습니다.”
초록 국화는 다른 국화와는 달리 추위에 약했다. 이맘때가 되면 화분을 작은 방으로 들였다가 봄이 되면 밖으로 내놓아야 했다.
묵용감이 선선히 대답했다.
“그래, 그럼 옮기거라.”
학평관은 곧장 하인들에게 화분을 옮기라 분부했다. 하인 두 명이 화분을 들고 작은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묵용감의 목소리가 들렸다.
“곁채에 들여놓아라.”
곁채는 그의 방이었다. 그의 방에 화분을 가져다 놓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하인들은 얌전히 그의 분부에 따랐다.
화분을 들여놓자 백천범도 쫄래쫄래 따라 들어갔다. 그녀는 자신이 가장 마음에 드는 자리를 골라 화분을 놓아 달라고 말했다. 왕비의 말은 곧 왕의 말이나 다름없기에 하인은 잽싸게 그녀의 말에 따랐다.
방 안에 국화꽃 향기가 은은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달콤한 국화 향이 가슴 깊숙이 스며드는 듯했다. 백천범은 더 가까이에서 향을 맡으려다 그만 꽃술에 코가 닿았다. 코에 묻은 담황색 꽃가루가 그녀의 투명한 피부를 더욱 도드라지게 했다.
묵용감은 손으로 조심스레 꽃가루를 털어냈다.
“꽃가루에 민감하지 않아서 다행이지, 발진이 생길 수도 있소.”
백천범이 사랑스럽게 웃었다.
“그래도 안 무서워요. 왕야가 계시니까요.”
묵용감은 그녀의 말이 우스웠다.
“난 의원도 아닌 것을.”
“왕야와 함께 있는 게 의원의 진료보다 더 효과가 좋은걸요.”
묵용감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건 또 무슨 말이오?”
백천범이 능글맞게 웃었다.
“왕야가 계시면 병균들이 무서워서 가까이 오지 못하거든요.”
묵용감은 그제야 그녀의 말뜻을 이해했다. 그의 살기에 병균까지 가까이 오지 못한다고 놀리는 것이었다.
그가 코웃음을 치더니 그녀를 마구 간지럽힐 것처럼 손을 펼쳤다.
“그래, 감히 지아비를 욕보였겠다!”
백천범은 까르르 웃으며 도망쳤지만 묵용감의 손을 벗어날 순 없었다. 두세 발짝 만에 그녀를 붙잡은 묵용감은 그녀를 품 안에 안고 한바탕 간지럼을 태웠다. 간지럼을 못 참는 그녀는 웃다가 눈물까지 흘렸고 결국 소리를 지르며 사정했다.
“왕야, 잘못했어요, 안 그럴게요. 다음엔 절대 안 그럴게요…….”
그녀는 자그마한 얼굴을 내민 채 소리쳤다. 빨갛게 물든 얼굴은 연지를 발랐을 때보다 생기가 넘쳤고 까만 두 눈망울은 별빛처럼 하염없이 빛났다. 묵용감은 마른침을 삼켰다. 누군가 그의 가슴속을 비단으로 마구 문지르는 듯 간지러워 참을 수 없었다. 그는 자꾸만 마른 목을 축이며 조용히 말했다.
“입을 맞추겠소, 괜찮소?”
깜짝 놀란 백천범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힘껏 그를 밀쳤다.
“안 돼요. 저는 다 큰 아가씨라고요. 어떻게 저한테 입을 맞추실 수 있어요?”
묵용감도 화가 난 어조로 말했다.
“다 큰 아가씨라니, 옛날 옛적에 나에게 시집을 오질 않았소. 그대는 내 아내란 말이오. 지아비가 자신의 아내에게 입을 맞추는 것도 안 된단 말이오?”
그가 화를 내자 백천범은 조금 무서웠다. 이럴 땐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하지만 진작에 그녀의 행동을 예상한 그는 빠르게 입구를 막아섰다. 그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오늘은 반드시 대답을 해야 할 것이오.”
그녀는 늘 중요한 순간에 줄행랑을 쳤다. 그는 생쥐를 잡으려는 고양이처럼 그녀를 뒤쫓는 일에 이미 질릴 대로 질려 있었다.
하지만 백천범은 다른 것에 넋을 잃었다. 바로 그의 재빠른 동작. 그가 몸을 틀어 문 앞을 막은 동작은 가히 아름답다고 할 수 있었다. 백천범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왕야, 그건 어떤 무술이에요? 저도 좀 가르쳐 주세요.”
묵용감은 그녀의 말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이 상황에 무슨 소리란 말인가. 역시 그녀와는 낭만적인 순간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저 강하게 밀어붙여야 할 뿐. 그가 턱을 들어 올렸다.
“잔말 말고, 이리 오시오!”
백천범은 꾸물거리며 제자리에 서 있었다. 사실 초왕과 입 한 번 맞추는 것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그녀는 초왕비었고 그의 아내였으니, 그가 아내에게 입을 맞추는 것쯤은 당연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묵용감보다 나이가 훨씬 많았지만 여섯째 부인을 껴안고 입술에 있는 연지까지 해치울 듯 입을 맞추기도 했다.
그녀는 쭈뼛쭈뼛 앞으로 다가가다가 다시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초왕의 눈매가 무섭게만 느껴졌다. 곧 입에 들어올 사냥감을 바라보는 사나운 사자 같은 눈빛이었다. 대체 저게 어딜 봐서 입을 맞추려는 눈빛이란 말인가? 누가 봐도 그녀를 잡아먹으려는 모습이 아닌가!
그녀가 어깨를 끌어안고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와, 왕야, 왕야께서 그러셨잖아요. 그, 그건 안 하실 거라고요.”
잔뜩 겁을 먹은 그녀의 모습에 묵용감은 기분이 언짢았다.
“그저 입 한 번 맞추는 거지, 그걸 하려는 것은 아니오. 이리도 겁을 낼 필요 있소?”
하지만 그의 눈빛은 여전히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비록 그녀는 그 눈빛의 의미를 다 알진 못했지만 겁을 먹기에는 충분했다.
그녀가 타협을 시도했다.
“왕야, 아니면 제가, 제가 입을 맞출게요.”
기다리느라 지친 묵용감은 이제 누가 하든 별반 다를 것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하라고 대답하자, 백천범이 재촉했다.
“왕야, 키가 너무 커요. 허리 좀 숙여 주세요.”
백천범이 어느새 그의 앞으로 다가가 손짓을 했다.
묵용감은 그녀의 말대로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그때, 그녀가 닭이 모이를 쪼듯 그의 얼굴을 한 번 쪼더니 그대로 도망쳤다.
묵용감은 그녀의 흔적이 남은 얼굴을 한참 감싸 쥐고 서 있다가 이내 이마를 문지르며 웃었다.
* * *
상강霜降(이십사절기의 하나. 한로寒露와 입동立冬 사이에 들며, 아침과 저녁의 기온이 내려가고, 서리가 내리기 시작할 무렵)이 지나니 날씨가 점점 더 쌀쌀해졌다. 이제 문에 걸어 놓은 대나무 발을 두꺼운 모포로 바꿔야 했다.
부지런한 백천범은 시녀와 하인들이 발을 갈아 끼우는 동안 옆에서 일손을 도왔다. 그 광경을 본 학평관이 소리쳤다.
“아이고, 왕비 마마. 여기서 이러시면 아니 됩니다. 마마께서 하실 일이 아닙니다. 어서요, 어서. 그만 하십시오. 몸이라도 상하시면 왕야께서 제 숨통을 끊어 놓으실 겁니다!”
“왕야는 신경 쓰지 마세요.”
백천범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대나무 발을 말아 통에 담았다.
“왕야는 원래 별것도 아닌 일에 놀라시잖아요. 그리고 제가 겨우 이런 일로 몸이 상하겠어요? 매일 그렇게나 많이 먹는데요?”
백천범은 갑자기 무엇인가 생각난 듯 기홍을 불렀다.
“기홍 언니! 키가 컸는지 좀 봐주세요.”
기홍은 그녀의 키를 유심히 재었다.
“와, 우리 왕비 마마께서 또 두부껍질만큼이나 크셨습니다.”
“진짜요?”
백천범은 까치발을 들어 뒤를 돌았다.
“어디요? 저도 볼래요.”
기홍이 나뭇가지를 주워 벽에 표시했다.
“벌써 이만큼 크셨습니다. 다음 달에 재보면 분명 또 크셨을 것입니다.”
그녀가 태연한 표정으로 백천범을 놀렸다.
“내년쯤이면 소인보다 더 크실 듯합니다!”
백천범이 헤벌쭉 웃었다.
“다 언니 덕분이에요.”
기홍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왕비 마마의 키가 크는 게 어째서 소인 덕분인지요?”
“언니가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주었잖아요!”
기홍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 꼭 왕비가 노비에게 아부를 떠는 모양새였다.
“무슨 얘길 하는데 그리 즐거운 것이오?”
묵용감의 목소리에 백천범은 고개를 돌렸다. 그는 이미 그녀 뒤에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그녀가 눈이 안 보일 만큼 환하게 웃으며 예를 갖췄다.
“다녀오셨어요, 왕야. 왕야, 어서 이것 좀 보세요. 제 키가 또 컸어요.”
그녀가 신이 나서 벽을 가리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