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3화
추문이 서둘러 수원상을 달랬다.
“마마, 울음을 그치시옵소서. 왕야께서는 저택의 하늘이십니다. 어찌 없는 사람 취급을 할 수 있겠습니까? 부부 사이에는 말다툼도 일종의 낙이란 말이 있지 않습니까? 어서 눈물을 거두시옵소서. 왕야께서 부은 눈을 보시면 어찌하시려고 이리 우십니까?”
추문의 말에 수원상은 더욱 가슴이 미어졌다. 그녀를 저택에서 내쫓으려는 사람이 왜 보러 온단 말인가? 처음엔 백천범을 저택에서 곧 내보낼 것처럼 말하더니, 백천범이 아닌 그녀가 내쫓기게 될 줄이야……! 정말 꿈에도 생각 못 한 일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울음을 그치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백천범, 결국에는 백천범이었다. 그녀가 대체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고 이런 일을 당한단 말인가? 문득 그녀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이 모든 게 백천범의 뜻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명예를 더럽히는 것도 모자라 기어코 어린 계집에게 넘어가다니, 이런 수모가 어디 있을까. 어금니를 힘껏 깨문 수원상의 눈에 증오심이 불타올랐다. 정말 사무치게, 백천범이 증오스러웠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백천범의 살점을 베어 물 것처럼 이를 악물었다. 그녀가 동의하지 않으면 이혼은 불가능했다. 백천범도 뒤집을 수 있는 일을 그녀라고 못할까?
* * *
묵용감은 새삼 붓글씨를 핑계로 백천범을 곁에 두는 게 얼마나 좋은 일인지 깨달았다. 한번 붓글씨를 쓰기 시작하면 한나절은 그녀와 함께 있을 수 있었다. 그녀가 붓글씨를 연습할 땐 그도 한쪽에 앉아 조용히 책을 읽었다.
창 너머로 불어오는 바람에 살짝 고개를 들어보니 유유히 흐르는 구름이 눈에 담겼다. 끊임없이 흘러가는 구름만큼이나 그의 마음도 잔잔하고 평온했다.
그는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웠지만 백천범은 아니었다. 그녀는 이제 붓글씨가 원망스러웠다. 지루한 건 물론이고 손목까지 시큰거렸다. 끊임없이 붓글씨를 연습하라고 하는 초왕에게도 불만이 쌓였다.
아직 토끼와 놀지도 못했고 무술도 연습하지 못했다. 후원 꽃밭에도 못 가고 녹하가 가르쳐 준 벚꽃 모양 주머니도 반밖에 만들지 못했는데……. 못다 한 일들이 생각나자 그녀는 붓을 내려놓고 입을 삐쭉거렸다.
묵용감이 고개를 들어보니 그녀는 잔뜩 성질을 부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그도 물러나지 않았다. 붓글씨 연습은 그녀를 위해 시키는 것이었다. 초왕비인 그녀는 앞으로 종실 부녀자들과 만날 일이 많았다. 그들은 수준 높은 교육을 받았으니 해서체 정도는 감탄이 나오도록 쓸 수 있었다.
예전에 황후가 필사한 경서를 본 적 있었는데, 해서체로 적은 깨알같이 작은 글자가 어찌나 편안하게 읽히는지 선황조차 그녀의 실력을 칭찬할 정도였다.
사실 그는 백천범이 잘 쓰는 것까진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지렁이가 기어가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정도의 무난한 수준이면 되었다.
그는 그녀에게 늘 다정했지만 엄격해야 할 땐 절대 양보하지 않았다. 그가 곁으로 다가가 연습한 글씨를 바라보았다. 제대로 쓴 글자가 하나도 없었다. 이렇게 오랜 시간 연습했는데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다니, 실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이런, 이런.”
그가 글자를 가리켰다.
“제대로 쓴 게 한 글자도 없지 않소. 진심을 다하지 않았다는 뜻이오. 내가 알려 준 요령은 다 잊었소? 가로획을 쓸 땐 시작점에 각진 뿔을 그리고 끝점에 봉우리를 만들라고 하지 않았소! 대체 왕비의 뿔과 봉우리는 다 어딜 간 것이오?”
가뜩이나 지루한 참에 묵용감의 잔소리까지 듣자 그녀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왕야께서는 대체 왜 이렇게 글씨 연습을 하라고 하시는 거예요? 유모가 그랬어요. 얌전한 게 덕이라고요!”
“그런 말은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나 쓰는 말이지, 왕비에게 해당하는 말이 아니오. 초왕비가 글씨 하나도 제대로 못 쓰면 남들의 웃음거리가 된단 말이오.”
“그럼 그냥 웃으라고 하면 될 거 아니에요. 전 상관없어요.”
“난 아니오. 다른 이들이 내 왕비가 볼품없다고 하는 말은 듣고 싶지 않소.”
“왜 꼭 볼품이 있어야 하는 건데요. 과거 시험을 볼 것도 아니잖아요. 저는 초왕비예요. 지금도 잘만 살고 있는데 왜 굳이 더 잘나야 하는 건데요?”
하나하나 따지고 드는 그녀의 말에 묵용감은 할 말을 잃었다. 그는 습자첩을 넘겨 다른 글자를 펼친 뒤 책상에 탕 올려 두었다.
“이걸로 한 획 한 획 똑바로 쓰시오. 제대로 못 쓰면 밥은 없을 줄 아시오!”
그녀도 이번에는 지지 않았다.
“제가 어떻게 쓰든 다 마음에 안 들어 하시잖아요! 밥을 못 먹게 하시면 키가 안 클 테고, 그럼 다른 이들이 왕야의 왕비는 난쟁이라고 쑥덕거리겠죠!”
묵용감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화가 치밀어 오르게 하다가 이제는 웃게 만들다니! 그녀는 정말 그를 다루는 데 재능이 있었다.
그는 안색을 풀고 좋게 타일렀다.
“그리 많이 쓰라고는 안 하겠소. 열 번이면 되오. 왕비가 정성껏 쓴 글자는 다 알아볼 수 있소.”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은 그녀의 모습에 그는 정성스럽게 먹을 갈아 주며 농을 건넸다.
“이것 보시오. 왕비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오? 무려 이 초왕이 먹 시중을 들고 있지 않소.”
하지만 백천범은 여전히 언짢은지 표정이 좋지 않았다.
“왕야께서 직접 하신 거지, 전 해 달라고 한 적 없어요.”
“알았소. 그만 화 풀고 어서 쓰시오. 다 쓰면 식사를 할 것이오.”
그가 정성껏 먹을 간 덕에 벼루에는 어느새 먹물이 가득 찼다. 그녀가 천천히 마음을 진정시키자 그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책을 집어 들었다.
그때 묵용감은 문 앞에 서 있는 학평관을 발견했다. 그에게 할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가 고개를 돌려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미간을 찌푸린 채 잔뜩 골이 난 표정을 지었지만 그래도 제법 참을성 있게 쓰고 있었다.
그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방을 나섰다.
백천범은 정말 잘 쓰고 싶었다. 분명 습자첩을 보며 똑같이 따라 썼다. 하지만 습자첩의 글자는 예쁘고 보기 좋은 반면 그녀가 쓴 글자는 이렇게 못날 수 없었다. 시무룩해진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모래시계를 보니 이미 시간이 반이나 흘러 있었다. 아직 한 번도 제대로 쓰지 못했기에 그녀의 마음이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글자를 다 쓰지 못하면 밥을 못 먹을 텐데 어찌한단 말인가? 평소에는 그녀를 끔찍이 대하던 초왕이지만, 그는 가끔씩 낯빛을 바꾸고 지독히 냉정하게 굴었다.
백천범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녀는 손을 바삐 움직였고 그럴수록 글자는 점점 더 흉측해졌다. 묵용감이 싫어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지만 그녀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짜증이 난 그녀는 붓을 내려놓고 종이를 마구 구겨 바구니에 던져 넣었다.
다시 모래시계를 바라보니 이미 모래가 다 흘러 내려가 있었다. 그녀는 괜스레 답답하고 억울했다. 그녀는 원래 배움에 뜻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굶지 않고 입에 풀칠이나 하다 때가 되어 세상을 뜨는 걸로도 충분했다.
왜 초왕비가 되어야 하고, 왜 글자 연습을 해야 한단 말인가? 정작 그녀는 원치도 않았던 일이다. 차라리 무술을 연마하거나 가축을 기르는 일을 하고 싶었다. 수를 놓는 것도 괜찮았지만 글씨만큼은 정말 쓰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왠지 묵용감에게 속은 기분이었다. 초왕비가 되면 좋은 일만 있을 것처럼 말하더니! 붓글씨부터 시작해서 나중엔 더 많은 것들을 배우라고 할지도 모른다.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적 없는 그녀는 규율도 잘 모르거늘……. 생각할수록 서글퍼진 그녀는 입을 삐죽대다 붓을 바닥에 던지고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사느니 사장풍에게 시집가는 게 더 나을 뻔했다. 하급 관리의 부인이라면 글자를 좀 못 쓴다 해도 아무도 비웃지 않을 터였다.
속상한 마음에 하염없이 눈물이 흐르자 그녀는 옷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그 바람에 소매에 묻어 있던 먹물이 얼굴에 그대로 묻었다. 먹물이 눈물과 뒤섞여 그녀의 얼굴은 얼룩무늬 고양이가 되고 말았다.
다시 방으로 들어온 묵용감은 그녀의 모습에 깜짝 놀라 다급히 다가왔다.
“대체 무슨 일이오? 왜 울고 있는 것이오?”
그녀가 코를 훌쩍이며 말했다.
“제 눈인데 제가 울고 싶으면 우는 거죠. 왕야가 무슨 상관이에요?”
하! 나이는 어려도 성질만큼은 보통이 아니었다. 묵용감이 허리를 굽히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눈이 퉁퉁 부어서 썩은 호두알 같아졌소. 정말 못났군!”
“못나면 못나라지요. 제가 못나면 어차피 왕야의 체면만 깎일 텐데요!”
묵용감이 박장대소를 하더니 소매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못나기도 했지만 얼룩 고양이가 다 되었소. 이런 몰골로 밖으로 나가면 당신이 초왕비라는 걸 아무도 모를 것이오.”
그녀는 몸을 틀고 고개를 돌렸다. 검게 변한 얼굴 위에 눈물이 흐른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 몰골로 사나운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묵용감은 반은 타이르듯, 반은 협박하듯 말했다.
“못 닦게 하면 시녀를 부를 것이오. 초왕비가 얼룩 고양이가 된 걸 보면 다들 비웃겠지.”
백천범에게도 체면은 조금 중요했다. 다만 묵용감 앞에서는 어찌 되든 상관없었다. 그의 앞에서 체면을 잃은 일이 셀 수 없이 많아 창피한 모습을 더 보인다 해도 아쉬울 게 없었다. 하지만 녹하와 기홍은 달랐다. 두 시녀에게까지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진 않았던 그녀는 결국 울음을 멈추었다.
묵용감이 그제야 그녀에게 다시 물었다.
“말해 보시오. 왜 운 것이오?”
백천범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얼굴을 굳혔다. 그녀는 아직도 화가 가라앉지 않는 듯했다.
묵용감은 바닥에 나뒹구는 종이와 붓을 발견하곤 가볍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렇게 쓰기 싫다면 그만하시오. 이런 일로 어찌 그리 눈물을 흘린단 말이오, 정말 못났소.”
백천범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정말 안 써도 된다고요?”
밥도 안 줄 것처럼 엄하게 굴다가, 이제는 안 써도 된다니?
“내가 언제 왕비를 속인 적 있소?”
“왕야도 참, 진작 말씀하시지. 괜히 울었잖아요.”
묵용감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쓴웃음을 머금었다. 도중에 일을 그만두는 법이 없는 그였지만 유일하게 그녀에게만큼은… 마음을 모질게 먹지 못했다. 더욱이 눈물까지 흘리니 그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지금껏 지켜온 원칙들은 그녀의 앞에서는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