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2화
“내치는 것이 아니라 이혼을 하려는 것이오.”
묵용감이 서둘러 해명했다.
“그대를 들인 것은 내 실수였소. 그래도 잘못을 거듭 저지르진 않았으니 그나마 다행이오. 지금이라도 실수를 바로잡으려는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본왕이 좋은 사람을 찾아보겠소. 혼수도 섭섭지 않게 준비해 줄 것이오. 그대에게 성대한 혼사를 치러 주겠다고 약속하지!”
일찍이 백천범에게 했던 말이 지금은 수원상에게 그대로 전해졌다.
그의 말은 예리한 검처럼 수원상의 심장을 갈기갈기 베었다. 혼사가 실수라니? 잘못을 거듭 저지르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라는 말은 또 무엇이고?
합방을 하진 않았어도 그녀는 정식으로 초왕에게 시집온 그의 부인이었다. 대학사의 장녀가 초왕의 측왕비로 시집오던 날, 가마 행렬을 지켜보던 구경꾼들도 다 보았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실수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안색이 창백하게 질린 그녀가 굳은 혀를 애써 움직였다.
“왕야, 어찌 소첩에게 이러실 수 있습니까? 소첩이 대체 무슨 잘못을 저지른 것입니까?”
죄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죄가 없었다면 처소에 발이 묶이는 일도 없었을 터였다. 백천범 때문에 초왕의 심기를 건드렸지만, 고작 그런 이유로 그녀를 쫓아낼 수는 없었다.
그가 그녀를 내치려는 이유는 너무나 단순했다. 백천범이 원하는 대로 해 주고 싶었다. 그녀는 지아비와 단둘이 지내고 싶어 했고, 첩이 없는 남자를 원했다. 사장풍도 할 수 있는 일을 그라고 못할까?
그가 천천히 그녀를 타일렀다.
“아무런 잘못도 없소. 그저 부부가 되기에는 나와의 연이 부족했던 것이오. 본왕이 오늘 사 제독을 부른 것은 그대에게 좋은 짝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오. 외모도 준수하고 장래는 말할 것도 없소.
본왕이 보살펴 줄 것이니 일급 무관은 떼 놓은 당상이오. 그자와 혼인을 하면 그대는 그 집의 안주인이 될 수 있소. 이곳에서 첩으로 지내는 것보다 훨씬 낫지 않소?”
갈기갈기 베였던 수원상의 심장은 이제 마구 짓이겨지고 있었다. 규율을 어기면서 외간 남자를 소개해 주더니, 자신을 그자에게 시집을 보내려 한다! 그녀는 그제야 고청접에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사 제독이란 자는 다름 아닌 왕비의 외도 상대였다.
치솟는 분노에 몸이 덜덜 떨던 그녀가 코웃음을 치며 일어났다.
“왕야, 셈이 아주 뛰어나십니다. 소첩에게 왕비 마마의 죄를 뒤집어씌우시려는 것입니까? 왕비께서 벌이신 외도를 소첩이 한 짓으로 꾸미고 싶으시겠지요. 왕야, 하늘이 지켜보고 있습니다. 천벌을 내릴 수도 있으니 조심하십시오!”
“무엄하다!”
묵용감이 식탁을 내리치며 일어났다. 가늘게 뜬 그의 눈가에 포악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
“본왕은 빚을 갚고 싶은 마음에 상의를 하려 했거늘, 이리 허튼소리를 지껄이며 왕비를 능멸하려 하다니! 방금 지껄인 말만으로도 측왕비를 폐위할 수 있소!”
수원상이 처량하게 웃었다. 눈물이 그녀의 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애당초 저를 내치고 싶으셨으면서 무엇 하러 이리 에둘러 말씀하셨습니까. 저 수원상은 죽든 살든 초왕야의 사람입니다. 왕야께서 절 내치시는 날이 저의 제삿날이 될 것입니다!”
묵용감은 화가 치밀었다. 고청접과 수원상은 걸핏하면 목숨을 걸었다. 고달픈 환경에서 힘겹게 자란 백천범이 목숨을 소중히 여기는 것과는 딴판이었다. 편안한 삶에 싫증이 나서 죽고 싶은 것이겠지. 화가 치밀자 그의 머리가 냉정하게 가라앉았다.
“독설을 퍼붓겠다?”
그가 냉소를 지었다.
“본왕은 협박 따윈 받아 본 적 없는 사람이오. 그리도 죽고 싶거든 마음대로 하시오. 본왕이 성대한 장례를 치러 주겠소.”
수원상은 가슴을 움켜쥐었다. 도저히 숨을 내쉴 수 없었다. 어찌 이리 피도 눈물도 없이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대체 어쩌다 이렇게 무자비한 사내에게 시집을 왔을까!
“왕비 때문에 이러시는 것입니까?”
그녀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이럴 거면 대체 왜 저를 들이신 것입니까?”
“황제 폐하의 압박만 아니었어도 이렇게까지 하진 않았을 것이오.”
묵용감이 고개를 저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본왕의 잘못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소. 바로잡을 방법을 고민하다 모두에게 득이 되는 방향을 생각한 것인데, 그대가 남은 생을 고독하게 살고 싶다면 본왕도 말리진 않을 것이오.”
* * *
남월각으로 돌아온 백천범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았다. 마음이 답답해져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월규와 월향은 흔히 볼 수 없는 그녀의 조용한 모습이 의아하기만 했다.
월향이 조심스레 그녀에게 말을 붙였다.
“왕비 마마, 무슨 일이십니까? 무슨 걱정이라도 있으신지요?”
그녀가 사장풍과 엮인 일은 두 시녀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조금 전의 일을 모두 털어놓았다. 두 시녀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초왕이 왕비에게 부군을 선택하게 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왕비가 제대로 택했으니 망정이지, 혹여 잘못된 선택을 했었다간 사장풍의 목이 그 자리에서 날아가고도 남았을 일이다.
월규가 말했다.
“왕야께서는 진정한 대장부이십니다. 이런 건 우리 왕야께서나 하실 수 있는 일이지, 다른 자들은 감당도 못 할 일입니다. 그 사 제독이란 자도 이제 완벽히 마음을 접었겠지요.”
백천범이 풀이 죽은 얼굴로 말했다.
“사 제독님의 눈빛이 너무 무서웠어. 나 때문에 괜한 일을 일으키진 않겠지?”
월규가 그녀를 흘겨보며 말했다.
“왕비 마마께서는 스스로를 경국지색이라 여기십니까? 사 제독이 잠시 마마에게 홀린 것뿐이니 정신만 차리면 별일 없을 것입니다. 왕비 마마와 몇 차례 만난 게 다인데 어찌 그리 감정이 깊어질 수 있겠습니까?”
“제 생각도 그러하옵니다. 그저 오해일 뿐인데 목숨을 걸려고 하다니요.”
월향이 입을 삐죽거렸다.
“제가 보기에 그 사 제독이라는 자는 사나이도 아닙니다.”
“그럼 내가 잘못한 건 없는 거지?”
백천범은 두 시녀의 인정을 받아서라도 마음이 편해지고 싶었다.
“물론 아무 잘못 없으시지요. 우물쭈물하다간 더 큰 해를 입는다는 것쯤은 왕비 마마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월규가 웃으며 말했다.
“왕비 마마의 결정은 사 제독에게도 더 잘된 일이니 걱정하지 마시어요. 분명 곧 정신을 차리고 기운을 낼 것입니다.”
“그렇지?”
백천범은 턱을 만지작거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나도 이러는 편이 사 제독님한테 더 좋을 것 같았어.”
“그자도 다 깨닫고 나면 왕비 마마께 감사할 것입니다.”
깊은 수심에 잠겨 있던 백천범은 두 시녀의 말에 걱정이 눈 녹듯 사라졌다. 그녀가 헤벌쭉 웃으며 말했다.
“그렇담 나도 이제 미안해하지 않을래. 피곤해서 낮잠 좀 자러 가야겠어.”
* * *
묵용감이 남월각에 도착했을 때 백천범은 단잠에 빠져 있었다.
수원상과 언성을 높인 뒤, 묵용감은 답답한 마음에 산책을 나섰다. 말이 산책이지 그의 발걸음은 자연스레 남월각으로 향하고 있었다. 하인이 그에게 인사를 올린 후에야 그는 남월각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왕비를 보고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아쉽게도 그녀는 낮잠을 자고 있었다. 그는 발길을 돌리지 않고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옆에 있던 월향과 월규는 차마 숨소리도 크게 내지 못하고 자리를 지켰다.
월규가 용기를 내어 먼저 입을 열었다.
“왕야, 잠시 앉으시지요. 소인이 차를 내오겠습니다.”
그는 손을 내젓더니 아무 말 않고 곁채로 향했다. 월향이 그의 뒤를 따르려 했지만 월규가 그녀의 옷자락을 잡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묵용감은 백천범의 방으로 들어갔다. 쌀쌀해진 날씨 탓에 방에는 장막이 처져 있었다. 그는 조심스레 장막을 걷어 올리고 천천히 안으로 들어섰다. 단잠에 빠진 그녀는 새카만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흐트러뜨린 채 새근거리며 고른 호흡을 내뱉고 있었다. 이불 밖으로 빠끔히 내놓은 자그마한 얼굴이 참을 수 없이 사랑스러웠다.
그는 조심스레 겉옷을 벗고 그녀의 옆에 누웠다.
잠귀가 밝은 백천범은 작은 움직임에도 쉽게 잠에서 깼다. 그녀가 몽롱한 정신으로 중얼거리자 그는 서둘러 그녀를 토닥였다. 마치 아기를 어르듯 그가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달랬다.
“괜찮소. 괜찮소. 아무 일도 없소.”
그의 목소리를 들어서일까? 마음이 편안해졌는지 그녀는 따스한 그의 품에 파고들었다. 자그마한 몸집이 그의 가슴에 기대자 그는 숨도 크게 내쉴 수 없었다.
생각해 보면 참 우스운 일이다. 그녀는 조금만 가까이 다가가려 해도 눈이 휘둥그레지기 일쑤였다. 하지만 함께 누워 있는 침상에서는 부끄러워하기는커녕 분명 그인 걸 알면서도 더 가까이 붙으려고 품으로 파고들었다.
어쨌든 그는 마음의 위안을 얻었다. 남녀 간의 정은 아닐지언정 그녀도 그에게 좋은 감정이 있으니 이리 행동하지 않을까. 그는 언젠가 그녀도 그에게 흔들리는 날이 오리라 믿었다.
* * *
낙성각에 돌아온 수원상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쓰러져 엉엉 울기 시작했다. 늘 침착하던 그녀가 이리 이성을 잃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분명 큰일이 생긴 것이라 여긴 추문이 초조하게 물었다.
“마마, 대체 무슨 일이십니까?”
묵용감의 말을 들은 사람은 그녀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 입 밖으로 꺼내겠는가? 그야말로 굴욕이었다. 시집온 뒤로 천대만 받다가 이젠 다른 이에게 보내려 하다니, 자신의 신세가 기녀들과 다른 게 무엇이란 말인가?
그녀는 가슴이 찢어질 듯한 고통에 흐느꼈다. 수원상은 울고 또 울다 목이 메어 숨도 제대로 내쉬지 못했다. 깜짝 놀란 추문이 그녀의 등을 힘껏 두드렸다.
“마마, 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것입니까? 이렇게 우시면 몸이 다 상하십니다. 가슴에 파묻지 마시고 소인에게 말씀해 보시어요. 소인이 다른 재주는 없지만 말씀을 전하는 심부름만큼은 잘할 자신 있습니다. 아니면 소인이 왕야께 청을 드리겠…….”
수원상은 왕야라는 말에 곧장 정신을 차리고 매섭게 소리쳤다.
“절대 찾아가지 말거라. 앞으로 이 집에 없는 사람이라 여길 것이다!”
추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이곳은 초왕의 저택이다. 그런데 초왕을 없는 사람으로 여기겠다니! 다른 이가 들었다간 불경을 저질렀다고 손가락질을 할 일이다.
동시에, 추문은 상황을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수원상이 이토록 고통스럽게 우는 걸 보면 초왕과 크게 말다툼을 한 것이 틀림없었다. 추문이 보기에는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어느 부부든 말다툼은 흔한 일이었다.
간혹 말다툼을 하면서 더 정이 드는 사이도 있었다. 허구한 날 초왕과 다투는 어린 왕비만 보더라도 그랬다. 싸우고 난 뒤에는 살얼음판을 걷는 듯하지만 지금 초왕은 그녀를 누구보다 끔찍이 아끼지 않는가. 초왕의 그 뜨거운 감정을 보고 있으면 추문은 저절로 왕비가 부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