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1화
한참 뒤에 그가 겨우 입을 열었다. 목이 메어 잔뜩 잠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 어찌 그리 말씀하실 수 있단 말입니까. 제게 주머니를 주시지 않았…….”
“그건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었어요. 왕야께도 드리고 사부님께도, 기홍 언니와 녹하 언니에게도 주었는걸요.”
“제 것도 받으시지 않으셨습니까.”
“왕야께서도 선물을 자주 주시니까요. 토끼도 사 주셨고요. 그리고 사부님은 제게 표창도 사 주셨어요…….”
“하지만 앞으로는.”
묵용감이 갑작스레 그녀의 말을 끊었다.
“다른 이가 주는 물건은 받지 마시오. 특히 사내가 주는 것은 말이오. 괜한 오해를 살 수도 있소.”
“네. 알겠어요, 왕야. 앞으로는 왕야께서 주시는 것만 받을게요.”
“좋소.”
묵용감은 넋이 나간 사장풍을 슬쩍 바라보고는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이리 오시오.”
백천범은 순순히 그에게 다가갔다. 묵용감은 그녀를 끌어당겨 자신의 옆에 앉혔다. 두 사람이 앉기에는 좁은 의자였지만 그들은 금실이 좋은 부부처럼 딱 붙어 앉았다.
백천범은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다들 보통이 아니었다. 한 사람은 걸핏하면 집안을 멸한다고 협박하기 일쑤였다. 사람을 죽이는 게 무를 써는 것도 아니고, 목숨을 장난처럼 여겼다.
다른 한 사람은 그녀 없인 살 수 없을 것처럼 애원했다. 비록 사장풍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하긴 했지만 대부분은 그녀의 진심이기도 했다. 그녀는 사장풍에게 정말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 그저 묵용감이 그에게 시집을 보내려는 줄 알고 조금 신경이 쓰였을 뿐이다. 누구라도 그 상황에서는 상대에게 신경이 쓰였을 것이다.
그녀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진 사장풍의 감정이 대체 어디에서 시작된 것인지 의아하기만 했다. 서로 변치 않는 사랑을 맹세한 것도 아니었는데 그는 꼭 평생을 함께하기로 약속한 듯이 행동했다.
사장풍이 몸을 휘청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두 사람을 쳐다보지도 않고 힘겹게 두 손을 맞잡고 인사를 올렸다. 그가 비참한 미소를 지었다.
“소인이 오해를 한 듯합니다. 왕야, 소인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어찌 그냥 가겠다는 것이냐?”
초왕이 너그럽게 웃어 보였다.
“식사 시간이 되었으니 본왕과 술 한잔하지. 지난번에 마시기로 했는데 기회가 없지 않았나. 어떻게든 자리를 마련해야지.”
“왕야, 말씀은 감사하지만 소인이 이제 막 몸을 회복한지라 술을 마시기가 어렵습니다. 몸이 완전히 나으면 그때 왕야를 모시겠습니다.”
“술은 마시지 않아도 좋네. 우리가 보통 인연도 아닌데 식사를 청하는 것쯤은 괜찮겠지?”
“그것이…….”
사장풍은 그의 속셈을 알 길이 없었다. 이미 결론이 났건만 왜 또 얽히려고 드는가.
“게 아무도 없느냐, 제독 나리를 정자로 모시거라.”
문 앞에서 대답을 올린 학평관이 곧장 방 안으로 들어와 사장풍에게 앞으로 들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제독 나리, 이쪽으로 오시지요.”
더 내세울 명분도 없던 사장풍은 그와 함께 밖으로 향했다.
사장풍의 뒤를 이어 묵용감과 백천범도 정자에 도착했다. 백천범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학평관의 안내를 받으며 천천히 걸어오는 수원상을 발견했다.
수원상이 외출 금지가 해제된 이후, 백천범은 오랫동안 그녀를 만나지 못했다. 눈을 아래로 내리깐 채 사뿐사뿐 걸어오는 수원상의 모습은 전형적인 대갓집 규수의 자태였다. 늘 쏜살같이 걸어 다니는 백천범과는 차원이 다른 모습이었다.
이렇게 보니 수원상과 묵용감은 참 잘 어울렸다. 한 사람은 황족이고 한 사람은 명문가 규수다. 그 누구보다 격이 맞는 한 쌍이었다. 그런 그녀를 두고 자신이 정비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백천범의 마음을 아프게 찔러 왔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수원상에게 인사를 건넸다.
“언니, 오셨어요.”
수원상이 옅은 미소를 띤 얼굴로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왕야와 왕비 마마를 뵈옵니다.”
묵용감은 백천범을 끌어 앉혔다.
“소개하겠소. 이쪽은 사 제독, 하북 창주 사람이오. 나이는 어리지만 이미 구문제독에 올랐으니 유능하고 젊은 인재라 할 수 있지. 특별히 측왕비를 오라 부른 것은 사 제독을 소개해 주기 위함이오.”
수원상은 그의 의도를 알 수가 없었다. 그녀에게 외간 남자를 소개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심지어 어느 지역 출신인지까지, 자세히도 설명했다.
사장풍도 영문을 알지 못해 묵묵히 앉아 있었다. 애당초 그는 초왕의 처를 만나선 안 되는 외간 남자였다. 백천범은 예외였다고 해도, 이 자리에 수원상을 불러 소개한 것은 규율에 어긋나는 행동이었다.
묵용감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사 제독, 이분은 대학사 저택의 큰아가씨, 수원상이라고 하네.”
수원상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름도 알려 주다니, 대체 초왕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이란 말인가?
그때, 사장풍은 초왕의 의도를 깨달았다. 초왕은 그에게 백천범 대신 수원상을 보내려는 것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짓이란 말인가? 그는 묵용감의 행동이 우습기만 했다. 아무 여인이나 찔러 주면 마음의 빚을 갚을 수 있을 줄 알고?
우스움 뒤에는 더욱 강한 분노와 참담함이 밀려왔다. 결국 그는 차갑게 굳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인, 왕야의 가족 연회에 함께하려니 너무나 불편하옵니다. 처리해야 할 일도 있어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묵용감도 성이 나긴 마찬가지였다. 수원상이 뭐 그리 부족하다고 감히 성난 얼굴을 보이다니! 그래, 체면을 살려 주려 해도 그리 싫다면야.
냉랭해진 분위기를 알아차린 백천범이 서둘러 말했다.
“식사는 나중에 해도 되지만 사 제독님의 일을 그르칠 수 없지요. 사 제독님, 조심히 가시어요.”
의아한 표정으로 백천범을 바라본 묵용감이 막 입을 떼려는데, 백천범이 그의 팔뚝을 몰래 꼬집었다. 누군가에게 꼬집혀 본 적이 없었던 묵용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을 느꼈다. 아팠다. 아프긴 했지만 꼬집은 이가 백천범이었으니 그의 기분은 오히려 달콤했다. 그녀가 그를 자신의 사람이라 여기는 걸 알 수 있었으니까.
그는 결국 하려던 말을 삼키고 말을 돌렸다.
“사 제독이 일이 있다고 하니 본왕도 더 붙잡지 않겠네. 기회는 많으니 나중에 시간을 내어 다시 자리를 만들겠네. 여봐라, 사 제독은 병세가 호전된 지 얼마 되지 않아 풍한이 들어선 안 된다. 서둘러 가마를 대령해 집까지 모셔다드리거라.”
학평관은 대답을 올린 뒤 사장풍을 부축했다.
자리를 떠나기 전, 사장풍이 몸을 돌려 백천범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고통과 슬픔, 절망 등이 뒤섞여 있었다. 백천범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죄책감 같은 감정이 그녀를 휘감았다. 하지만 그녀는 분명 죄책감을 느낄 짓은 하지 않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비틀거리며 대문을 향해 걸어갔다.
자신의 적이 초라한 모습으로 멀어져 가자 묵용감은 승리의 미소를 머금었다. 하지만 시선을 돌려 보니 백천범은 여전히 근심 가득한 얼굴로 사장풍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늘을 나는 듯했던 그는 다시금 지상으로 추락했다. 자신이 너무 빨리 승리감에 도취한 것은 아닐까.
두 남녀를 소개하려던 자리는 결국 미묘한 분위기만 감돌았다. 사장풍이 떠난 뒤, 수원상은 우두커니 서 있었다. 계속 남아 있기도, 다시 돌아가기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수원상을 여기까지 초대한 묵용감으로서도 그냥 돌아가라고 할 수 없었다.
“앉으시오, 측왕비. 식사라도 함께합시다.”
사실 수원상은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을 마주해야 하는 것도 그녀에겐 여간 괴로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초왕의 말을 거부할 수 없던 그녀는 자리에 앉아 묵묵히 젓가락을 놀렸다.
백천범도 밥알을 세듯 깨작거렸다. 묵용감은 그런 그녀를 곁눈질로 흘깃 살폈다. 설마 사장풍 때문에 상심했단 말인가?
그는 담담한 표정으로 음식을 집어 주며 말했다.
“무얼 생각하는 것이오, 어서 드시오. 음식이 다 식겠소.”
백천범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서둘러 밥을 먹기 시작했다. 사장풍의 마지막 모습이 꼭 머리에 박혀 버린 듯 어른거렸다. 선한 심성 탓에 그녀는 누군가에게 마음의 빚을 졌다고 생각하면 늘 불안함에 휩싸였다.
그녀는 몇 숟갈 만에 밥을 다 비웠다.
“왕야, 다 먹었어요. 전 그만 가 볼게요.”
묵용감은 불편한 기분을 감추고 평온한 표정을 유지했다.
“무엇 하러 그리 서두른단 말이오, 차 한잔하고 가도 되질 않소.”
백천범은 어쩔 수 없이 좀 더 자리를 지켜야 했다. 기홍이 차를 올리자 그녀는 찻잔을 들고 천천히 차를 들이켰다. 언뜻 침착해 보이는 그녀의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들어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묵용감은 부글거리는 화를 간신히 잠재웠다. 그녀는 분명 사장풍 때문에 마음이 뒤숭숭한 것이 분명했다. 그는 백천범을 무시한 채 고개를 돌려 수원상에게 물었다.
“음식이 입에 맞았는지 모르겠소.”
그가 이렇게 상냥한 어조로 말을 걸어 온 게 대체 얼마만인지 까마득하기만 했다. 수원상은 총애를 받는 기분에 마음이 요동쳤지만 감정을 억누르고 최대한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기홍 아가씨의 음식 솜씨는 늘 훌륭하지요. 소첩도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그랬다니 다행이군.”
그렇게 대답한 묵용감은 갑작스레 백천범을 바라보며 큰 소리로 말했다.
“돌아가고 싶으면 그만 가 보시오, 왕비. 난 측왕비와 할 말이 있소.”
생각에 잠겨 있던 백천범은 갑작스러운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네?”
“그만 돌아가시오. 측왕비와 잠시 할 말이 있소.”
묵용감은 일부러 조금 쌀쌀맞게 말했다.
하지만 백천범은 곧장 입꼬리를 올리더니 알겠다는 대답만 남기고 쏜살같이 자리를 떴다. 마음에 걸리는 기색은 조금도 없어 보였다. 그는 씁쓸한 미소를 삼켰다. 남녀 간의 정이라고는 전혀 느끼지 못하는 그녀가 어찌 질투를 하겠는가? 괜히 그녀를 떠보려다 제 발등을 찍은 셈이었다.
백천범이 떠나자 묵용감은 주위를 지키던 시녀들도 모두 물렸다. 이제 정자에는 그와 수원상만 남아 있었다.
수원상은 묵용감이 주변을 물리면서까지 자신에게 사사로운 말을 할 것 같진 않았다. 지난날 걱정했던 일들이 끊임없이 떠오른 그녀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묵용감은 생각을 정리하는 듯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그간 측왕비를 힘들게 했소.”
담담하게 내뱉은 그 말은 그녀의 마음 속 가장 연약한 부분을 강타했다. 순식간에 붉어진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뿌옇게 차올랐다.
“왕야, 그런 말씀 마십시오. 소첩은 힘들지 않습니다.”
“본왕이 미안하오. 측왕비는 문제 될 게 전혀 없는 몸이니 서둘러 좋은 낭군을 찾아봅시다.”
수원상이 시선을 올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소첩이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왕야, 기어코 소첩을 내치시려는 것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