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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200)화 (199/1,192)

제200화

한참이나 의자에 앉아 있던 사장풍이 잠이 들기 직전, 밖에서 학평관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차를 내려놓거라!”

사장풍은 흠칫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서둘러 옷매무새를 단정하게 정돈한 그는 문 앞으로 다가갔다. 학평관이 가마의 발을 걷어 올리자 묵용감이 몸을 숙이고 밖으로 나왔다. 그가 허리를 숙이고 안에 있는 여인을 부축했다.

화려한 치맛자락이 땅에 끌려 바스락거렸고, 머리 위에 얹힌 보요步搖(머리꾸미개의 하나. 걸어갈 때 흔들리기 때문에 붙은 이름)는 그녀가 움직임을 따라 흔들거렸다. 그녀가 고개를 들고 사장풍을 바라보았다. 환하게 웃는 얼굴과 청량한 목소리가 그를 반겼다. 그야말로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다.

사장풍은 넋을 놓고 바라보느라 인사를 올리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이 광경이 불쾌했던 묵용감이 큰소리로 헛기침을 해 그의 정신을 일깨웠다.

“사 제독, 방으로 들어가 앉게.”

사장풍은 그제야 꿈에서 깬 듯 두 손을 모아 예를 갖췄다.

“소인 왕야와… 왕비 마마를 뵈옵니다.”

왕비 마마를 말할 때는 힘을 싣지 않아 거의 들리지도 않았다.

얼이 빠진 표정으로 왕비를 바라보는 그의 모습에 묵용감은 속이 끓어오르는 듯했다. 당장 그의 눈을 뽑아 버리고 싶었지만, 일단 몸을 틀어 사장풍의 시선을 차단했다. 백천범의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간 묵용감은 시녀가 차를 올리자마자 주변을 물리고 문을 걸어 잠갔다.

자신의 아내만 바라보는 사장풍을 최대한 빨리 내쫓고 싶었다. 몇 마디로 끝장을 보고 싶었지만, 백천범의 앞이었기 때문에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 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무시무시한 군신일지언정 백천범의 앞에서는 의젓하고 살가운 지아비이고 싶었다.

그가 크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사 제독, 몸은 괜찮은 것인가? 보아하니 조금 수척해진 듯하군.”

“문제없습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왕야.”

손을 맞잡고 인사를 올리던 사장풍은 곁눈질로 백천범의 안색을 살폈다.

백천범 또한 그의 안색을 살피고 있었다. 조금 야위긴 했지만 멀쩡해 보이는 모습에 마음이 놓인 그녀가 환하게 웃었다.

“사 제독님, 많이 드셔야겠어요. 몸이 너무 야위었어요.”

아무렇게나 뱉은 말이었지만 묵용감의 심기를 건드리고 있었다. 거의 대놓고 사장풍에게 관심을 쏟는 수준이 아닌가?

그는 목을 한차례 가다듬고 백천범의 손을 감싸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 걱정할 것 없소. 사 제독의 식사를 신경 써 주는 사람이 있을 것이오. 사 제독은 이미 약관弱冠(스무 살을 달리 이르는 말)이 지난 지 오래니 분명 살뜰히 보살펴 주는 사람이 있을 것 아니오?”

차마 대놓고 말할 수 없던 사 제독은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왕야, 지난번에 제게 중매를 서 주시려던 게 아니었습니까, 어찌하여 진척이 없는 것인지요?”

“그 일은…….”

묵용감은 백천범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만지작거리더니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본왕이 그땐 정신이 없어 사 제독이 오해할 만한 일을 했나 보군.”

초왕이 시치미를 떼자 사장풍은 대놓고 말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가 이 말을 입 밖에 꺼내는 순간 머리가 날아갈 수도 있었지만 참을 수 없었다. 그에게 백천범은 목숨보다 더 중요했다.

그 또한 자신이 왜 이렇게 비정상으로 행동하는지 알 수 없었다. 백천범과 몇 번 만난 게 다였지만 한번 생겨난 감정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갔다.

그는 이렇게 비참한 꼴이 된 것을 전혀 후회하지 않았다. 그의 미래가 사라진다 해도, 목숨을 잃는다고 해도 백천범이 그를 선택한다면 용감하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왕야께서 소인에게 분명히 말씀하진 않으셨지만 왕비 마마께는 똑똑히 말씀해 주셨지요.”

그가 다급하게 말했다.

“소인과 왕비 마마는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증표를 나누어 가졌습니다. 왕야께서도 왕비 마마를 여동생으로 삼을 거라고 말씀하시질 않으셨습니까. 두 해 정도 지나 시집을 보내실 거라고 말입니다. 어질고 너그러우신 왕야께서는 조정의 모범이십니다. 소인, 왕야의 은혜에…….”

“무엄하다!”

묵용감은 결국 참지 못하고 매섭게 호통을 쳤다. 온몸에 힘이 들어가자 그는 저도 모르게 백천범의 손을 강하게 쥐고 있었다. 백천범이 작게 앓는 소리를 냈다. 급히 손을 푼 그는 새하얀 그녀의 손에 빨갛게 남은 자국을 보고 더욱 화를 억누르지 못했다.

“사장풍, 네가 감히 본왕의 왕비를 마음에 품다니, 목이 날아갈 죄라는 걸 모른단 말이냐? 네가 지금 내뱉은 말로도 본왕이 널 처단할 수 있다!”

화를 내자 흉악하게 변해 버린 그의 모습에 백천범의 목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그녀가 쭈뼛거리며 그를 불렀다.

“왕야.”

그녀의 목소리에 정신을 가다듬은 묵용감은 한차례 심호흡을 한 뒤 자세를 고쳐 앉았다.

“본왕도 네 오해가 크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가동에게 말을 전하라 한 것이고. 네가 삶을 망치게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않느냐?”

초왕의 분노에 겁을 먹지 않을 사람은 없었지만, 이미 목숨까지 내걸기로 마음먹은 사장풍은 백천범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왕야, 왕비 마마께 직접 선택할 기회를 주시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묵용감도 그럴 참이었다. 하지만 이 순간이 다가오자 그는 참을 수 없이 거북했다. 자신의 부인에게 사내와 저를 선택하게 하는 상황도, 그녀의 선택을 기다리는 자신의 처지도.

마침내 묵용감이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네 지대하신 체면을 살려 주려 했는데 그리도 굴욕을 자초하려 하니, 본왕이 그 기회를 하사하지.”

그가 고개를 돌려 백천범을 바라보았다. 창백하게 질린 안색과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녀의 모습에 그는 서둘러 표정을 바꾸고 그녀의 손을 따스하게 다독였다.

“겁먹을 것 없소. 저자에게 왕비의 선택을 알려 주시오.”

묵용감은 자신이 평소처럼 살갑고 따뜻한 표정을 짓고 있다고 믿었지만, 백천범의 눈에는 화를 냈던 모습과 별 차이가 없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덜덜 떨었다. 만약 한마디라도 잘못했다간 산 채로 그에게 잡아먹힐 것 같았다.

덜덜 떠는 그녀의 모습에 묵용감은 서둘러 어깨를 감싸 안았다.

“추운 것이오? 내 품에 안기시오. 따뜻하게 해 주겠소.”

그 광경을 지켜보는 사장풍은 심장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기분이었다. 가동에게 두 사람이 함께 침소에 든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개의치 않았다. 하지만 직접 그 모습을 눈에 담으니 괴롭고, 아프고, 화가 치밀었다. 당장이라도 백천범을 감싼 묵용감의 팔을 두 동강 내고 싶었다.

백천범도 불편하긴 마찬가지였다. 묵용감이 사장풍 앞에서 억지로 따스한 모습을 보이려 해서가 아니다. 묵용감과 거리가 너무 가까워 그의 냉기가 고스란히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이 상황을 얼른 끝내고 싶었다. 그저 사장풍의 마음을 단념시키면 되는 일이었다. 그것은 그녀의 힘으로도 할 수 있었다.

그녀가 입술을 달싹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 제독님, 예전에 어떤 오해를 했든 이제는 다 잊어버리세요. 저는 왕야께 정식으로 시집온 왕야의 아내이자 초왕비입니다. 앞으로 저는 왕야의 대를 잇고 가문의 명맥을 이어나갈 것입니다. 사 제독님은 젊고 유능한 분이시니 앞길 또한 창창하겠지요. 이런 오해 때문에 부디 무너지지 마십시오.”

“…천범 아가씨!”

결국 사장풍이 애처롭게 그녀를 불렀다.

“이것은 분명 아가씨의 마음이 아닙니다. 혹 위협을 받고 있다면…….”

“아뇨. 왕야께서 제게 얼마나 잘해 주시는데요. 저도 왕야를 좋아합니다. 저는 늘 왕야의 초왕비일 것입니다.”

“하지만 첩을 들이는 자는 싫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왕야는 첩을 들이셨습니다. 그것도 아가씨를 왕비로 맞이한 뒤에 말입니다. 애당초 왕야께서는 아가씨를 마음에 두지 않은 겁니다! 저는 인정할 수 없습니다. 저는 아가씨만으로 충분…….”

사장풍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묵용감의 가슴을 찌르는 듯했다. 첩을 들인 것은 맞지만 사장풍이 제멋대로 지껄일 일이 아니었다. 묵용감이 탁자를 부술 듯 내려치며 소리쳤다.

“네 이놈! 대체 목숨이 몇 개나 되기에 이리 오만방자하게 구는 것이냐? 죽고 싶어 작정한 것이냐? 내 너희 가문을 멸할 것이다!”

“왕야!”

백천범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그녀가 차가운 얼굴로 고했다.

“왕야, 그리하시면 모든 이들에게 비웃음을 살 것입니다. 사 제독이 지난번 일로 제정신이 아닌 듯합니다. 부디 말씀을 거두시옵소서!”

묵용감이 그녀를 멍하게 바라보며 몸을 등받이에 기댔다. 백천범의 말에 폭발하던 그의 분노 또한 사그라들었다.

사장풍은 정말 실성을 한 듯 끊임없이 냉소를 흘렸다.

“초왕야, 역시나 그 지대한 권력으로 백성을 업신여기시는군요. 죽이는 것 외에 왕야께서 무얼 하실 수 있으십니까? 덕으로는 백성들의 신망을 얻지 못하겠으니 천하의 모든 이들을 없애려 하십니까? 그게 가당키나 한 말씀인지요?”

“그 입 다무십시오!”

이번엔 백천범이 그에게 소리쳤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사장풍의 앞으로 다가가 냉랭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 제독님. 솔직히 말할게요. 예전에는 왕야께서 그럴 마음이 있으셨다고 해도 지금은 아니에요. 왕야께서 제게 무척 잘해 주시거든요. 저는 왕야 곁에서 평안한 삶과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어요.

무엇보다 전 왕야를 좋아해요. 또 존경하고요. 왕야와 부부가 되는 것은 전생에 덕을 쌓지 않고는 불가능할 만큼 엄청난 복이에요. 하지만 사 제독님은요?

저와 몇 번 만난 적도 없으니 가까운 사이라고도 할 수 없어요. 전 사 제독님께 어떤 감정도 없어요. 사 제독님도 저 때문에 본인의 미래를 망가뜨리지 마세요. 앞으로는 만나는 일 없도록 해요. 그렇게, 각자 평안한 삶을 살아요.”

묵용감과 사장풍 모두 백천범의 냉철한 태도에 흠칫 놀랐다. 곧 한 사람은 기쁨을, 다른 한 사람은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묵용감이 오랫동안 품어 온 분노와 걱정이 한순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녀가 그를 좋아한다고, 존경한다고 했다. 그와 부부가 되는 것은 전생에 덕을 쌓아야 할 만큼 엄청난 복이라는 말까지도.

다른 말은 중요치 않았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말은 그녀의 입에서 나온 ‘좋아해요’ 단 한마디였다. 그녀가 그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기뻤다. 그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들었던 말 중 가장 기분 좋은 말이었다.

그의 입꼬리가 자신도 모르게 점점 위로 올라갔다. 그는 거만한 표정으로 사장풍을 바라보았다.

반면 사장풍의 모습은 가엽기 짝이 없었다. 안 그래도 수척했던 그는 그녀의 단호한 말에 넋을 놓은 듯했다. 멍하니 앉아 있던 그는 한참이 지나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녀는 그에게 어떤 감정도 없다고 했다. 그럴 리 없다. 그녀의 말은 진심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을 만났을 때 부끄러워하던 그녀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런 감정이 없다니, 두 사람은 분명 서로를 마음에 품고 있었다. 서로에게 증표까지 주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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