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199)화 (198/1,192)

제199화

한편, 가동은 묵용감의 말을 사장풍에게 전했다. 가동의 말을 들은 사장풍의 두 눈에 광채가 돌았다.

“정말이야? 초왕야가 정말 그렇게 말했어?”

“그렇다니까. 설마 왕야께서 널 속이시기야 하겠어?”

가동은 놀란 그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었다.

“충고하는데, 희망 따위는 갖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왕야와 왕비 마마는 금실이 아주 좋으시다고. 한 침대에서 같이 잠을 청하신다니까. 몸을 허락한 사내에게 마음이 가는 법 아니겠어? 괜히 기대하지 마.”

가동의 말에 사장풍의 두 눈은 또다시 빛을 잃었다.

“정말이야? 두 분이 이미 합례를 치르셨다고?”

“그날 밤 왕비 마마를 옥에서 데려오시고 두 분이 함께 침소에 드셨어. 다음날 정오가 다 될 때까지 같이 주무셨다니까. 뭐, 합례를 치르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맥이 빠진 사장풍은 몸을 축 늘어뜨린 채 한참이 지난 뒤에야 입을 열었다.

“그랬다고 해도 분명 초왕야가 천범 아가씨를 강제로 몰아세웠을 거야.”

그가 주먹을 움켜쥐더니 매섭게 벽을 가격했다. 육중한 소리가 나며 벽이 몸을 떨었다.

“천범 아가씨가 가여워 미치겠어. 내게 아무런 힘이 없으니 지켜 주지도 못하고.”

가동은 얼이 빠진 채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정말 정상이 아닌 듯했다. 정작 어린 왕비는 매일 신이 나서 깡충거리면서 다니고 있지 않은가.

가동이 진지하게 설명했다.

“네가 걱정이 많은 거야. 왕비 마마께서 가엽다니, 얼마나 잘 지내시는데.”

“억지로 즐거운 척하시는 거야. 아가씨의 고통은 나만 알 수 있어.”

가동이 속으로 그를 비웃었다.

‘알 수 있긴, 왕비 마마를 만나지도 못하면서 고통을 어찌 안다는 거야?’

사장풍이 갑자기 몸을 똑바로 일으켜 앉더니 주먹을 힘껏 움켜쥐었다. 수척해진 얼굴에 확고한 표정이 떠올랐다.

“어쨌든 내일 아가씨를 꼭 만나야 해. 만나면 전부 괜찮아질 거야.”

사장풍은 며칠간 다듬지 않은 수염을 말끔하게 깎고 머리도 정갈하게 정리한 뒤 관모를 썼다. 그리곤 월백색의 도포로 갈아입고, 굽이 높은 포화를 신었다. 조금 야윈 모습이긴 했지만 그래도 외모를 단정히 하자 예전의 늠름함이 조금씩 되살아났다.

그는 아침 일찍 초왕의 저택에 도착했다. 묵용감이 조정에서 돌아오기 전 백천범을 만나 따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초왕비와 외간 남자는 만날 수 없었다. 차 씨조차 왕비와 담소를 나누었다는 이유로 곧장 앞뜰로 보내졌다. 그의 자리를 말주변 없는 하인이 대신할 정도였다.

사장풍은 대청에 앉아 창밖만 애타게 바라보았다. 그가 그토록 그리워하는 여인은 보이지 않았다. 마침 단정한 외모에 우아한 분위기를 풍기는 다른 여인이 창밖을 지나쳤다. 그녀를 본 하인은 곧장 그녀에게 예를 갖추었다.

서비의 폐위 소식은 그 또한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저 여인은 측왕비가 틀림없었다.

그녀는 외모가 빼어나긴 했지만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웃음기 없는 얼굴은 백천범과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했다.

찻잔의 바닥이 드러날 즈음 시중을 들던 시녀가 찻잔을 다시 채웠다. 사장풍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 앞으로 향했다.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를 본 하인이 곧장 굽실대며 다가와 물었다.

“제독 나리, 어디를 가시려는 것입니까? 소인이 길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길 안내는 무슨, 그를 감시하려는 수작이 아닌가!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늦게 왔을 것이었다. 마음이 초조해진 그는 어찌해야 할지 몰라 혼란스럽기만 했다.

사장풍은 다시 의자에 앉아 창밖만 하릴없이 바라보았다. 통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가 온 사실을 그녀도 알고 있을까? 그를 걱정하고 있진 않을까?

* * *

그가 대청에서 하염없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때, 백천범은 회림각에서 글씨 연습을 하고 있었다. 오전마다 붓글씨를 연습하라는 초왕의 분부가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글씨를 잘 쓰지 못하면 밥도 먹을 수 없다는 특명이었다.

이 일은 학평관에게 맡겨졌다. 차마 소홀히 할 수 없었던 그는 아침 일찍 남월각에 가서 백천범을 고이 모셔 와야 했다. 백천범은 녹하의 시중을 받으며 조용히 글씨를 썼다.

붓글씨를 쓰다 보면 쉽게 지루해졌기 때문에 처음에는 즐거워하던 백천범도 조금씩 흥미를 잃었다. 빠르게 쓰려다 보니 글자 모양이 영… 아니었다. 지켜보는 녹하의 얼굴에 불만이 가득했다.

백천범이 붓을 그녀에게 건넸다.

“언니, 대신 몇 장만 써 주면 안 될까요?”

“절대 안 됩니다.”

녹하가 눈을 부릅떴다.

“왕비 마마, 소인이 곤장을 맞길 바라십니까?”

백천범이 말도 안 된다는 듯 대답했다.

“저와 언니만의 비밀로 하면 돼요. 그럼 왕야께서 어떻게 아시겠어요?”

“우리 왕야께서는 모든 걸 통찰하는 혜안을 가지신 분인데 어찌 모르시겠어요. 왕비 마마는 왕야께서 그토록 아끼시니 벌하지 않으시겠지만 소인은 다릅니다. 요령을 피우다 소인이 대신 벌을 받길 바라십니까?”

녹하는 늘 옳은 말만 했다. 조금 부끄러워진 백천범은 민망한 듯 헤헤 웃음을 지었다.

“왕야께서 어찌 언니를 벌하시겠어요. 기홍 언니와 녹하 언니는 저택에서 왕야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잖아요. 왕야께서도 쉽게 화를 내지 않으실 거예요.”

녹하는 그녀의 말에서 미묘한 속뜻을 알아차렸다.

“저희가 어찌 왕야와 가장 가까운 사이란 말입니까? 왕야와 가장 가까운 분은 왕비 마마시지요. 저희는 가장 끄트머리에도 끼지 못합니다.”

“왜요? 언니는 왕야의 시첩 아니었어요?”

녹하는 손에 들고 있던 먹을 내려 놓았다. 그리곤 손을 허리에 대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할 수만 있다면 백천범을 잡아먹을 것 같은 표정이었다.

“왕비 마마, 어디서 그런 소리를 들으신 것입니까? 저와 기홍이 왕야의 시첩이라니요? 누가 그런 소릴 하였습니까? 저는 순결한 처녀입니다. 이렇게 모욕을 주시다니요!”

백천범은 화난 녹하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는 줄곧 기홍과 녹하가 왕야의 시녀이자 첩이라고 생각했다. 저택에 안주인이 없던 데다 초왕의 나이도 적지 않으니 당연히 두 시녀를 시첩이라 여긴 것이었다.

“언니, 화내지 마세요.”

백천범이 서둘러 그녀를 달랬다.

“제가 눈치가 없었던 거예요. 그냥 허튼소리일 뿐이니 화 푸세요, 언니. 차라리 화가 풀릴 때까지 절 때리세요.”

만약 왕비가 아니었더라면 녹하는 정말 손을 날렸을 터였다. 어떻게 이런 헛소리를 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일은 자신의 평판과 직결되는 문제였다. 그저 좋은 낭군을 만나고 싶었던 그녀에게 이런 모욕을 주다니.

그녀는 백천범에게서 몸을 돌리고 울적함에 잠겨들었다.

백천범은 미안한 마음에 온갖 방법을 쥐어짜 그녀의 기분을 풀어 주려 했다. 코를 들어 올려 열심히 돼지 흉내를 내 보았지만 녹하는 웃지 않았다. 다음엔 개 흉내를 내 봤지만 녹하는 여전히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붓을 집어 들었다. 그리곤 자신의 두 볼에 세 줄씩 선을 그어 고양이 수염을 그렸다. 사실 진즉 마음이 풀렸던 녹하는 그녀의 얼굴을 보자마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언니 웃었으니까 이제 화내지 마세요.”

백천범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깡충깡충 뛰어올랐다.

녹하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능글맞은 어린 왕비는 초왕도 손을 쓰지 못할 정도인데 노비인 그녀가 어찌 할 수 있었겠는가?

마침 학평관이 발을 걷어 올리고 안으로 들어왔다. 꾀죄죄한 백천범의 얼굴을 본 그가 깜짝 놀라 물었다.

“왕비 마마, 대체 이것이 다 무엇입니까?”

“야옹!”

백천범이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

“닮았죠?”

“아이고, 마마.”

학평관이 안절부절못하며 손을 내저었다.

“곧 왕야께서 돌아오실 시간인데 어찌 이런 짓을 하셨단 말입니까. 어서 지우십시오. 오늘은 손님도 만나야 하시지 않습니까?”

늘 예를 갖췄던 학평관이었지만 이번만큼은 그녀를 꾸짖었다.

“대체 왕비 마마를 말리지 않고 무얼 한 겐가. 왕야께서 보시면 어찌하실지 모른단 말인가?”

녹하도 자신의 불찰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조용히 대답했다.

“어르신 말씀이 맞습니다. 소인의 불찰입니다.”

녹하가 서둘러 물을 길어 와 백천범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백천범은 학평관이 아무것도 아닌 일에 요란스럽게 반응한다고 생각했다. 어릴 땐 그녀를 괴롭히던 형제자매들이 얼굴에 거북이를 그리기도 했는데, 고양이가 대수일까.

하지만 그녀는 까닭 없이 기분이 좋았다. 묵용감은 그녀의 형제들과는 달리 나이가 많아도 침소에 여인을 두지 않았다. 그녀의 아버지마저도 아직도 새 여인을 들이는데 말이다.

문득 그녀는 궁금해졌다. 한창 혈기 왕성한 나이인 초왕은 여인을 찾지 않는데, 둘째 오빠와 나머지 형제들은 어째서 날마다 여인을 찾았단 말인가?

* * *

묵용감이 돌아왔을 땐 녹하가 백천범의 머리를 다시 빗어 올리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힌 뒤였다. 하지만 묵용감에게는 그녀의 모습이 성이 차지 않았다. 그는 직접 화려한 옷을 고르고 값비싼 뒤꽂이를 그녀의 머리에 꽂아 주었다. 붉은 연지로 볼과 입술을 물들이자 백천범은 황궁 연회에 참석하는 사람 같았다.

묵용감은 백천범이 화려한 치장을 싫어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무거운 장신구를 찬 날이면 그녀는 금세 지치곤 했다. 하지만 오늘은 사장풍에게 이 모습을 보여 주어야 했다. 사장풍, 그자가 이렇게 화려하고 고귀한 모습을 만들어 줄 수나 있을까?

백천범은 고분고분하게 앉아 있었다. 얌전히 기홍과 녹하에게 몸을 맡긴 그녀는 치장이 모두 끝나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귀티가 넘쳐흐르다 못해 압도될 정도였다. 머리에 꽂은 장신구는 빛을 내뿜으며 반짝였고 번쩍이는 귀한 비단 옷은 눈이 부셨다.

이런 복장으로 걷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기에 학평관이 가마를 준비했다. 묵용감은 직접 발을 걷어 올려 그녀가 탈 수 있게 돕고 자신도 함께 가마에 올라탔다. 이렇게 딱 붙어있지 않으면 그녀가 마음을 바꿀 것만 같았다. 그녀의 손을 꽉 붙잡은 그가 나지막이 내뱉었다.

“아주, 잘, 잘 생각해야 할 것이오.”

백천범은 커다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별안간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왕야, 어째서 이리 긴장하시는 거예요?”

묵용감은 애써 태연한 목소리를 냈다.

“긴장은 무슨.”

“손에 땀이 이렇게 많이 났는데도요?”

묵용감은 한숨을 내쉬며 손수건을 꺼내 땀을 닦았다. 잠시 후 그가 느릿느릿 말했다.

“왕비가 날 택하지 않을까 두렵소.”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던 백천범이 조금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왕야, 그렇게나 절 좋아하시는 거예요?”

묵용감은 별안간 기침을 하더니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본왕은 그저 지는 걸 싫어할 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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