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8화
곱씹어 볼수록 좋은 방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번에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일거양득의 대안이었다. 그는 기쁜 마음으로 더욱 큰 보폭으로 걸어갔다. 당장 남월각으로 뛰어 들어가 그의 아내를 껴안고 입을 맞추고 싶었다.
수원상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초왕은 빠르게 남월각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한시도 지체할 수 없다는 듯 발걸음을 재촉하는 모습에 그녀의 눈썹이 절로 찌푸려졌다.
이미 체념했지만, 마음은 한없이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지아비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니 아이조차 가질 수 없었다. 앞으로 어찌 살아가야 한단 말인가?
생각할수록 자신의 처지가 처량해,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스며들었다. 혹여 추문에게 들킬까 봐 고개를 돌린 그녀가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냈다. 다시 앞을 향해 걸어갔지만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고청접의 일은 비밀리에 진행되었지만, 수원상의 아버지와 남자 형제들 모두 조정 관리였기 때문에 그녀는 내막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그녀도 서글프긴 마찬가지였다. 어제의 고청접이 내일의 그녀가 될 수도 있다. 자신의 처지도 다를 게 없었다.
눈 앞에 펼쳐진 구불구불한 길은 그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길게 이어져 있었다. 그녀는 그저 멍하니 앞으로 걸어갔다. 얼음과 눈으로 뒤덮인 길을 걷는 것처럼 그녀의 몸이 차갑게 굳어 버렸다.
가을바람이 말라비틀어진 낙엽을 떨어뜨렸다. 누렇게 시들어 버린 나뭇잎은 바람에 휩쓸려 허공을 헤매다 유유히 그녀의 발밑으로 떨어졌다. 그녀는 발을 들어 올려 낙엽을 밟고 힘껏 짓이겼다.
아름다운 그녀의 두 눈에 사나운 빛이 스쳐 지나갔다. 아니, 그녀는 고청접이 아니다. 그녀는 대학사 가문의 장녀였다. 그녀는 고청접처럼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날 수 없었다!
* * *
묵용감이 성큼성큼 남월각으로 들어서자 정원에 있던 하인이 하나둘 다가와 인사를 올렸다. 그는 아무 소리도 내지 말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자신이 온 소식을 고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그는 직접 백천범의 방문 앞으로 가 조심스레 발을 걷어 올렸다. 역시나 그녀는 진지한 얼굴로 붓을 들고 있었다. 다만 한 획 한 획 긋는 모습이 글자를 쓰는 게 아니라 그림을 그리는 듯했다.
그가 조용히 안으로 들어갔다. 그를 발견한 월규가 인사를 올리려 했지만 눈짓 한 번에 방을 나섰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백천범은 새하얀 종이에 군데군데 까맣게 먹칠을 해 놓고 있었다. 다소 기이한 광경에 그가 불쑥 물었다.
“뭐 하는 것이오?”
온 정신을 붓끝에 집중하고 있던 백천범은 갑작스레 들려온 그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손을 움찔거렸고, 종이에 먹물 흔적을 남기고 말았다. 그녀가 그를 원망했다.
“왕야, 왜 기척을 내지 않으신 거예요. 이번에는 잘하고 있었는데, 망쳤잖아요.”
묵용감은 종이에 그려진 알 수 없는 먹칠을 뚫어지게 훑어보았다.
“온통 먹칠을 해 놓고 뭘 그리 망쳤다는 것이오?”
“어디가 먹칠이에요. 토끼를 그린 거라고요.”
그녀가 종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가 머리고 여기가 꼬리예요. 이건 뾰족한 귀고요. 똑 닮았죠? 하얀 토끼를 그리고 있었는데 왕야 때문에 다 망쳤어요.”
묵용감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랬다니 내가 잘못했군.”
그가 그녀의 머리를 상냥하게 쓰다듬었다.
“나가서 다른 이들에게도 한번 보여 주시오. 토끼를 그린 것이라고 누가 알아볼 수 있겠소?”
“왜 못 알아봐요. 월규도 아주 잘 그렸다고 했단 말이에요.”
백천범이 벽 쪽에 있는 토끼를 가리켰다.
“제가 직접 보면서 열심히 그린 건데 어떻게 안 닮을 수 있겠어요.”
“그만 두시오. 좋은 종이를 낭비하는 일이오.”
묵용감이 그녀의 붓을 뺏어 붓걸이에 걸었다.
“그림을 배우고 싶으면 조만간 스승을 붙여 주겠소.”
백천범이 손을 만지작거렸다.
“서왕비가 그림을 잘 그렸는데 저택을 나가서 아쉽네요.”
묵용감의 얼굴이 굳어졌다.
“갑자기 서왕비 얘기는 왜 꺼내는 것이오.”
백천범도 자신이 괜한 말을 했다는 걸 깨닫고 있었다. 그녀는 혀를 한 번 내밀었다가 고개를 들고 넉살 좋게 웃었다.
“왕야, 이곳엔 어쩐 일로 오신 거예요?”
묵용감은 가슴이 두근거려 안절부절못했다. 하고 싶었던 말을 내뱉으려는 순간, 괜스레 엄한 표정을 짓고 엉뚱한 말을 뱉어 버렸다.
“이렇게 연습해선 안 되겠소. 앞으로는 내 서재에 와서 연습하시오. 녹하의 시중을 받으며 조용히 연습해야 그나마 나아질 것이오. 내일부터 매일매일 임무를 주겠소. 그 임무를 다 마쳐야 밥을 먹을 수 있소.”
백천범이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런 법이 어디 있어요. 저는 한창 크는 중이잖아요. 밥은 잘 챙겨 먹어야 한다고요.”
“밥을 먹고 싶으면 열심히 연습하면 될 것 아니오. 다른 이도 아니고 초왕비가 지렁이같이 글씨를 쓰다간 남들의 비웃음을 살 것이오.”
백천범은 입을 삐죽거리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초왕비는 제가 되고 싶어서 된 것도 아닌걸요.”
조용히 내뱉은 말이었지만 묵용감의 귀엔 똑똑히 들려왔다. 안 그래도 자신이 없던 그의 마음이 더욱 초조해졌다. 하지만 그는 내색 하나 하지 않고, 뒷짐을 진 채 백천범이 그려 놓은 그림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는 무려 초왕이다. 그가 한 번 내뱉은 말은 엎질러진 물처럼 되돌릴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승산이 없는 싸움은 하지 않았다. 필요할 땐 악인이 되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더 물러설 수 없었던 그는 가볍게 헛기침을 한 뒤 아무렇지 않은 듯 물었다.
“그날 밤, 사장풍을 만나기 위해 저택을 나간 것이었소?”
“왕야, 이미 알고 계시잖아요?”
백천범은 종종 그의 의도를 알아채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아무리 철이 없는 그녀라 할지라도 묵용감 앞에서 사장풍 이야기를 꺼내면 안 된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그자에게 마음이 있는 것이오?”
“아뇨. 그날은 저 때문에 왕야한테 맞았으니까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그랬던 거죠.”
백천범은 묵용감에게 책임을 돌렸다.
“왕야께서 제게 더 일찍 말씀해 주셨더라면 저도 만나려고 하지 않았을 거예요.”
“맞소. 내 잘못이오.”
그는 그녀를 끌어당겨 자신의 옆자리에 앉혔다.
“왕비가 이 일을 걱정하니 알려 주겠소. 그자는 그리 심하게 다치지 않았고, 이미 건강을 회복했소.”
“정말요?”
백천범이 기뻐했다.
“정말 다행이네요.”
“그래도…….”
묵용감이 마른침을 삼켰다.
“그래도 아직 그자가 걱정되오?”
“이미 다 나았는데 뭐가 걱정되겠어요.”
백천범이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왕야는 제가 그자를 걱정하길 바라시는 거예요?”
“허튼소리.”
묵용감이 표정이 단호해졌다.
“그대는 나의 아내이거늘 어찌 다른 이를 걱정한단 말이오?”
백천범이 억울하다는 듯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런 적 없다니까요. 왕야, 앞으로는 그 누구라도 절대 걱정하지 않을게요.”
어쩐지 그녀의 대답이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 누구라도’라는 말에 그도 포함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녀의 지아비였다. 그녀는 항상 그를 생각하며 마음을 써야 했다. 그가 그녀에게 늘 그러듯이 말이다.
분명 눈앞에 있는데도 그는 언제나 그녀가 보고 싶고 걱정되었다. 어째서 그녀에게는 이런 애타는 마음이 없단 말인가?
묵용감은 백천범의 작은 손을 꼭 쥔 채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천범, 만약 지금 그대에게 지아비를 선택할 기회를 준다면 날 고를 것이오, 사장풍을 고를 것이오?”
백천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제가 선택을 한다고요?”
“예전에 내가 말하지 않았소. 훗날 그대에게 좋은 신랑감을 찾아 주겠다고. 지금 나도 그중 하나가 된 것이오. 나와 사장풍 중에서 그대가 직접 골라 보시오.”
태연하게 말했지만 그의 심장은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듯 요동치고 있었다.
백천범이 그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그다음에는요?”
“날 고르면 나와 함께 편안한 삶을 사는 것이오. 다른 것은 몰라도 안정적인 삶은 보장하겠소. 내가 그대를 어찌 대하는지는…….”
묵용감이 또다시 마른 침을 삼켰다.
“내가 그대를 어찌 대하는지는 그대도 잘 알 것이오.”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만약 사장풍을 택하면 나도 강요하지 않겠소. 그의 집에서 단출한 삶을 살게 되겠지.”
백천범은 그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 묵용감이 사장풍을 때린 게 며칠 전의 일이다. 그런데 지금은 직접 한 명을 고르라니…….
정말 고를 기회를 준다면 그녀는 사장풍이 조금 더 나을 것 같았다. 첩을 들이지 않은 점이 초왕보다는 더 나았으므로. 한창 생각에 잠겨 있는데 묵용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 생각해서 골라야 할 것이오. 왕비도 알다시피 난 별다른 문제는 없지만 가끔 변덕을 부리거나 성질을 참지 못하오. 그래서 했던 말을 잘 잊긴 하지…….”
백천범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그의 말을 듣고 있자니 왠지 조금…….
“사장풍도 괜찮은 사람이지만 나와 비교하면 여간 부족한 게 아니오. 나는 아무리 하찮은 원한이라도 꼭 갚는 사람이오. 만약 심기를 건드리는 자가 있거든 난 그자가 평생 불편한 삶을 누리게 할 수도 있소. 그자에게 성가신 일이 많으면 왕비의 삶도 그리 편친 않을 것이오…….”
묵용감도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말이 이어질수록, 그도 깨달았다. 그녀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고민하자 초조함을 못 이겨 위협과 협박을 서슴지 않은 것이다.
“알겠어요, 왕야.”
이제는 백천범도 그의 의도를 모를 리 없었다.
“왕야를 고를 거예요.”
사장풍을 골랐다간 두 사람 모두 제 명에 못 살 것이었다. 설사 묵용감이 목숨을 앗아가진 않아도 매일같이 괴롭힐 게 분명했다. 괴롭힘 속에서 자라 온 그녀는 그런 삶이 별로 두렵지 않았지만, 자신의 결정이 사장풍의 장래에 해를 끼칠까 봐 걱정되었다.
묵용감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그녀의 손을 놓았다. 그의 손은 이미 땀으로 흥건해져 있었다.
“결정한 것이오?”
“예. 전 왕야를 택할 거예요. 원래부터 초왕비였고 앞으로도 왕야의 초왕비가 될 거예요.”
백천범은 치맛자락에 축축해진 손을 슬쩍 닦았다. 땀이 이렇게 많이 나다니… 왕야도 영 몸이 허했다.
“난… 몰아세우지 않았소.”
“네, 안 몰아세우셨어요. 제가 선택한 거예요.”
“진심이오?”
그가 반짝이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진심이에요.”
백천범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모두 진심이었다. 그녀는 이미 충분했다. 그녀의 주변을 둘러싼 모든 것들이 차고 넘쳤다. 초왕이 또다시 첩을 들인다 해도 그녀가 평안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지켜 준다면 더 바랄 게 없었다. 지아비와 단둘이서 살아가는 단란한 삶은 다음 생에서 이루면 된다. 백천범은 그렇게 결정을 내렸다.
“내일 사장풍을 저택에 부르겠소. 그자에게도 분명히 알려 주시오.”
“내일 사 제독님이 저택에 온다고요? 무엇 하러요?”
“내가 제멋대로 혼사를 맺어 주려다 두 사람이 오해하게 되지 않았소. 그러니 얼굴을 맞대고 분명히 알려 주는 게 좋을 듯하오. 이제 왕비는 그자를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니 그자도 왕비에게 마음 쓸 필요 없다고 말이오. 두 사람은 이제 아무 사이도 아니니 이렇게 하는 편이 좋지 않겠소?”
백천범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왕야 말대로 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