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7화
가동은 격분하는 그의 모습에 주춤하며 물었다.
“대체 왕비 마마에 대한 감정이 언제 이렇게 깊어진 거야? 왕야께서 널 찾아가셨을 때만 해도 별로 내켜 하지 않았잖아.”
“그땐 정신이 잠깐 나갔었나 보지. 처음엔 잘 몰랐다가 뒤늦게 천범 아가씨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알게 됐어.”
“왕비마마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거야?”
“진심이야.”
“어디가 그렇게 좋은데?”
“어디든 다. 전부.”
가동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장풍아, 제발 정신 차려. 예전에는 어땠을지 몰라도 지금은 안 돼. 우리 왕야가 어떤 분인지 너도 잘 알잖아. 지금 왕야께서는 왕비마마를 누구보다 아끼신다고. 자칫하면 네 목이 날아갈 수도 있어.”
“상관없어.”
사장풍은 이미 자신을 지배한 감정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천범 아가씨는 내게 그렇게 잘해 주셨는데 난 아무것도 해 주지 못했어. 분명 지금도 고통스럽게 지내시겠지. 정말 무모하지 않아? 날 보러 오겠다고 한밤중에 뛰쳐나와 옥사에 갇혔다니. 하마터면 뻔뻔한 놈한테 희롱까지 당할 뻔했다며.
초왕이 오지 않았으면 어떻게 됐을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천범 아가씨는 잘 지내? 너한테 듣고 싶어서 와 달라고 한 거야. 초왕이 아가씨를 때리진 않았고?”
백천범이 옥에 갇힌 날 밤, 가동도 그 자리에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사장풍을 만나러 저택을 나온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기억을 맞춰 가던 가동이 입을 틀어막았다.
“설마, 널 때린 사람… 우리 왕야셔?”
사장풍이 눈을 희번덕거렸다.
“천범 아가씨만 아니었으면 나도 반격했을 거야.”
가동이 코웃음을 쳤다.
“반격? 네가 우리 왕야한테 반격할 수 있을 것 같아? 허세 부리지 마. 그러다 봉변당하는 거야!”
사장풍이 소리쳤다.
“초왕이 뭐 그리 대수라고? 그렇게 대단해서 천범 아가씨의 마음을 얻기라도 했대? 진정한 군자라면 천범 아가씨한테 직접 선택할 기회를 줘야지. 천범 아가씨가 초왕을 선택한다면 나도 깨끗하게 물러날 거야.
만약 천범 아가씨가 날 선택한다면 초왕에게 우리를 놓아 달라고 청할 거야. 그 후엔 관직에서도 물러나고 천범 아가씨와 먼 곳으로 떠나려고.”
가동은 그의 자신만만한 말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정말이야? 그렇게 힘겹게 올라간 자리를 버리겠다고? 네가 가문을 빛내기만 바라는 가족들은 어쩌고!”
“아내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면서 가문을 빛내는 게 무슨 소용이야?”
가동은 넋을 놓고 한참이나 그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참 대단하다. 말해 봐. 내가 어떻게 해 줬으면 좋겠는데?”
“천범 아가씨한테 내 얘기 좀 전해 줘. 난 잘 지내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비록 지금은 만날 수 없지만 내 마음은 늘 천범 아가씨께 있다고…….”
“그만!”
가동이 그의 말을 끊었다.
“그렇게 낯간지러운 말은 못 전해. 그냥 대충 의미만 전할게.”
사장풍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초조해하지 말고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전해 줘. 초왕의 심기를 건드리면 안 되니까. 내가 방도를 찾는 대로 아가씨를 데리러 가겠다고 말이야.”
가동이 창밖을 내다보며 물었다.
“이게 다지? 알겠어. 그럼 나도 이만 가 볼게.”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만.”
사장풍이 그를 불러 세웠다.
“아직 말 안 해 줬잖아. 천범 아가씨는 잘 지내시는 거 맞아?”
“아주 잘 지내셔. 날마다 식사도 잘 하시고, 온종일 회림각에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아. 안 좋은 기색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
가동이 소매를 흔들며 밖으로 나갔다.
“왕비 마마는 생각하지 마. 네 몸 회복에만 신경 써.”
조금 모자란 구석이 있는 가동도 이번만큼은 상황을 똑똑히 인지하고 있었다. 사장풍은 감정에 휩싸여 이성을 잃고 판단력이 흐려진 상태였다. 그러니 자신이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저택에 돌아온 가동은 사장풍의 말을 묵용감에게 전부 고했다.
사장풍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그의 부탁을 저버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가 백천범에게 전해 달라는 말은 단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가동의 말을 들은 묵용감은 화를 내기는커녕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리다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이내 또다시 탁자를 두드리다 미소를 짓길 반복했다. 꼭 아주 우스운 얘기라도 들은 것 같은 표정이었다.
“왕야.”
가동이 사장풍을 대신해 묵용감에게 청했다.
“왕야, 노여움을 푸시옵소서. 사장풍이 머리를 다쳤는지 제정신이 아닌 듯했습니다. 굳이 그런 얼빠진 놈에게 신경을 쓰실 필요 있겠습니까?”
“왕비가 직접 선택할 수 있게 해야 공평하다?”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지금은 완전히 얼이 빠진 상태입니다. 부디 신경…….”
“왕비가 그자를 택하면 멀리 떠날 수 있게 놓아 달라 하겠다?”
“왕야, 전부 헛소리일 뿐입니다. 사장풍은 거의 미치기 직전이었습니다…….”
“왕비가 본왕을 택하면 깨끗이 물러난다고 하였느냐?”
“예.”
“좋다!”
묵용감이 매섭게 탁자를 내리쳤다.
“그자의 말대로 왕비에게 선택할 기회를 주겠다. 본왕도 왕비가 택하는 대로 내버려 둘 것이다. 권력만 믿고 업신여긴다는 말은 면해야지!”
가동의 입이 떡 벌어졌다. 한참이나 멍하니 묵용감을 바라보던 그가 겨우 입을 열었다.
“와, 왕야. 진심이십니까?”
“본왕이 뱉은 말에 책임을 지지 않은 적 있었더냐?”
묵용감이 턱을 만지작거렸다.
“가서 전하거라. 내일 본왕이 사람을 보낼 테니 저택으로 와서 왕비가 누굴 택하는지 직접 확인하라고!”
밖으로 나온 가동은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상할 수가 없었다. 사장풍의 말대로라면 왕비는 분명 그를 택할 것이었다. 이미 사랑의 증표도 주고받았고, 밖에서 밀회까지 가질 정도로 마음이 통한 상태가 아닌가.
왕비와 초왕은… 왕비에 대한 초왕의 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한밤중에 정인을 만나러 간 왕비에게 모진 말은커녕 잠든 왕비가 깰까 봐 조심스레 그녀를 안고 방으로 향하던 초왕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가동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예정된 사장풍의 비극이 가엽기도 하고, 그들의 복잡한 관계가 비통했다. 그에 비하면 자신의 상황은 평온했다. 적어도 다른 사내가 녹하를 넘보는 일은 없었으니.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마침 옆방에서 녹하가 나왔다. 그녀는 그를 힐끔 바라보고 곧장 연못으로 향했다.
가동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녀의 눈빛이 평소와는 조금 달라 보였다. 당장 초왕의 말을 전하러 가야 했지만 그는 강아지처럼 그녀의 뒤를 쫓았다.
녹하가 연못에 먹이를 뿌리자 물고기들이 앞다투어 먹이를 쟁탈하기 시작했다. 곁눈질로 힐끗 가동의 모습을 본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동이 손을 비비며 헤헤 웃었다.
“녹하야, 물고기 먹이 주는구나.”
녹하가 코웃음을 쳤다.
“돼지 먹이 주거든.”
“누가 봐도 물고기잖아.”
가동이 넉살 좋게 웃어 보였다.
“또 날 놀리긴.”
“알면서 뭘 물어.”
녹하는 품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그의 손에 밀어 넣었다.
“이번 한 번만이야. 다음은 없어.”
말을 마친 그녀는 그대로 발걸음을 돌렸다.
가동이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헝겊으로 만든 신발이었다. 지난번에 그녀에게 신발을 만들어 달라고 사정했을 땐 들은 체도 않더니, 드디어 만들어 주었다. 그는 신발을 받쳐 들고 바보처럼 실실 웃었다. 이번 한 번은 무슨, 녹하는 늘 속마음과 다른 말을 즐겨 했다.
* * *
묵용감은 가동에게 위엄 있는 태도를 보였지만, 사실 자신이 없었다. 백천범은 애초에 초왕비가 되는 걸 달가워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녀는 아직 사장풍을 마음에 품고 있는지도 몰랐다. 한밤중에 사장풍을 찾아 나선 행보가 그 사실을 증명했다.
사장풍은 그와 비교조차 불가능한 보잘것없는 사내였지만, 유일하게 그보다 뛰어난 점이 하나 있었다. 사장풍은 첩이 없고, 묵용감은 여전히 후원에 측왕비를 두고 있었다.
사장풍이 자신이 내뱉은 말로 스스로의 입을 막아야 후환을 없앨 수 있었다. 다만 백천범이… 그가 바라는 대로 해 줄지 의문이었다.
한참 동안 자리에 앉아 있던 그가 학평관을 불렀다.
“왕비는 무얼 하고 있느냐?”
“왕비 마마께서 숙제를 다 하지 못하셨다며 오늘은 올 수 없으시다고 합니다.”
묵용감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몇 글자 알려 주고 열심히 연습하라는 말이 어느새 그녀에게 숙제가 되어 있었다.
가만 보면 백천범은 정말 쉴 틈이 없었다. 그녀는 매일 무술도 연마하고, 토끼와도 시간을 보내야 했다. 여기에 붓글씨 연습과 산책을 하고, 밥까지 꼬박꼬박 챙겨 먹어야 하니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보러 올 시간이 없다면 그가 찾아가면 그만이었다.
* * *
그는 후원에 들자마자 수원상과 마주쳤다. 그녀에게 외출 금지를 내린 이후로 만나지 않은 터라, 묵용감의 표정이 굳었다. 거의 그녀를 잊고 있었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수원상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백천범이 실종되었을 때 그녀는 무성의한 태도를 보였다. 그래도 한동안 체면을 구기고 고생을 했으니 적당한 벌을 받은 셈이다.
하지만 그는 그녀에게 죄책감도 가지고 있었다. 그녀를 저택에 데리고 온 일은 그의 과실이었다. 마땅한 절충안을 찾아 거처를 마련해 주려 했지만 지금은 방법을 모색해 그녀를 저택에서 내보내는 일이 시급했다.
그를 발견한 수원상이 눈을 내리깔고 다가와 인사를 올렸다.
“일어났소?”
묵용감이 따뜻한 말투로 물었다.
“어딜 가는 것이오?”
“소첩, 그저 발길 닿는 대로 거니는 중입니다.”
수원상의 안색은 평온해 보였고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왕야, 남월각에 가시는 것입니까?”
“그렇소. 왕비를 보러 가는 길이오.”
“그렇군요. 소첩 왕야의 시간을 빼앗지 않겠습니다. 조심히 가십시오.”
그녀는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며 한쪽으로 비켜섰다.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예전처럼 반짝이지 않았다.
묵용감도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은 그녀에게 상처를 주었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이기적이다. 그의 마음은 한 사람밖에 담을 수 없어서 다른 여인이 들어올 자리가 없었다.
그녀를 지나쳐 천천히 걸어가다 뒤를 돌아보았다. 수원상과 사장풍을 맺어 주려고 생각했지만 많은 일이 생긴 탓에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 또다시 그 생각이 맴돌았다.
사장풍은 관직이 낮아도 젊은 인재였다. 조금만 더 분발하면 조만간 큰일을 할 터였다. 게다가 수원상은 재혼이니, 제법 적합한 혼사가 될 수 있다.
사장풍에게도 좋은 일이 아닌가. 수원상은 명문가의 규수였다. 무려 대학사가 장인이니 장래는 고민할 것도 없었다. 게다가 단아한 외모에 늘씬한 몸매까지, 백천범 같은 계집아이보다는 더 나을 것이었다.
물론 그의 눈에는 백천범이 최고였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