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6화
사장풍의 의도를 알아차린 공춘홍은 경악하며 고개를 저었다.
“초왕야의 호위무사 가동 나리 말입니까? 나리, 어째서 단념하지 않으신단 말입니까? 만약 왕야께서 이 사실을 아신다면 내버려 두시겠습니까?”
사장풍은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공춘홍을 바라보았다. 그는 정말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상관없었다.
“내 아내를 빼앗으려 하는데 가만히 있어야 한단 말이냐?”
공춘홍이 손을 뻗어 그의 이마를 짚었다.
“열도 없는데 어찌 말도 안 되는 소릴 하십니까. 나리, 초왕비가 어째서 나리의 아내입니까? 초왕비는 초왕야의 아내입니다.”
“내 아내다.”
사장풍이 이를 꽉 깨물고 분노에 찬 음성을 내뱉었다.
“초왕이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지 않고, 억지로 우리 사이를 갈라놓았단 말이다!”
공춘홍은 그가 언성을 높이자 서둘러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나리, 제발 그만하십시오. 누가 들었다간 곧바로 목이 날아갈 것입니다!”
사장풍은 목을 꼿꼿이 세우고 확고하게 말했다.
“어차피 죽기밖에 더하겠느냐. 나는 두렵지 않다. 아내 하나 지키지 못하면 사내라 할 수 있느냐? 초왕은 좋은 팔자로 태어나 능력 좋은 황족인지 몰라도 나와 겨뤄 보면…….”
공춘홍은 서둘러 그의 말을 잘랐다.
“겨룬다 한들 나리는 초왕야의 적수가 되지 못합니다. 안 그랬다면 나리께서 이렇게 다치셨겠습니까?”
“그땐 내가 방어할 겨를이 없었다.”
사장풍의 목소리에서 가라앉지 않는 분노가 느껴졌다.
“초왕이 진정한 군자라면 어떠한 강압도 없이 왕비 마마께 지아비를 직접 고를 기회를 주어야 한다. 왕비 마마께서 누구를 고르시는지 보면 알겠지.”
“나리, 정말 자신 있으신 것입니까?”
사장풍이 소중히 간직한 주머니를 내보였다.
“보아라, 왕비 마마께서 주신 사랑의 증표다.”
주머니를 자세히 살핀 공춘홍이 웃으며 말했다.
“나리께서 어찌 이리 보잘것없는 주머니를 들고 다니시나 했더니, 사랑의 증표였군요.”
사장풍이 그의 옷깃을 틀어쥐었다.
“뭐라 하였느냐?”
공춘홍이 큰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참으로 정교한 주머니라 하였습니다. 자수 솜씨가 아주 훌륭합니다.”
한마디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는 걸 보니 사장풍이 왕비를 사랑하는 마음이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있었다. 공춘홍은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일은 애당초 그가 덤빌 수 있는 사건이 아니었다.
아무리 친분이 있다고 해도 사장풍의 명을 거역할 수 없던 공춘홍은 가동을 만나기 위해 오문으로 향했고, 사장풍의 말을 한마디도 빠짐없이 전했다.
사장풍이 심하게 다친 일을 가동이 모를 리 없었다. 이미 문무백관 사이에서 소문이 파다한 사건이었다. 무엇보다 그와 사장풍은 허물없이 친한 사이인 데다 동향이었다. 소식을 들은 가동은 병문안을 가기 위해 진즉 초왕에게 휴가를 청했었지만, 단칼에 거절당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계속 그를 걱정하고 있던 차에 공춘홍이 찾아와 소식을 전해 주었다. 당장 사장풍을 찾아갈 생각으로 영구에게 알리고 길을 나서려는 찰나, 영구가 그를 붙잡았다.
“가시면 안 됩니다!”
가동이 영구를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왜? 잠깐이면 돼. 왕야께서 조회를 마치시기 전에 돌아올게.”
영구가 무표정으로 말했다.
“다 형님을 위해서 하는 말입니다.”
가동은 영구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제대로 좀 말해 봐. 대체 뭐가 날 위해서라는 건데?”
가동보다 상황 파악이 더 빨랐던 공춘홍이 하하 웃으며 말했다.
“어쨌든 저는 제독 나리의 말씀을 다 전했습니다. 당장 가지 않으셔도 됩니다. 가동 나리께서 짬이 나실 때 오셔도 상관없을 테니까요.”
가동과 영구는 초왕의 신임을 받는 측근이었기 때문에 하급 관리들은 그들에게 예를 갖춰 나리라는 호칭을 썼다. 특히 영구는 호리호리한 체격에 나이도 어렸지만 차갑게 굳은 얼굴이 초왕의 살기 어린 모습과 똑 닮아, 저절로 예를 갖출 수밖에 없었다.
공춘홍은 예를 갖춰 두 호위무사에게 인사를 한 뒤 발걸음을 돌렸다.
가동이 식식거리며 영구에게 물었다.
“너, 똑바로 말해 봐. 왜 내가 사장풍을 만나러 가면 안 된다는 건데?”
영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동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어찌나 차가운지 가동도 섬뜩함을 느꼈다.
“그렇게 보면 뭐 어쩔 건데?”
영구가 그제야 입을 열었다.
“어느 쪽이십니까?”
“뭐가 어느 쪽이라는 거야?”
가동이 그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똑바로 좀 말해 봐. 두루뭉술하게 말하지 말고.”
영구는 그저 고개를 치켜세우고 가만히 정면만 응시할 뿐이었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을 바라보니 묵용감이 서쪽 측문으로 나오고 있었다. 가동이 깜짝 놀라며 말했다.
“왕야께서 오늘은 일찍 나오셨네.”
가동이 영구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너 정말 귀신같다. 왕야께서 바로 나오실 걸 알고 못 가게 한 거지?”
영구는 그를 한 번 흘겨본 뒤 말을 끌고 묵용감에게 향했다.
묵용감은 두 사람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무표정해 보였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눈매에 옅게 온화함이 묻어 있었다. 기분이 좋은 듯했다.
가동은 그 틈을 타 휴가를 청했다.
“왕야, 소인 휴가를 내려고 합니다…….”
그가 운을 떼자마자 묵용감이 미간을 찌푸렸다.
“사장풍을 만나러 가려는 것이냐?”
가동은 심장이 쿵쿵 뛰었지만 사실대로 털어놓을 생각이었다. 초왕의 면전에서 감히 잔꾀를 부릴 수도 없었다. 그가 두 손을 맞잡고 공손하게 청했다.
“왕야, 사실 사 제독이 전갈을 보냈습니다. 소인을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소인은 사 제독과 동향입니다. 상태가 이렇게 위중하니 병문안을 가야 도리에 맞는 일입니다. 집에서는 부모에게 의지하고 밖에서는 친구에게 의지하라는 속담도 있지 않습니까. 만약 사 제독이 소인에게 부탁할 일이라도 있는 것이라면…….”
묵용감의 미간이 점점 더 좁혀졌다.
“사 제독이 전갈을 보내 자신을 찾아오라 했다?”
“예, 맞습니다. 방금 들은 소식입니다. 영구도 알고 있습니다.”
묵용감도 가동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큰소리로 헛웃음을 지었다.
“최후의 발악이라도 하려는 것인가?”
“예? 왕야, 누구를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옆에 있던 영구가 매서운 눈빛으로 그를 흘겨보았다.
묵용감은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사 제독이 부탁할 게 있다고 하니 가 보거라. 대신, 그자의 말을 똑똑히 듣고 본왕에게 하나도 빠짐없이 고하거라.”
가동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눈만 굴렸다.
“왕야, 어째서…….”
별안간 가동이 자신의 머리를 때리며 모든 걸 깨달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장풍을 그렇게 만든 범인을 잡아들이지 못해서 그러시는 것이지요? 사장풍의 말을 토대로 범인에 대한 실마리를 찾으시려고요?”
당장이라도 가동을 걷어차지 못해 한스러워하며 영구가 묵용감의 눈치를 살폈다. 정작 묵용감의 얼굴엔 웃음기가 묻어 있었다.
“아니, 틀렸다. 본왕이 보기에 사장풍은 기억력이 좋지 않은 듯하구나. 충분히 깨닫지 못한 것 같으니 다음번에는 열흘 정도는 입을 열 수 없게 혼을 내 주어야겠다.”
가동이 또다시 물어보려는데 묵용감이 성가시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만 가 보거라, 지체하지 말고 돌아와야 한다.”
가동은 대답을 올린 뒤 말을 타고 순포오영五營 관청으로 향했다. 사장풍은 관청 뒤뜰에서 묵고 있었다. 아직 혼인을 치르지 않은 그는 따로 집을 마련하지 않고 관청 후원에 딸린 곁채에서 지냈다.
가동은 뒷문으로 들어가 좁은 담장 길을 따라 쏜살같이 안으로 들어갔다. 마침 공춘홍이 사장풍의 방 안에서 나오고 있었다.
“가동 나리 오셨습니까, 어서 안으로 드십시오. 제독 나리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가동이 웃으며 그에게 예를 갖췄다.
“사장풍도 참, 이런 일은 하인들에게나 시킬 것이지. 공 나리께서 고생이 많으십니다.”
“고생이라니요.”
공춘홍도 가동에게 예를 갖췄다.
“제독 나리께서 명하시면 소인은 불바다라도 뛰어들 것입니다.”
그가 가동에게 가까이 다가와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가동 나리, 저희 제독 나리 좀 잘 타일러 주십시오. 강요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겠지만요. 어서 안으로 드십시오.”
가동은 더 묻지 않았다.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서둘러 사장풍을 만나고 싶었다. 가동이 웃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사장풍은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몸을 축 늘어뜨리고 있었다. 예전의 위풍당당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비쩍 마른 그였다. 몸만 다친 게 아니라 영혼까지 상처를 입은 듯 퀭한 눈에 빛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었다.
가동이 그에게 평소처럼 농을 건넸다.
“아이고, 상사병이라도 걸린 줄 알겠네. 그 애절한 눈빛 좀 어떻게 해 봐. 사내가 꼴이 이게 뭐냐.”
사장풍이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백천범의 일로 불렀는데 어찌 감정을 숨길 수 있을까.
“대단한데. 맞아, 상사병이야.”
“말해 봐, 누가 그렇게 보고 싶은데? 임안성에 예쁜 아가씨들이 많긴 하지. 대체 어느 집 아가씨가 마음에 든 건데?”
“너희 집 아가씨.”
“누구?”
가동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우리 집?”
사장풍이 그를 흘겨보았다.
“다 알면서 물어보네.”
가동이 뒤늦게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설마 왕비 마마를 말하는 거야?”
그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았다.
“아직 모르는구나. 왕야께서 왕비 마마를 좋아하셔. 왕비 마마를 내보내는 일도 없을 테니 쓸데없는 희망은 품지 마.”
사장풍이 주머니를 만지작거렸다.
“너희 왕야도 참 부덕하다. 내 아내를 뺏어가다니.”
“왕비 마마가 왜 네 아내야?”
가동이 언짢은 듯 쏘아붙였다.
“우리 왕야의 아내시지. 꽃가마를 타고 정식으로 혼사까지 치르셨다고.”
사장풍이 그의 말을 맞받아쳤다.
“초왕야가 직접 맞이한 것도 아니었잖아. 진왕야께서 왕비 마마를 데려오시는 걸 내가 똑똑히 봤어.”
“그게 뭐 어쨌다고? 우리 왕야께서 직접 맞이하시진 않았어도, 혼사는 왕야께서 치르셨으니 문제 될 거 없지.”
가동이 사장풍의 어깨를 토닥였다.
“이제 포기하고 왕비 마마는 생각하지 마. 왕야와 왕비 마마는 어엿한 부부라고. 네가 끼어들 자리가 아냐!”
사장풍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왕비 마마와 헤어질 거란 얘기는 누가 했는데? 왕비마마의 부군을 찾아주실 거라는 말은 누가 했고? 날 계속 찾아와서 내 정보를 캐물은 건 누구지? 왕비마마를 내게 보낼 것처럼 행동한 사람은 누군데?”
말문이 막힌 가동은 멋쩍게 웃었다.
“그땐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지. 같이 지내다 보면 감정이 생길 수도 있잖아. 왕야를 탓할 순 없는 거라고.”
“그럼 날 탓해야 하는 거야?”
사장풍이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감정? 감정도 순서가 있지. 초왕은 나와 천범 아가씨의 마음이 통한 다음에 끼어든 거라고. 권력을 휘두르면서 날 업신여기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