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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95)화 (194/1,192)

제195화

결국 술이 풀리지 않자 백천범은 한숨을 내쉬며 시큰거리는 손을 탈탈 털었다.

“왕야, 조복은 정말 벗기 힘든 옷이네요.”

“그만하시오.”

마침내 입을 연 묵용감이 그녀의 팔을 받쳐 들었다.

“아프오?”

“네. 너무 저릿해요.”

백천범이 손을 아래로 늘어뜨렸다.

“사내들 옷은 다 이렇게 벗기 힘든 것이에요? 아내들 고생이 정말 이만저만이 아니네요.”

묵용감이 그녀를 흘겨보며 말했다.

“자신이 못하는 걸 옷 탓으로 돌리려는 것이오? 왕비처럼 하는 사람은 처음 봤소.”

얼굴이 빨개진 백천범은 쉽사리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언제 왕야도 제 옷 좀 갈아입혀 주세요. 얼마나 잘하시나 봐야겠어요.”

묵용감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좋소. 오늘 밤 이곳에서 묵으시오. 내가 왕비의 환복을 돕지. 어떻소?”

두 사람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즐거워했지만 자리를 지키고 서 있던 기홍은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함께 침소에 들 때나 주고받는 말을 그녀 앞에서 하다니!

한바탕 소란 끝에 묵용감은 환복을 마쳤고, 기홍은 물을 떠 와 그의 세안 시중을 들었다. 그때 묵용감은 백천범의 입가에 묻어 있는 과자 부스러기를 발견했다. 아마 그가 돌아오기 전에 먹은 것 같았다. 그는 젖은 수건으로 직접 그녀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그 모습에 기홍은 헉 소리가 절로 나왔다. 초왕이 세안 수발까지 들다니, 정말 대단한 왕비였다.

세안을 마친 두 사람은 서재로 향했다. 녹하가 먹을 갈기 위해 안으로 들어왔지만 묵용감이 다시 밖으로 내보냈다. 백천범과 단둘이 있기 위해서였다.

직접 옷소매를 접어 올린 그가 종이를 펼치고 먹을 갈았다. 그리곤 붓끝에 먹물을 찍어 ‘감’ 자를 썼다.

백천범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왕야, 방금 연습을 하기 시작했는데 이렇게 어려운 글자를 쓰라고 하시면 어떡해요. 모양도 이상하고 획수도 너무 많잖아요. 전 못 써요.”

그녀는 글을 익히긴 했지만 몇몇 생소한 글자는 알지 못했다. 낯선 글자를 보자 거부감이 들었는지 거침없이 내뱉었다.

묵용감의 얼굴이 굳어졌다.

“어디가 이상하다는 것이오?”

백천범은 그의 표정이 변한 것도 모른 채 떠들어 댔다.

“제가 보기에는 너무 이상하게 생겼어요. 다른 글자로 써 주세요.”

묵용감이 그녀의 머리에 꿀밤을 주며 말했다.

“이상하긴 뭐가 이상하다는 것이오. 내 이름이지 않소.”

백천범은 화들짝 놀랐다.

“어쩐지, 왕야께서 워낙 대단하시니 이름까지 이렇게 복잡하네요. 다시 보니까 전혀 안 이상해요. 위풍당당해 보이고 장군다운 느낌이에요.”

그녀는 뻔뻔스럽게 아부를 하며 즐거워했다. 그녀가 우습고도 사랑스러워 묵용감은 그녀의 코끝을 움켜쥐었다.

“이리 자유자재로 말을 바꾸다니, 처신술이 보통이 아니군.”

그가 다시 붓을 들고 ‘천범千帆’을 적었다.

“본인의 이름은 쓸 수 있소?”

“네.”

백천범이 서둘러 붓을 집어 들었다.

“보여 드릴게요.”

백 승상이 내킬 때마다 쓰는 법을 가르쳐 준 덕분에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쓸 수 있었다. 다만 종이와 붓이 없어 바닥에 나뭇가지로 연습한 게 전부였다. 막상 붓을 들어도 나뭇가지로 쓰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붓글씨의 정취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고, 획의 굵기 또한 하나같이 일정했다.

지켜보던 묵용감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가 그녀의 손을 잡고 천천히 가르쳐 주었다.

“삐침을 쓸 땐 힘을 주어 내려가다 스치듯 가볍게 거두어들이시오. 가로획은 평평하게 그어야 하오. 처음에는 각이 진 모양으로 썼다가 붓을 들어 올릴 땐 봉우리를 만들어 보시오. 세로획은 곧게 뻗어야 하오. 마지막까지 힘을 주고 쓰다 뾰족한 꼬리를 만들어 보시오.”

그가 손을 풀었다.

“직접 써 보시오.”

백천범은 경건한 자세로 임했다. 숨을 죽인 채 ‘천’ 자를 쓴 그녀는 만족스러워했지만 묵용감은 이것저것 트집을 잡았다.

“이 삐침 좀 보시오. 자세히 보지 않으면 ‘간’ 자를 쓴 줄 알겠소. 글자는 그 사람의 품격을 나타내는 법인데 정말 왕비처럼 무미건조하지 않소.”

그녀는 그의 말에 동의하지 않으며 고개를 저었다.

“제 눈에는 예쁘기만 한걸요.”

“이게 예쁘단 말이오? 차 씨가 쓴 게 더 낫겠소.”

묵용감이 코웃음을 쳤다.

“측왕비와 견주어 본다면 한 명의 실력은 하늘이고 다른 한 명은 땅…….”

그때, 백천범이 붓을 책상에 탁 내려놓더니 작은 투계처럼 그를 노려보았다.

“측왕비가 그렇게 잘 쓰면 측왕비한테 쓰라고 하시면 되겠네요. 전 안 쓰면 될 거 아니에요!”

묵용감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심코 나온 말에 불쑥 화를 낸다. 설마 측왕비에게 질투를 하는 것일까?

부풀어 오르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그는 품에 그녀를 안고 활짝 미소 지었다.

“측왕비의 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내 눈엔 차지도 않소.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은 왕비가 쓴 것이오.”

* * *

그날 사장풍은 피범벅이 된 채 바닥에 쓰러져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찻물을 들고 안으로 들어오던 극장 점원이 그를 발견하고 소리를 질러 댔다. 극장 주인은 곧바로 관청에 사람을 보내 이 사실을 알렸다.

극장에 파견된 순포는 마침 사장풍의 수하였다. 쓰러진 직속 상관을 보고 그는 곧장 의원을 불러 치료한 뒤 극장을 봉쇄했다. 극장 주인과 점원을 일일이 심문하였지만 아무리 추궁해도 피부가 하얀 젊은 여인이 그 방을 예약했고, 시녀 한 명을 데려왔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사장풍의 수하가 그에게 탕약 두 사발을 흘려 넣어 준 덕에 그는 밤이 되어서야 겨우 정신을 되찾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에게 해를 가한 강도에 대해 한마디 언급도 하지 않았다. 말수까지 줄어들었는지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사장풍의 조수는 공춘홍龔春泓이란 자였다. 평소 사장풍과 친분이 두터웠던 그는 심하게 다친 사장풍의 모습에 그 강도를 꼭 붙잡고 싶었다. 하지만 유일하게 사건의 내막을 알고 있는 사장풍이 입을 열지 않으니 좀처럼 진척이 없었다.

날마다 찾아오는 공춘홍이 성가셨던 사장풍은 강도가 한 짓이 아니라 자신이 이 꼴을 만들었다고 둘러댔다.

하지만 그의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체 누가 스스로를 이 지경까지 때린단 말인가? 아무리 물어도 입을 다문 사장풍 때문에 그날 발생한 사건은 미궁에 빠지고 말았다.

체력이 좋았던 사장풍은 빠르게 회복했다. 그는 이틀도 지나지 않아 걸어 다닐 수 있게 되었지만, 회복한 뒤로 어딘가 풀이 죽은 듯했다. 수염까지 덥수룩하게 자라니 하루아침에 열 살은 더 나이가 들고 꾀죄죄해 보였다. 말수까지 줄어든 탓에 늠름했던 청년 호걸이 다소 어수룩한 사람으로 변해 버렸다.

그 모습이 안타까웠던 공춘홍이 줄곧 그의 말동무가 되어 주었다. 하지만 사장풍은 창밖만 멍하니 바라볼 뿐, 공춘홍의 말은 귀담아듣지도 않았다. 공춘홍은 개의치 않고 생각나는 말을 계속 내뱉었다.

“이틀 전에 웬 눈치 없는 놈이 초왕비를 강도로 알고 부윤 대감께 끌고 갔지 뭡니까. 부윤 대감이 초왕비를 옥에 가두었는데 다행히 초왕야가 찾아와 모셔 갔다고 합니다.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이 날 뻔했다더군요.

소문에 옥사쟁이가 여색을 밝히는 놈이라 감히 왕비를 건드리려고 했는데, 초왕야께 걸려 그 자리에서 팔이 부러졌다더군요. 지금은 거리를 전전하는 거지가 되었다고 합니다…….”

별안간 사장풍이 고개를 돌려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뭐라 하였느냐? 초왕비께서 옥에 갇히셨다고?”

놀란 공춘홍이 얼른 대답했다.

“오해였습니다. 초왕야께서 그날 밤 바로 데려가셨으니 그리 고생하진 않으셨을 것입니다.”

“어쩌다 왕비 마마를 잡은 것이란 말이냐?”

“저도 답답해 죽겠습니다. 한밤중에 초왕비께서 성문으로 찾아와 나리에 관해 물으셨답니다. 나리의 상태가 위중한지도 물으셨다는데요? 정말 이상합니다. 초왕비께서 나리가 다치신 걸 어찌 아셨단 말입니까?”

백천범을 생각하면, 사장풍은 심장에 구멍이 뚫리고 그 사이로 바람이 부는 것만 같았다. 그가 눈썹을 찌푸렸다.

“초왕비께서 나에 대해 물어보셨다고? 그게 언제 일이냐?”

“그제 밤입니다. 축시쯤이지요. 행인 하나 없는 오밤중에 별안간 초왕비께서 나타나 나리에 관해 물어보시니 사병들이 의심한 것입니다.”

공춘홍이 슬쩍 사장풍을 살피며 물었다.

“나리, 초왕비와 친분이 있으신지요? 극장 점원 말이 나리께서 웬 아가씨와 함께 계셨다던데 혹 그분이 초왕비이십니까?”

“건방지다!”

낯빛이 어두워진 사장풍이 낮은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한 번만 더 초왕비께 누가 되는 헛소리를 지껄였다간 네 혀를 잘라 버릴 것이다.”

공춘홍은 생각이 깊고 섬세한 사람이었다. 며칠 동안 고민한 끝에 그는 이번 일이 평범한 사건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게다가 사장풍의 기이한 행동까지 종합해 보면 무엇인가 말 못 할 속사정이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사장풍의 속내를 알아보기 위해 일부러 이 이야기를 꺼냈다. 과연, 그의 반응을 보니 자신이 추측했던 상황이 얼추 들어맞는 듯했다.

조정 관리를 폭행하는 일은 대죄였다. 무려 구문제독이 폭행을 당하고도 아무 말도 못 한다면 분명 도리에 어긋난 일을 한 것이었다.

그는 차분하게 사건을 정리했다. 사장풍은 극장에서 한 여인과 만나기로 했고, 여인의 부군에게 발각되어 호되게 구타를 당한 것이었다. 무관인 사장풍에게 이렇게 큰 해를 입힌 걸 보면 분명 평범한 자의 소행은 아니었다.

게다가 초왕비가 한밤중에 사장풍을 찾았으니 답은 뻔했다. 사장풍을 저렇게 만든 이는 다름 아닌 초왕이었다!

한편 사장풍은 온몸으로 고통스러워했다. 그날 초왕의 분노가 혹여 백천범에게 향하지 않았을까 줄곧 노심초사했다. 자신이 벌을 받는 것은 상관없었지만 작고 여린 백천범이 만약 손찌검이라도 당했다면… 쉽게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몰래 빠져나와 그를 찾아오려고 했다니! 여러 감정이 뒤섞이며 가슴이 뭉클해졌다. 백천범이 그를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에 행복한 기분이 들다가도 초왕에게 혼이 났을 거라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졌다.

분명 모든 게 완벽하게 이루어질 터였다. 그런데 초왕이 태도를 바꾸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여동생에서 갑자기 아내가 되다니……. 초왕이 권력을 휘둘러 그의 아내를 빼앗으려는 게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가여운 백천범은 지금쯤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그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주머니를 떼어 내 손에 꽉 움켜쥐었다. 그녀는 큰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그를 만나러 했건만, 그는 이곳에 처박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녀에 비하면 그는 정말 사내도 아니었다!

그의 고통과 슬픔을 한눈에 알아차린 공춘홍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리, 그만 생각하십시오. 나리께서 넘보실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정확히 언급하진 않았지만 사장풍은 분명 그의 말뜻을 이해할 것이었다.

사장풍은 그와 형제처럼 가까운 사이였다. 그가 모든 사실을 알아차리자 사장풍도 더 이상 감추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게다가 다른 이들에게 말하기 껄끄러운 일인 만큼 공춘홍의 도움이 절실했다.

“내일 진시에 오문으로 가서 가동에게 나를 보러 오라고 전하거라. 의논할 게 있으니 반드시 와야 한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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