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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94)화 (193/1,192)

제194화

백천범이 밤새 돌아오지 않아 남월각의 노비들은 거의 초주검이 될 만큼 겁에 질려 있었다. 그중에서도 월규와 월향이 가장 애를 태웠다. 학평관에게 붙잡혀 있던 두 시녀는 정오가 되어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기이했던 점은 학평관이 처벌은커녕 아무런 말도 없이 풀어 주었다는 것이었다. 두 시녀는 어리둥절해하면서 남월각으로 돌아왔다.

감히 회림각의 상황을 살필 수 없었던 두 시녀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왕비를 기다렸다. 곧 백천범이 쏜살같이 정원으로 뛰어 들어왔고, 두 시녀는 급히 달려 나가 그녀를 맞이했다.

“왕비 마마, 돌아오셨군요. 애간장이 녹아 죽는 줄 알았습니다.”

백천범도 저택의 규율을 알고 있었다. 주인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노비들이 벌을 받아야 했다. 그녀는 서둘러 두 시녀를 살폈다.

“어디 맞은 곳은 없지?”

“없습니다.”

월향이 말했다.

“노비가 잠에 취해 주인이 나가는 것도 알지 못했으니 맞아도 당연합니다.”

백천범은 조금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말했다.

“내 실력은 왕야께서도 잘 아시니까 너희를 벌할 수 없으셨을 거야.”

정원에는 듣는 귀가 많았기 때문에 월규는 방에 들어간 뒤에야 방문을 걸어 잠그고 그녀에게 물었다.

“왕비 마마, 어젯밤 어딜 가신 것입니까?”

월규의 근엄한 표정에 뜨끔한 백천범이 헤헤 웃으며 말했다.

“그냥, 잠이 안 와서 산책 좀 하러 간 거지.”

“사 제독을 만난 것입니까? 병세가 위중하다는 말에 그자를 보러 간 것이지요?”

내막을 알지 못했던 월향은 깜짝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사 제독이 누구입니까?”

백천범이 시선을 피하자 더욱 확신한 월규가 허벅지를 내리치며 말했다.

“아이고, 왕비 마마,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단 말입니까? 이러시면 왕야는 뭐가 됩니까?”

백천범은 풀이 죽어 대답했다.

“너무 뭐라고 하지 마. 어차피 사 제독님은 못 만났으니까. 나간 지 얼마 안 돼 옥에 갇혀 있었단 말이야. 벌을 받은 셈이지, 뭐.”

“만나지 못하셨다니 다행입니다. 만약 그자를 만나셨다면…….”

월규가 차갑게 웃어 보였다.

“사 제독이란 사람의 목이 그대로 날아갔을 것입니다.”

잠자코 듣고 있던 월향은 어떻게 된 상황인지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왕비 마마께서 왕야를 두고 외도를 하셨다니!’

넋이 나간 듯 눈을 깜박이던 월향이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그 사 제독이란 사람이 우리 왕야보다 좋으신 것입니까?”

“좋긴 뭐가 좋아?”

월규가 언짢다는 말투로 말했다.

“우리 왕야의 신발 시중을 든다 해도 부족한 사람이야.”

“그럼 왕비 마마께선 왜 그자를 좋아하시는데?”

“부끄러움이라고는 없으신가 보지!”

두 시녀의 대화에 백천범이 화장대에 엎드려 울음을 터트렸다.

마음이 약해진 월규가 부드러운 말투로 그녀를 달랬다.

“왕비 마마, 이 일은 그만 잊어버리시고 앞으로 왕야와 즐거운 날을 보내십시오.”

백천범이 눈물 범벅이 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월규야, 네 말이 맞았어.”

“뭐가 말입니까?”

“왕야께서 날 좋아하신대. 그래서 날 내쫓지도 않으실 거고 초왕비로 삼으시겠대.”

월규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소인이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왕야께서 왕비 마마를 대하시는 게 심상치 않았다고요. 그런 일을 저지르셨는데도 책망하지 않는 부군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이런 부군은 눈을 씻고 찾아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기뻐하지 않으시다니요!”

“맞습니다, 왕비 마마. 왕야께서 진심을 다해 왕비 마마를 아껴 주지 않으십니까.”

“진심을 다하긴.”

백천범의 말투에 서글픔이 묻어났다.

“나만 왕비인 것도 아닌데.”

“아이고, 우리 왕비 마마께서는 질투심이 많은 분이셨군요.”

월규가 웃으며 말했다.

“그건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왕야께 두 왕비를 폐위하라고 슬쩍 말씀드리십시오.”

“어떻게 그래?”

백천범이 고개를 저었다.

“아내를 내쫓는 게 장난도 아니고. 원상 언니는 잘못한 것도 없는데 나 때문에 쫓겨나면 불공평하잖아.”

“잘못이 없긴 왜 없습니까?”

월규가 입을 삐죽거렸다.

“지난번 왕비 마마께서 사라지셨을 때, 측왕비 마마는 찾을 생각도 없으셨습니다. 왕야께서 돌아오시지 않으셨다면 마마께서는 정말 뒷산에서 목숨을 잃으셨을지도 모릅니다! 이래도 잘못한 게 없단 말씀이십니까?”

“그래도 직접 날 해하려 한 것은 아니잖아. 기껏해야 푸대접한 게 다인데 그런 이유로 내쫓을 수는 없지.”

백천범이 턱을 괴며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청접 언니는 저택에 남아 있기 힘들 것 같아.”

월규의 눈이 동그래졌다. 월규는 백천범에게 꼬치꼬치 캐물었고, 결국 내막을 알게 되었다. 화가 치솟은 그녀는 불을 뿜듯이 고청접을 욕하기 시작했다.

“그런 사람은 관아로 보내야 합니다. 감히 황실 종친을 음해하려 하다니! 목숨이 몇 개라도 된답니까? 대갓집 규수라는 사람이 속이 그렇게 시커메서야, 백 번 죽임을 당해도 모자랍니다!”

“그만해. 왕야께서도 쉽게 용서하진 않으실 거야.”

월향은 백천범의 여린 마음이 걱정이었다.

“이런 짓을 저질렀으니 왕야께서 분명 가만두시지 않을 것입니다. 왕비 마마, 절대 왕야께 서왕비를 용서해 달라고 청하시면 안 됩니다. 왕야께서 분명 언짢아하실 것입니다.”

“나도 언니가 가여운 건 아니야.”

백천범이 말했다.

“원래는 나도 따질 생각이 없었는데 계속 날 모함하잖아. 언니가 저택에 남아 있으면 화근이 될 거야. 언니가 없어야 조용해지긴 하겠지. 다만 그렇게 되면 언니도 살아가는 게 쉽진 않을 거야. 그래도… 목숨은 부지하는 게 낫잖아.”

“아무튼 왕비 마마께서는 신경 쓰지 마십시오. 왕야께서도 계획이 있으실 것입니다.”

* * *

묵용감은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는 병사들을 이끌고 고청접의 친정으로 쳐들어가 시녀를 잡아 왔다. 태어나 처음 당하는 일에 어린 시녀 지아枝兒는 거의 혼이 나가서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

이것만으로는 고청접의 목을 칠 수 없었다. 백천범의 약에 다른 약재를 넣어 황족의 후사를 음해한 것이야말로 중죄였다. 하지만 고청접은 시녀를 보내 일을 꾸민 사실은 인정해도 약을 탄 일은 끝끝내 시인하지 않았다.

약재를 더한 시녀는 이미 벽에 머리를 부딪쳐 목숨을 끊었기 때문에 더 이상 증거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밝혀진 일만으로도 그녀에게 처벌을 내리긴 충분했다.

일련의 일들은 묵용감에게 짙은 죄책감을 남겼다. 그녀가 비참한 말로를 맞이한 데는 자신이 충동적으로 저택에 데려온 탓도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그녀의 목숨을 앗아가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녀의 인생은 이미 충분히 망가져 있었다. 쫓겨난 아내라는 낙인이 꼬리표가 되어 따라다닐 테니 이제 그 누구도 그녀를 원치 않을 터였다.

친정에서도 그녀를 받아들일 수 없긴 마찬가지였다. 그녀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밖에 없었다. 머리를 깎고 불경을 외며 속죄하거나, 궁에 들어가 비빈들의 수발을 드는 관노가 되어 수치스러운 삶을 보내야 했다.

묵용감은 마지막 은혜를 베풀어 그녀에게 직접 고를 기회를 주었고, 그녀는 비구니의 삶을 택했다. 그녀는 불경을 외며 고독한 삶을 살지언정 다른 이에게 몸을 엎드리며 시중을 들 수는 없었다.

* * *

며칠이 지나자 백천범은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그녀의 생활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묵용감의 여동생이든 아내든 그녀는 예전처럼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조정에서 돌아온 묵용감은 중문에 서 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시시덕거리며 차 씨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그녀의 모습에 그의 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다른 이들과는 저리 잘 어울리면서 그의 앞에서는 어색함을 감추지 못한단 말인가?

백천범은 묵용감의 분부대로 그가 보이자 곧장 다가가 예를 갖췄다.

“다녀오셨어요, 왕야.”

짤막하게 대답을 마친 묵용감은 뒷짐을 진 채 안으로 들어섰다.

“저 애와는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소? 아주 기분이 좋아 보이던데.”

“가을에 잡을 수 있는 벌레에 대해서요. 지난번에 왕야께서 주셨던 쇠귀뚜라미는 제가 잘 돌보지 못해 죽어 버렸지만, 차 씨가 짬이 날 때 뒷산에 가서 여치를 잡아 주겠대요.”

“그 말을 믿소? 날이 이렇게 추워졌는데 여치를 어디에서 잡는단 말이오.”

묵용감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 다시 입을 열었다.

“다 큰 아가씨가 그런 걸 가지고 노는 것도 이상한 일이오. 왕비는 책을 좋아하질 않소, 내 서재에 있는 화본은 다 읽은 것이오?”

“벌써 다 읽었죠. 언제 몇 권 더 사다 주세요.”

“화본은 그리 제대로 된 책이 아니니 다른 서책을 많이 읽으시오. 지난번에 왕비의 글씨를 보니 엉망이었소. 백씨 가문 규수가 어찌 천민들보다도 글씨를 못 쓰는 것이오. 오늘부터 붓글씨를 연습하시오. 앞으로는 날 맞이하겠다고 문 앞에 나올 필요 없소.”

붓글씨를 배워 본 적 없었던 백천범은 신이 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왕야께서 가르쳐 주시는 거예요?”

백천범이 기뻐하자 묵용감의 언짢았던 기분은 눈 녹듯 사라졌다. 그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렇소. 내가 가르쳐 주겠소.”

그녀에 대한 마음을 털어놓았지만 그녀에게 손을 대기란 쉽지 않았다. 손을 잡으려고 하면 백천범은 겁에 질린 모습을 보였다. 누군가 자신에게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매우 언짢은 일이었지만, 그녀의 앞에서 조금씩 남편의 자리를 만들고 종종 자그마한 손을 잡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두 사람은 방으로 들어왔다. 묵용감의 환복을 돕는 것은 백천범의 또 다른 임무 중 하나였다. 그녀는 문제없다며 자신만만해했지만, 다른 이의 시중을 들어 본 적도 없는 데다 키가 작아 까치발을 들어도 역부족이었다.

결국 묵용감은 허리를 숙인 채 그녀에게 끌려다녀야 했다. 그녀는 묵용감의 머리를 잡아당기거나 도포 자락을 잡아끌다 요대腰帶를 떨어뜨리는 등 엉망진창으로 시중을 들었다.

기홍은 그 광경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만약 다른 사람이 저렇게 시중을 들었다면 진즉 뺨을 맞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초왕은 어린 왕비에게만은 대단한 인내심을 발휘했다.

오색 술이 심하게 엉킨 탓에 백천범은 한참을 끙끙거렸다. 얼굴이 새빨개진 그녀가 우물거리며 말했다.

“서툴다고 골탕 먹이는 것도 아니고…….”

기홍은 도움을 주고 싶었지만 묵용감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함부로 나설 수도 없었다.

묵용감은 가만히 서서 그녀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에 웃음기가 가득했다. 정말 덜렁대는 계집이었다. 본인이 엉클어 놓은 술을 대체 어찌하려고 저러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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