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3화
묵용감은 화가 치밀어 죽을 것만 같았다. 어떻게 지금 같은 상황에서 저 말을 입 밖에 낼 수 있단 말인가?
엎드려 있던 고청접 또한 광대가 된 기분이었다. 사람을 앞에 두고 평까지 하다니, 그것도 그녀가 가장 업신여기던 백천범에게 듣는 평이었다. 그녀는 수치심에 치를 떨었다.
이렇게 가만히 앉아 모욕을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이를 꽉 깨문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벽을 향해 달려갔다.
묵용감에게 자신의 진심을 보여야 했다. 그녀는 정말 그를 위한 충언을 한 것이었다. 초왕의 명성을 위해 이렇게 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은근한 기대가 있었다. 초왕이 있는 한 목숨을 잃을 일은 없을 거라고. 애석하게도, 그녀의 예상은 빗나갔다. 묵용감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기만 할 뿐 미동도 하지 않았다. 입가에 번져 있는 옅은 조소는 모든 걸 알고 있는 듯했고, 그의 눈빛은 이미 죽은 이를 바라보는 듯했다.
그 순간, 고청접은 깨닫고 말았다. 묵용감에게 그녀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의 모든 마음은 백천범에게 향해 있었다.
그녀는 이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아 버렸다.
고청접은 결국 그 자리에서 죽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기대한 상황대로 묵용감의 손에 구해졌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녀의 죽음을 막은 것은 바로 백천범이었다.
위기일발의 순간 백천범이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어린 몸이지만 온 힘을 다해 막은 탓에 고청접은 그대로 바닥에 나뒹굴었다. 여기까진 괜찮았으나 속력을 이기지 못한 백천범이 그녀의 몸에 머리를 박고 말았다.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 만큼 고통스러운 충격이었다.
묵용감이 곧장 백천범을 일으킨 덕분에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백천범은 화가 난 듯 그녀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입술을 바들바들 떨었다.
“언니, 이게 언니의 선택이에요? 정말 실망이에요! 죽는 건 쉽지만 사는 건 어렵죠. 그래도 잘못된 일을 바로잡으면 되는 일인데, 목숨까지 버리려 하다니요?”
실의에 빠진 고청접이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제게 남은 목숨이 어디 있겠습니까. 다른 이에게 목이 잘리느니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게 낫습니다.”
줄곧 침묵을 지키던 묵용감이 코웃음을 쳤다.
“형벌이 두려워 자살하려는 것은 더욱 용서할 수 없지.”
백천범이 그의 옷깃을 잡아끌었다.
“왕야, 지난 일은 따지지 마시어요. 청접 언니가 이렇게까지 하는데 그래도…….”
묵용감이 손가락으로 그녀의 이마를 찔렀다.
“왕비를 해하려 했는데 그래도는 무슨 그래도란 말이오!”
“청접 언니가 저택에 온 지도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 왕야께서 늘 저하고만 어울리셨잖아요. 언니도 절 오해할 만했어요. 사실 저와 왕야는 아무런…….”
묵용감은 서둘러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말이 나온 김에 오늘 이야기 좀 해야겠소.”
그가 그녀의 팔을 잡고 안쪽 방으로 향했다.
“따라오시오.”
“그럼 청접 언니는…….”
묵용감이 영구를 불렀다.
“이 자를 데려가 잘 지켜보거라. 잠시 뒤에 다시 심문을 할 것이다.”
영구는 대답을 올린 뒤 발을 걷어 올리고 안으로 들어왔다. 문밖을 지키며 듣고 있던 영구는 초왕이 서왕비를 내치리란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이제 예를 갖추지 않고 고청접을 끌고 방을 나섰다. 얼굴이 창백해진 그녀는 저항도 없이 비틀거리며 끌려갔다.
* * *
묵용감은 백천범을 끌고 방 안에 들어와 의자에 앉았다.
“방금 무슨 말을 하려던 것이오? 나와 왕비가 아무런 사이도 아니다?”
백천범이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와 왕야가 그렇고 그런 사이는 아니잖아요.”
“좋소. 왕비에게 똑똑히 말하는데 오늘부터 우리는 그런 사이오!”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왕야?”
“내 마음이 변했단 뜻이오. 더 이상 오라버니와 여동생 따위가 아니오. 나는 왕비와 부부 사이가 될 것이오. 왕비는 애초에 나의 정비이자 아내란 말이오.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겠소?”
백천범은 입을 떡 벌리고 그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월규와 월향 말이 맞았네요!”
“그 애들이 뭐라 하였는데?”
“왕야께서 절 좋아하신다고 했어요.”
시녀들도 알고 있던 사실을 이 맹랑한 왕비는 그가 직접 마음을 전해야만 알아차린다. 자신감을 얻은 묵용감이 자리에서 일어나 뒷짐을 지고 턱을 살짝 치켜들었다.
“본왕의 총애를 받는 것은 전생에 덕을 쌓아야만 얻을 수 있는 복이오.”
기회가 왔을 때 덥석 잡지 않고 무엇 하고 있단 말이냐, 이 마음을 받아주어야지! 그는 속으로 백천범을 닦달했다. 어서 그녀가 그의 마음을 받아 주길 바랐다.
그러나 백천범의 난처한 표정 앞에서, 묵용감의 자신감은 모래처럼 흩어졌다.
“왕야와 저는 남매로 지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묵용감은 별안간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그가 수없이 상상하고 지웠던 일이 정말 일어나고 말았다.
힘겹게 꺼내 보인 진심이 처참히 짓밟히자 그는 언성을 높였다.
“본왕이 싫은 것이오? 본왕이 사장풍만 못하오? 이리도 한결같이 그자만 떠올리다니, 잊지 마시오. 당신은 본왕의 왕비요. 지금까진 가만히 내버려 두었지만, 오늘 이후로 그런 일이 또다시 벌어졌다간 봐주지 않을 것이오!”
달라진 태도에 백천범은 목을 움츠린 채 우물거렸다.
“왕야, 정말 제게 침수형을 내리시려고요?”
“못 믿겠으면 어디 한번 해 보시오!”
그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험악한 말을 쏟아냈다.
“침수형은 약과지. 내 심기를 건드렸다간 형방에 있는 백팔 개의 형벌을 모조리 내릴 것이오.”
협박하는 그의 모습이 어찌나 두려웠는지 백천범은 몸을 덜덜 떨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원하는 모든 것을 손에 넣어 온 묵용감이지만, 이번만큼은 진심을 다해도 도리가 없었다. 그 사실에 화가 나기도 했지만 슬픔이 더 컸다. 그는 차가운 얼굴로 가만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방 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고 얼어붙은 듯한 공기는 조금씩 그의 몸을 굳혔다. 그는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조각상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정말 대단한 여인이었다. 말을 해도, 말하지 않아도 그를 말라비틀어지게 할 수 있다니. 홧김에 백팔 개의 끔찍한 형벌을 모조리 내릴 것이라고 했지만, 그녀가 그에게 내린 형벌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잔혹한 것이었다.
그 역시 그녀에게 조금 더 적응할 시간을 주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오빠라 여긴 사람을 지아비로 삼으라고 하니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만했다.
하지만 생각은 그의 뇌리에서 맴돌 뿐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의 태세는 완강했고, 그녀가 고개를 끄덕일 때까지 영원토록 버틸 것만 같았다. 어금니를 꽉 깨문 입에서 으드득 소리가 났다. 백천범이 계속 버티면 그 또한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그때 그녀가 침묵을 깨고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알겠어요. 그럼 그렇게 해요.”
“뭐라 하였소?”
그는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올려 그를 바라보았다. 까만 두 눈동자가 겁을 머금고 있었다.
“알겠다고요.”
마지못해 수긍하는 말투가 찜찜하긴 했지만 수락을 하긴 했으니 더는 묻지 않았다. 처음부터 너무 많은 걸 바랄 수는 없으므로.
그는 살짝 손을 들어 올렸다.
“이리 와 안기시오.”
그녀는 거부하는 기색 없이 그의 품에 자연스럽게 안겼다. 그는 그녀의 머리 위에 턱을 받쳤다.
“오늘부터 이곳에서 나와 함께 지내도록 하시오.”
품 안의 작은 몸이 뻣뻣하게 굳더니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왜요? 저는 남월각에서 잘 지내고 있잖아요.”
“왕비는 나의 아내이기 때문이오. 아내는 지아비와 함께 지내야 하지 않소?”
“하지만 왕야는 일반 백성과는 다르시잖아요.”
그녀가 잠시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제가 이곳으로 오면 측왕비도 오는 거예요?”
“그것은 아니오.”
“왜요?”
그녀는 그의 말을 인정하지 못하는 듯 재차 물었다.
“둘 다 왕야의 아내인데, 왜 차별을 하시는 거예요?”
답은 간단했다. 그녀는 좋아하지만 수원상은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 말을 내뱉을 수는 없었다. 그녀를 좋아하는 마음이 정작 그녀에게는 별로 와닿지 않은 듯했다. 그가 막 입을 떼려는데 백천범이 그의 허리를 끌어안고 얼굴을 문질렀다.
“왕야…….”
그녀가 애교를 부릴 때 하는 행동이라는 것쯤은 그도 알고 있었다. 그가 눈을 내리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오?”
“절 저택에서 내보내지 않으실 거죠?”
“내보내지 않을 것이오.”
“사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지금도 좋아요.”
그녀는 어떤 상황에서도 즐거움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곳에서는 맛있는 것도 먹고, 예쁜 옷도 입을 수 있잖아요. 시중을 들어주는 시녀들도 있고 왕야께서도 절 지켜주시니까 편안한 삶을 보낼 수 있겠죠. 저도 그렇게 욕심이 많은 사람은 아니에요. 다만 한 가지…….”
그녀는 그의 품 안에서 잠시 꿈틀거렸다.
“제가 머리를 올리긴 했지만 몸집이 아직 작아서 왕야를 만족시키지 못할까 걱정이에요. 왕야께서는…….”
그녀가 언급하지 않아도 그 또한 마음을 먹은 바가 있었다. 아직 백천범이 어리니 두 해 정도 지나고 생각해 볼 문제였다. 어릴 때 몸이 상하면 제대로 자라지 못할 수 있다는 걸 묵용감도 알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그녀를 싫어할 일은 없다. 오히려 그녀가 원망할까 봐 걱정이었다.
“걱정 마시오. 계속 잘 보살펴 줄 것이니 그런 일은 조급할 것 없소.”
백천범이 안도의 숨을 내쉬더니 그제야 활짝 웃어 보였다.
“왕야, 배고파요.”
* * *
한동안의 실랑이 끝에 두 사람은 타협점을 찾았다. 백천범은 계속 남월각에서 묵되, 묵용감이 조정에서 돌아올 땐 회림각에서 그를 맞이하며 아내의 본분을 다해야 했다.
묵용감도 어쩔 수 없었다. 어쨌든 그녀가 그를 바라봐 줄 때까진 천천히 다가가야 했다.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테니 그렇게 마음 졸일 필요 없다고, 묵용감은 스스로를 달랬다.
묵용감이 진심을 털어놓고 나서 두 사람의 사이는 조금 미묘해졌다. 백천범은 별안간 침착한 사람으로 변해 버린 듯 더는 재잘거리지 않았다. 시무룩하게 앉아 있는 그녀의 모습에 묵용감은 자신이 꼭 명문가 부녀자를 핍박하는 악랄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는 스스로를 경멸하면서도 이렇게 해야만 했다고 되뇌었다. 백천범이 만약 다른 이의 아내가 되어도 어떻게 해서든 뺏어 올 것이었다. 그의 마음에 들어온 사람은 반드시 그의 것이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녀의 처진 모습은 그의 마음을 우울하게 했다. 그가 커다란 손을 휘둘러 그녀에게 가 보라는 시늉을 하자 사면이라도 받은 것처럼 백천범의 얼굴에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묵용감은 또다시 화가 치밀었다. 그와 마주하는 게 그리도 괴로운 일이란 말인가? 그녀가 쏜살같이 뛰어가지만 않았어도 엉덩이를 호되게 때려 주었으련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