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2화
일이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었다. 예상과는 전혀 다른 상황으로 돌아가자 그녀는 갑갑해 미칠 지경이었다.
묵용감은 백천범에게 엄청난 배신을 당하고도 왜 이렇게 잘해 주지 못해 안달이란 말인가? 설마 백천범이 정말 초왕을 홀려 혼을 빼놓기라도 했단 말인가?
이곳을 떠나고 싶었지만 다리에 힘이 풀려 일어날 수 없었다. 땀으로 흥건해진 이마조차 감히 닦을 수 없어, 그녀는 손수건만 가만히 움켜쥐었다.
묵용감은 그제야 그녀가 앞에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는지 고청접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따스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냉소였다.
“서왕비는 왕비에 대해 아는 게 참 많은가 보오.”
“저는, 소첩은…….”
고청접은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왕야를 위해서입니다. 이번 일은 왕야의 체면과 직결된 문제입니다. 왕야께서도 부디 신중을 기하십시오. 왕야께서 왕비 마마를 총애하신다는 것은 소첩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왕비 마마께서 가문을 더럽히셨는데도 제대로 된 처사를 내리지 않으시면 분명 다른 이들의 비웃음을 살 것입니다.
소첩의 충언이 귀에 거슬리시는 것도 잘 압니다. 하지만 왕야에 대한 소첩의 충심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알 것입니다!”
백천범은 두 볼이 빵빵해질 때까지 과자를 입에 넣다가 우물거리며 말했다.
“제가 청접 언니한테 잘못한 거라도 있어요? 왜 이렇게 저를 헐뜯고 깎아내리는 거예요?”
백천범은 그저 순수하게 궁금한 듯했지만, 고청접의 눈엔 음흉하기 짝이 없었다. 결국 그 순간, 고청접의 분노가 폭발해 버렸다. 애초에 백천범은 사장풍과 깊은 사이가 아닌가? 그녀가 손을 쓰긴 했지만 두 사람의 마음이 통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시치미를 떼다니!
그녀는 더 이상 예의를 차리지도, 사실을 감추지도 않고 마음속에 있는 말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왕비 마마, 설마 사 제독에게 마음이 없단 말씀이십니까? 그자와 밀회를 하지 않으셨습니까. 왕비 마마께서는 사 제독에게 주머니를, 사 제독은 왕비 마마께 나무 조각을 드리지 않았습니까. 이게 사랑의 증표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입니까! 어젯밤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왕비 마마께서는 사 제독을 만나러 간 게 아니십니까!”
“언니가 사 제독님의 목숨이 위태롭다고 하니 서둘러 보고 오려고 했죠.”
고청접이 곧바로 말꼬리를 잡고 늘어졌다.
“왕야, 보십시오. 왕비 마마께서도 인정하셨습니다. 외간 남자에게 마음이 있으시다니요, 이게 외도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입니까?”
“사 제독님이 저 때문에 다치셨으니 마음이 편치 않을 수밖에요. 가서 보고 오는 게 뭐 그리 대수라고요?”
백천범은 입안에 있던 과자를 삼키고 계속 반박했다.
“게다가 왕야께서 나중에 저를…….”
가장 중요한 말을 내뱉으려는 순간 묵용감이 그녀의 입에 과자를 쑤셔 넣었다.
“먹을 땐 말하지 마시오. 목에 걸릴 수도 있소.”
너무 급하게 쑤셔 넣는 바람에 숨이 막힌 백천범의 입에서 기침이 터져나왔다. 그는 재빨리 그녀의 입 앞에 손을 가져다 댔다.
“이것 보시오. 정말 목에 걸리지 않았소. 어서 뱉으시오.”
그가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등을 가볍게 토닥였다.
백천범이 과자를 그의 손에 뱉더니 원망이 가득 담긴 어조로 말했다.
“왕야, 왜 그러시는 거예요?”
묵용감은 순순히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내 잘못이오. 자, 어서 식혜 한 모금 들이켜시오.”
그는 식혜를 떠서 그녀에게 먹여 주었다. 그녀의 기침이 멎자 그는 그제야 마음을 놓은 듯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고청접은 눈 앞에 펼쳐진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 정말 저 사람이 고고하고 차가운 초왕이란 말인가? 아내를 저렇게 극진히 모시는 지아비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녀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저 모습은 거짓이다. 분명 거짓이 틀림없다……. 거짓이어야만 했다.
누군가 백천범의 약에 독을 탄 사실을 알게 된 후, 묵용감은 수원상과 고청접을 주시해 왔다. 그날은 질투심에 눈이 멀어 사장풍에게 손찌검을 했지만, 그도 충동적이기만 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 나름의 계획이 있었다.
그날 묵용감에게 왕비의 소식을 전한 사람도 고청접이었다. 우물쭈물하며 그에게 뼈 있는 말을 늘어놓더니 지금은 스스로 자신의 속내를 드러냈다. 그러나 상대는 황실에서 자라며 수많은 음모와 음해를 접해 온 묵용감이었다. 고청접의 이런 하찮은 수로는 그의 의심을 피할 수 없었다.
그의 계획은 며칠 더 기다리려 했지만 고청접이 스스로 무너져 버렸으니 더 미룰 것도 없었다.
그가 냉소를 지었다.
“서왕비는 그날 왕비가 동락원에서 만난 사람이 사 제독이라는 것을 어찌 알았소? 설마 사 제독과 친분이라도 있는 것이오?”
불똥이 자신에게 튀자 초조해진 고청접이 서둘러 해명했다.
“왕야, 친분이라니요. 소첩은 사 제독과 전혀 모르는 사이입니다.”
“왕비와 사 제독이 사랑의 증표를 나누어 가졌다는 것은 어찌 알았소? 그게 무엇인지도 정확히 알고 있질 않소? 또, 사 제독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사실은 어찌 알았단 말이오?”
백천범이 그녀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날 동락원에 연극을 보러 간 것도 청접 언니가 권했던 거예요. 새 연극이 엄청 재미있다면서 말이에요.”
“그렇다면 서왕비가 왕비를 동락원으로 보내 외간 남자와 밀회하도록 꾸몄단 말이오?”
묵용감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어제는 고의로 사 제독의 상태가 위중하다는 말을 꺼내 왕비가 한밤중에 병문안을 가게 한 것이었군. 서왕비는 왕비가 외도를 저지른 것처럼 꾸미고 싶어 안달이 났나 보오. 어째서 그런 일을 저지른 것이오?”
“저는…….”
고청접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묵용감의 말대로 모든 게 그녀가 꾸민 일이다. 하지만 백천범과 사장풍 사이에 무언가 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왕야, 소첩이 말씀드렸다시피 부녀자의 도리를 지키지 않으신 왕비 마마께서는 저택에 계실 수 없사옵니다. 소첩의 충언이 듣기 싫으시더라도 모두 왕야를 위해서 드리는 말씀이옵니다!”
고청접은 아예 바닥에 쓰러져 흐느끼기 시작했다.
“설마 천하의 조롱거리가 되고 싶으신 것입니까? 왕야!”
“무엄하다!”
고청접은 거의 실성한 듯 오열하다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백천범을 노려보았다.
“왕야, 저 여인은 왕야를 두고 외도를 한 사람입니다. 마땅히 침수형을 내리셔야 합니다. 무려 초왕비의 자리를 어찌 이런 여우 같은 이에게…….”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묵용감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굳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고청접을 걷어차며 호통을 쳤다.
“감히 왕비를 능멸하려 하다니, 겁도 없이! 네 아비와의 관계를 생각해 조용히 처리하려 했으나, 네가 이렇게 뻔뻔하게 나오는 이상 본왕도 사정을 봐주지 않을 것이다!”
“왕야, 왕야! 소첩은 정말 왕야를 위하는 마음뿐이옵니다…….”
바닥에 엎드린 고청접에게서 서러운 울음이 터져나왔다.
백천범이 한숨을 내쉬었다.
“청접 언니,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예요. 아무리 생각해도 전 언니 눈에 거슬릴 만한 일을 한 적이 없는데 말이에요. 저는 언니가 노랑이를 죽인 것도 따지지 않았어요. 그런데 또 이런 일까지 꾸미다니요. 못된 심보는 고쳐먹기 힘들다더니. 정말 유모 말이 맞았어요.”
고청접이 새빨개진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모함입니다. 제가 그 닭을 죽이다니요, 직접 보셨습니까!”
“그날 어떤 무수리가 절 뒷산으로 꾀어냈어요. 나중에 그 무수리를 찾아보았지만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죠. 그런데 동락원에 가던 날 그 무수리를 만났어요. 언니네 집에서 나오더라고요. 언니네 집 시녀였던 거예요.
전 똑똑하진 않지만 언니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멍청하지도 않아요. 제가 아무 말 하지 않은 건 이 일을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언니는 왜 계속 절 모함하려는 거예요?
유모가 그랬어요. 남을 모함하면 스스로의 마음도 편치 않고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다고 말이에요. 언니는 이렇게 쉬운 이치도 모르는군요.”
“게다가 시녀를 매수해 왕비의 약에 다른 약재를 넣어 놓고, 이를 측왕비가 한 짓으로 꾸미다니.”
묵용감이 코웃음을 쳤다.
“처음에는 미안한 마음에 네게 기회를 주려 했다. 하지만 끝까지 발악을 하니 어쩔 수 없지. 고청접, 초왕비를 음해한 죄로 널 참형에 처할 수도 있다! 황실 종친을 해하려 한 짓은 네 목만 날아가는 것이 아니라 네 가문 전체가 날아가는 대역죄다. 그 사실은 알고 이런 짓을 벌인 것이냐?”
고청접의 얼굴이 점점 잿빛으로 변해 갔다. 몸이 마비된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 백천범은 노랑이의 일을 알고도 덮으려 했다지만, 결국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초왕 앞에서 이 일을 입 밖에 내다니! 우물에 빠진 사람에게 돌을 던져도 유분수지!
초왕은 어떻게든 사건의 증인인, 친정에 있는 시녀의 입을 열게 할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그녀의 죄명은 명명백백히 밝혀질 것이고, 그의 말대로 곧 그녀는 물론 집안에도 해가 가해질 터였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온몸에 소름이 끼친 그녀는 묵용감에게 울부짖으며 애원했다.
“왕야, 부디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소첩은 죽어 마땅하지만 소첩의 식솔들만큼은 용서해 주시옵소서!”
비참한 상황을 차마 보고만 있을 수 없어 백천범도 묵용감에게 사정했다.
“왕야, 청접 언니는 그래도 왕야의 서비잖아요. 하룻밤이라고 해도 부부의 연은 쉽게 끊을 수 없는 것이라던데,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묵용감이 미간을 찌푸리며 무섭게 그녀를 노려보았다.
“다시 한번 말해 보시오.”
백천범은 목을 움츠리고 말았다. 입을 삐죽거리는 게 조금 못마땅한 모습이었다.
묵용감은 백천범에게 해명하고 싶지 않았다. 더욱이 고청접과 대면한 상태에서는 더더욱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의지와는 달리 참을 수 없는 본심이 새어 나왔다.
“나와 저 여인은 진짜 부부도 아니었거늘, 부부의 연은 무슨?”
고청접은 그의 말을 듣는 게 죽는 것보다 괴로웠다. 지금껏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혼자 고통을 감내해 왔다. 그러나 이제 백천범까지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당장 쥐구멍에 숨고만 싶었다.
혼사를 치르고 오랜 시일이 지나도 초왕은 그녀의 털끝 하나도 건드리지 않았다. 이게 무슨 의미였겠는가? 초왕은 그녀에게 아무 감정도 없었다!
그녀에게는 다른 이들의 평판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만약 소문이라도 난다면 그녀는 더 이상 살고 싶지도 않을 것이었다.
백천범은 묵용감의 말이 의아하기만 했다.
“왜요? 왕야, 청접 언니는…….”
그녀가 슬쩍 손짓을 해 보였다.
“크잖아요! 왕야께서는 큰 여인을 좋아하시는 거 아니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