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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91)화 (190/1,192)

제191화

백천범은 몸을 축 늘어뜨린 채 아직은 졸린 눈으로 물었다.

“왕야, 어째서 이곳에서 주무신 거예요?”

묵용감은 옷을 걸치며 말했다.

“여긴 내 침소가 아니오. 이곳에서 잠을 청하지 않으면 어디에서 잠을 잔단 말이오?”

그에 백천범이 대답했다.

“아… 그럼 저를 왜 남월각으로 보내지 않으셨어요?”

“밤새 왕비를 찾느라 나도 피곤했소. 저택에 돌아왔을 땐 이미 해가 뜬 후였소. 나도 잠시 눈을 붙이느라 데려다주지 못했소.”

묵용감은 곁눈질로 그녀를 슬쩍 바라보았다. 조금 이상했다. 사내와 함께 잠을 자고도 수줍어하는 기색은커녕 거만한 자세로 이것저것 물어보기나 하다니, 부끄러움 따위는 아예 없는 듯했다.

그녀는 거리낌 없이 누워 있는 반면, 묵용감은 오히려 새색시처럼 그녀의 눈도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다.

그때, 슬슬 어젯밤 일이 떠오르자 눈치가 보였던 백천범은 이불 안에 몸을 잔뜩 웅크리고 두 눈만 내놓은 채 쭈뼛거리는 토끼처럼 다소곳하게 그를 불렀다.

“왕야.”

애교를 부리는 듯한 말투로 그를 부르는 일은 흔치 않았기 때문에 묵용감은 마음이 사르르 녹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아무렇지 않은 듯한 얼굴을 한 채 그녀를 슬쩍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오?”

백천범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입을 열었다.

“저를 벌하실 거예요?”

“왕비의 생각은 어떻소? 벌을 받아 마땅하오?”

백천범은 울상이 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벌을 받아 마땅해요. 왕야, 어떤 벌을 내리실 거예요? 곤장? 아님 채찍……?”

그녀는 천천히 말을 내뱉으며 조심스레 그의 안색을 살폈다. 요행을 바라는 눈치였다.

백천범의 속마음을 단번에 알아차린 묵용감은 그저 우습기만 할 뿐이었다. 그는 여전히 제멋대로인 말투로 말했다.

“지금껏 늘 왕비에게 관용을 베풀었소.”

그녀의 얼굴에 긴장감이 풀리자 그가 재빨리 뒷말을 이었다.

“두 가지 벌 중에서 왕비가 직접 하나 골라 보시오.”

백천범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일그러지자 묵용감은 하마터면 웃음이 튀어나올 뻔했다. 그녀가 알아차리기 전에 그는 서둘러 몸을 돌렸다. 등 뒤에서 그녀의 더듬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는 피부가 약해서 많이는 못 맞을 텐데… 어디를 골라도 다 똑같을 거예요……. 한 번 맞으면 열흘에서 보름 정도는 침대에 꼼짝없이 누워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침대에 누워 있으면 얼마나 좋소.”

묵용감은 뒷짐을 진 채 여전히 그녀를 등지고 서 있었다.

“더는 도망도 못 칠 것 아니오.”

그의 목소리가 점점 낮아졌다.

“무려 초왕비가 야반도주를 하다니, 소문이 퍼지면 본왕의 꼴이 참으로 보기 좋겠소.”

“도망치려던 게 아니에요.”

백천범이 투덜거렸다.

“다시 돌아왔잖아요.”

“무엇 하러 다시 돌아왔소?”

묵용감이 비꼬며 물었다.

“변덕 심한 왕이 외출 금지를 내렸으니 이곳은 감옥이나 다름없질 않소. 밖에서 자유롭게 지내는 게 더 나을 것 아니오?”

백천범이 넉살 좋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지낼 수 있는걸요. 왕야께서 제게 얼마나 잘해 주시는데요.”

묵용감에게 그리 만족스러운 대답은 아니었다. 앞으로 이곳에 남아 있겠다는 이유가 단지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지낼 수 있기 때문이라니! 그녀에게 그게 전부란 말인가?

그가 목소리를 살짝 높였다.

“딴소리 말고 어서 골라 보시오. 무슨 벌을 받겠소?”

백천범은 어물쩍 넘어가고 싶었다. 비록 총명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멍청하지도 않았던 그녀는 묵용감이 정말 화가 나면 그녀를 영영 보지 않으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젯밤 그녀와 함께 침소에 든 이상, 웃는 낯으로 떼를 쓰면 쉽게 넘어갈 수도 있었다.

“왕야…….”

그녀는 또다시 부드럽고 나긋하게 그를 불렀다.

묵용감의 마음에는 아직도 가시가 박혀 있었다. 그 가시가 뽑히기 전엔 어물쩍 넘어가고 싶지 않았다. 사실대로 털어놓겠다고 결심한 그였지만 그녀를 마주하자 또다시 자신이 없어졌다. 그녀의 반응이 어떨지 도무지 감이 오질 않았다.

제 마음을 말하지 않으면 화는 나겠지만 체면은 살릴 수 있었다. 하지만 마음을 털어놓았다가 그녀가 그를 거부한다면, 그녀의 마음에는 사장풍만 남게 될 것이었다. 그땐 대체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체면이고 속이고 전부 타격을 입을 게 분명했다.

마음이 복잡해진 그는 뒷짐을 진 채 방 안을 서성였다. 얼굴을 굳힌 그의 모습에 백천범은 조금 당황스러웠다. 아무래도 그가 그녀를 어떻게 벌할지 고민하는 듯했다. 그녀는 모른 척 돌아누워 불분명한 발음으로 말했다.

“왕야, 아직 졸려요. 조금만 더 잘게요.”

벌을 받아야 한다면 잠이라도 충분히 잔 다음에 받는 게 나았다.

묵용감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등을 지고 돌아누운 그녀는 목까지 이불을 꼼꼼히 덮고 자그마한 머리만 밖으로 내놓고 있었다. 새카만 머리카락이 미역처럼 베개 위로 잔뜩 흐트러져 있었다.

가슴이 답답했던 그는 발을 걷어 올리고 바깥방으로 나왔다. 조용히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었다.

마침 녹하가 막 차를 올리고 물러나자 학평관이 문 앞에 서서 그에게 고했다.

“왕야, 서왕비 마마께서 오셨습니다.”

머릿속이 복잡했던 묵용감은 그녀를 돌려보내려다가 생각을 바꾸고 시원시원한 목소리로 말했다.

“들라 하라.”

학평관은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곧장 발을 들어 올려 서왕비를 안으로 청했다.

고청접은 고개를 반쯤 숙인 채 사뿐사뿐 걸어 들어오더니 아리따운 자태로 인사를 올렸다.

“왕야를 뵈옵니다.”

묵용감이 반대쪽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앉으시오. 무슨 일로 날 찾아왔소?”

“소첩, 어젯밤 왕비 마마께서 돌아오시지 않아 한숨도 들지 못했습니다. 겨우 돌아오셨다는 소식에 걱정이 되어 한달음에 찾아왔습니다.”

묵용감이 코웃음을 쳤다.

“그런 짓을 저질렀는데 뭐 그리 걱정이 된다고 보러 왔소.”

고청접은 성이 난 듯한 그의 표정을 보자 속으로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이런 일이 생겨 왕야의 심기가 불편하시다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왕비 마마께서는 백 승상 댁 따님이시니 왕야께서도 신중하셔야 할 것입니다. 뒷말이 생겨 소문이라도 나면 좋지 않을 테니까요.”

묵용감이 코웃음을 쳤다.

“본왕이 백 승상을 무서워해야 한단 말이오?”

그는 시선을 위로 올려 날카로운 눈빛으로 고청접을 바라보았다.

“서왕비가 말하는 이런 일은 무슨 일이오?”

고청접은 흠칫했다. 마음이 급했던 나머지 속내를 너무 드러내고 만 것이었다. 다행히 백천범은 초왕의 신임을 잃은 데다 정신까지 혼미한 상태였으니 잘 둘러대면 넘어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녀가 횡설수설하며 말했다.

“소첩도 그저 추측한 것뿐입니다. 이 일에 대해서는 줄곧, 줄곧 왕야께 말씀드리지 못했던 것이지요. 제가 입을 잘못 놀려 왕야와 왕비 마마 사이에 거리가 생길까 걱정이 되어 그리하였습니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소첩이 말씀드려도 무방하리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녀는 말을 뱉으며 슬쩍 묵용감의 안색을 살폈다.

묵용감은 어두운 낯빛으로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녀의 말이 끝나면 곧바로 화를 퍼부을 것 같았다.

“말하시오!”

간결한 한마디가 고청접의 어깨를 짓눌렀다.

고청접은 조금 두려웠지만 이번이 가장 좋은 기회라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소첩의 친정이 동락원 근처인데 제 여동생이 왕비 마마와 웬 사내가 웃으며 함께 동락원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고…….”

그때, 안쪽 방의 발이 걷히더니 누군가 밖으로 나왔다. 백천범이었다. 백천범이 나타나자 조금 민망했던 고청접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묵용감이 턱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왜 말을 잇지 못하는 것이오?”

고청접은 난감한 표정으로 백천범을 바라보았다. 백천범의 표정이 미묘했다. 놀란 듯했지만 화가 나 보이진 않았다.

난처함에 입을 열지 못하는 고청접을 대신해 백천범이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청접 언니 여동생이 거짓말을 한 거예요. 저는 어떤 사내와도 함께 동락원에 간 적 없어요.”

묵용감이 짐짓 겁을 주었다.

“무슨 낯으로 끼어드는 것이오. 어젯밤엔 누구를 찾으러 간 것이오? 결정은 내렸소? 곤장을 맞을 것이오, 채찍을 맞을 것이오?”

고청접은 마음이 다급해졌다. 이게 곤장이나 채찍으로 해결할 일이던가? 목숨을 잃을 때까지 맞는 거라면 상관없겠지만, 목숨이 붙어있다면 저택에 계속 머무르게 둘 것이란 말인가?

그녀는 더 이상 다른 곳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왕야, 이런 일을 겪으시고도 왕비 마마를 저택에 두실 것입니까? 소문이라도 새어 나가면 왕야께서 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결국 속에 담아 두었던 이야기를 털어놓았지만 묵용감은 묵묵부답이었다.

잠시 후, 그가 고청접을 바라보았다. 그의 알 수 없는 시선이 그녀의 속마음을 훤히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본왕이 어찌해야 한단 말이오?”

어렴풋이 좋지 않은 느낌이 들었지만 이렇게 된 이상 무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고청접은 마음을 다잡았다.

“왕비 마마께서 외도를 하셨으니 응당 침수형을 당하셔야 합니다. 하지만 왕야께서는 성품이 인자하시고 백 승상의 체면도 살피셔야 하니 저택에서 내보내시는 게 적당한 처사라 생각되옵니다.”

백천범은 더 듣기 싫었는지 밖으로 나갔다. 묵용감이 서둘러 그녀를 불러 세웠다.

“어딜 가려는 것이오?”

“배고파요. 기홍 언니한테 먹을 것을 달라고 하려고요.”

고청접의 눈이 살짝 커졌다. 참으로 태평하기 짝이 없었다. 자신의 외도를 말하고 있는데 그저 먹을 생각뿐이라니.

“이리 오시오.”

묵용감은 명령조로 그녀를 불렀다.

백천범이 뾰로통한 얼굴로 다가오자 그는 옆자리에 그녀를 끌어 앉혔다.

“외도를 했다는데 아무런 할 말도 없소?”

백천범이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그를 슬쩍 바라보았다.

“제가 언제 외도를 했어요. 왕야께서 골라 주신 낭군인데…….”

그때, 묵용감이 손을 뻗어 그녀의 입을 막았다. 그는 불안한 표정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무엇을 먹고 싶소? 기홍에게 가져오라 분부하겠소. 아침도 먹지 않았는데 굶게 할 순 없지.”

“곧 점심을 먹어야 하니까 간식으로 요기만 할게요.”

백천범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잠시 고민하더니 결정을 내렸다.

“편도扁桃 과자로 할게요.”

“알겠소. 식혜도 같이 마시는 게 좋겠소.”

묵용감은 기홍을 불러 과자와 식혜를 가져오라 분부했다.

“왕야도 같이 드시어요. 아침도 안 드셨잖아요.”

묵용감이 코웃음을 쳤다.

“어쩐 일로 왕비가 날 신경 쓰는 것이오?”

백천범은 배시시 웃으며 팔로 그를 살짝 쳤다.

“왕야께서 제게 잘해 주시는데 저도 보답을 해야지요.”

맞은편에 앉아 있던 고청접은 화기애애한 두 사람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두 사람은 사이 좋은 부부처럼 다정하게 장난을 치고 있었다. 그녀의 손발이 순식간에 얼음장처럼 차가워졌고, 심장은 쿵 하고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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