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0화
깜짝 놀란 부윤은 허리를 숙인 채 벌벌 떨었다. 그의 불찰로 초왕비를 옥에 가두었으니 초왕의 말을 제대로 새겨들어야 했다. 의논은 무슨 의논, 분명 그의 죄를 물으러 오겠다는 뜻이었다.
병아리를 들어 올리듯 백천범을 들어 말에 태운 묵용감은 그녀를 품에 안고 천천히 저택으로 향했다.
그녀를 찾던 수색대는 해산한 뒤였기 때문에 거리는 텅 비어 있었다. 말발굽 소리가 울려 퍼지며 고요한 새벽을 깨웠다. 아직 해는 뜨지 않았지만 동녘 하늘이 어렴풋하게 붉은빛으로 물들며 주위를 밝히고 있었다.
초왕이 천천히 말을 몰았기에 가동과 영구도 그의 뒤를 유유히 따랐다. 잘 이해가 되지 않았던 가동이 영구에게 물었다.
“영구야, 왕야께서 왕비 마마에게 아내라는 말을 들으려고 그렇게까지 몰아세우신 걸까? 그렇게 하면 왕야와 왕비 마마의 의남매 사이가 이상해질 텐데.”
영구가 동문서답을 했다.
“형님은 말을 탄 겁니까, 나귀를 탄 겁니까?”
가동이 의아해하며 답했다.
“당연히 말이지!”
영구가 코웃음을 쳤다.
“그런데 머리는 어찌 나귀보다도 나쁘답니까?”
가동은 그제야 어이없다는 듯 대꾸했다.
“왜 가만히 있는 사람을 욕하고 그래?”
“욕을 먹어도 싸니까요. 일을 성사시키기는커녕 되레 망쳐 놓지 않습니까.”
“내가 뭘 어쨌길래 일을 망쳐?”
영구가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
“충고하는데 앞으로 왕비 마마의 일에는 개입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사 제독님과도 거리를 두십시오. 그러다 크게 화를 입을 수도 있습니다.”
가동은 그제야 조금 이해가 되었다.
“네 말은 왕비 마마와 사장풍은 가망이 없다는 거지? 왜? 지난번만 해도 왕야께서 사장풍을 꽤 마음에 들어 하셨잖아.”
영구가 한숨을 내쉬었다.
“형님, 그러다 정말 목이 날아가겠습니다.”
“왜?”
“멍청해서요.”
“대체 왜 나한테 계속 욕을 하고 난리야?”
묵용감이 저택으로 들어가자 영구는 가동을 상대하기 성가셨는지 채찍을 높게 휘둘러 재빨리 대문을 통과했다.
가동은 몇 차례 투덜댄 뒤 영구 뒤를 따라 대문을 들어섰다. 그는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쉬었다. 사장풍은 왕비에게 마음이 있는 것 같았는데, 초왕은 기어코 그 둘을 떼어 내려 했다. 게다가 사람들 앞에서 왕비에게 그의 아내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하다니. 아니, 잠시만. 그는 깜짝 놀라 고삐를 세웠다.
왕야가 왕비를 좋아하는 것이었다! 초왕은 오빠가 아니라 그녀의 부군이 되고 싶던 것이다!
큰 비밀이라도 알게 된 듯 흥분을 감추지 못한 가동은 두 다리에 힘을 실어 빠르게 말을 몰았다. 중문에 도착해 말에서 내린 그는 곧장 회림각으로 들어갔다.
하인들은 이미 잠자리에서 일어나 분주하게 일을 하고 있었다. 마침 방에서 나오는 녹하를 발견한 그는 서둘러 그녀를 바라보며 눈짓을 보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자는 의미였다.
아무것도 알 리 없던 녹하는 그를 따라 연못가로 향했다. 가동은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 조용히 입을 열었다.
“녹하야, 너한테만 말해 주는 건데 아마 깜짝 놀랄 거야.”
가동의 말이 녹하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뭔데 그래?”
가동은 녹하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 목소리를 잔뜩 깔고 말했다.
“귀 좀 대봐. 다른 사람이 들으면 안 되니깐.”
더욱 궁금해진 녹하는 가동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녀에게서 그윽한 향기가 나자 가동은 마음이 조금 어수선해졌다. 그는 가볍게 그녀의 팔을 잡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있잖아, 왕야께서 왕비 마마를 좋아하셔.”
하지만 녹하는 놀란 기색도 없이 가동에게 붙잡힌 자신의 팔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
“그래서라니?”
가동이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놀랍지도 않아?”
“네가 더 놀랍다!”
녹하는 그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어디서 잔꾀를 부리고 있어, 괜히 팔 한번 잡아 보겠다고 이러나 본데 간이 부어도 너무 부은 거 아냐?”
그는 명색이 뛰어난 무술 실력을 지닌 호위무사였지만 녹하의 매운 손맛 앞에서는 맥을 출 수 없었다. 가동은 자신의 방으로 줄행랑을 쳤다.
* * *
한편 묵용감은 잠이 든 백천범을 안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와 겉옷을 벗기고 침대에 눕혔다. 백천범의 꼬질꼬질해진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그는 기홍에게 젖은 수건을 가져오라 분부한 뒤 직접 그녀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본래 잠귀가 밝은 백천범은 작은 움직임에도 금방 잠에서 깼다. 그러나 어젯밤 한숨도 못 잔 데다 묵용감 옆에서는 늘 까닭 없이 마음이 놓였기 때문에 깨지 않고 새근새근 자는 것이었다. 묵용감이 나지막이 그녀를 달랬다.
“집에 왔으니 푹 자시오.”
그녀는 몸을 둥글게 말아 돌아눕더니 그대로 깊은 잠에 빠졌다.
묵용감은 세수와 양치를 했다. 어젯밤 성 밖에서 한달음에 달려온 탓에 피곤하긴 그도 마찬가지였다. 아직 이른 아침이었기 때문에 그는 잠시 침대에 누워 초왕비를 품에 안은 채 잠을 청했다.
어차피 그녀에게 사실대로 털어놓을 생각이었으니 거리낄 것도 없었다. 그녀를 품에 안자 가슴이 벅차오르는 게 더할 나위 없이 충실한 기분이었다. 그는 오늘부터 매일 밤 그녀를 품에 안고 잠을 청하기로 결심했다.
백천범은 따뜻한 그의 품에서 몇 차례 꼼지락거리더니 이내 얌전히 잠들었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그녀의 모습에 묵용감은 마음이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감격스러웠던 탓일까, 그는 한참이나 잠들지 못했고 멍하니 품속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처음엔 그저 보드라운 피부에 밋밋한 이목구비를 가진 어린아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자세히 보니 모르는 사이에 조금 자란 모습이었다. 그녀에게서 어렴풋이 소녀의 모습이 겹쳐졌다. 반들거리는 이마와 긴 눈꼬리, 뾰족한 턱과 불그스름한 입술까지. 그는 한참이나 뚫어지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숨결에서 달콤한 향이 났다. 자그마한 콧방울이 가볍게 들썩이는 게 사랑스럽기만 했다. 자는 모습이 이렇게 귀여운 사람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 어떤 미녀가 찾아와도 견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녀는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존재였다.
보면 볼수록 그녀가 더 사랑스러웠던 묵용감은 결국 참지 못하고 그녀의 얼굴에 입을 맞췄다. 그녀는 간지러웠는지 콧잔등을 찌푸렸다. 묵용감은 딱딱하게 굳어 괜스레 얼굴만 붉혔다.
그녀가 곤히 잠들자 묵용감은 함부로 뒤척일 수도 없었다. 팔이 저려 시큰거릴 정도였지만 그래도 그녀의 머리를 받친 팔을 빼지 않았다. 그 또한 그런 자신의 모습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녀를 끔찍이 아끼다 보니 어느새 그가 완전히 변해 버렸다.
해가 조금씩 높게 솟아올랐지만, 초왕과 초왕비는 서로를 끌어안은 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 * *
낙성각과 벽하각의 두 왕비는 이른 아침에 눈을 떴다. 사실 거의 잠을 이루지 못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저택 안에 큰일이 벌어졌는데 어찌 쉽게 잠들 수 있겠는가.
수원상은 꽃무늬가 조각된 붉은 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며 느릿하게 물었다.
“왕야께서 돌아오신 지 이리 오래되었는데, 회림각에는 별다른 소식이 없는 것이냐?”
“예.”
추문이 말했다.
“소인도 궁금해 죽겠습니다. 왕비 마마께서 한밤중에 가출을 하셨으니 왕야께서 분명 노발대발하셨을 텐데 어째서 아무 소식도 없는 걸까요?”
“왕야께서는 무얼 하고 계신다더냐?”
“주무신다고 들었습니다.”
“주무신다?”
수원상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왕야께서 마음이 참으로 넓으시구나.”
“소인 생각도 그렇습니다. 왕비 마마를 붙잡아 오셨는데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으시고 주무시기만 하시다니요. 정말 마음이 넓으십니다.”
“왕비는 무얼 하고 있다더냐?”
“그것이…….”
추문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왕비 마마께서 말에서 내리셨을 때 왕야의 품에 안겨 있었는데 크게 다치신 것처럼 보였다고 합니다. 아마 밖에서 왕야께 혼쭐이 났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의원은 부르지 않았다고 하니 소인 생각에는 이제 왕야께서 왕비 마마를 아무렇게나 방치하려는 것 같습니다.”
수원상이 또다시 물었다.
“서왕비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는 것이냐?”
“서왕비는 아직 벽하각에 있습니다. 아마 동정을 좀 더 살피려는 것이겠지요.”
수원상이 코웃음을 쳤다.
“서왕비도 수단이 좋구나. 왕비가 오밤중에 도망치도록 꾀어낼 줄도 알고. 하지만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을지 없을지는 왕야의 뜻에 달려 있지.”
추문이 살짝 놀라며 물었다.
“마마, 왕비 마마께서 저택을 나가신 게 다 서왕비가 꾀어낸 것이란 말씀이십니까?”
* * *
고청접은 내부에 밀고자를 두었기 때문에 저택의 사소한 소식까지 빠짐없이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회림각만큼은 엄격한 규율 탓에 정보가 밖으로 새어 나오는 법이 없었다. 초왕과 왕비가 저택에 돌아왔다는 사실만 전해 들은 그녀는 그 이후의 자세한 내막을 알 길이 없어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몇몇 하인들이 중문에서 백천범을 안고 회림각으로 드는 초왕의 모습을 지켜보았는데, 그들 말로는 왕비의 팔다리가 축 늘어진 게 기절한 것처럼 보였다고 했다. 초왕의 불같은 성격이라면 왕비를 찾자마자 크게 혼을 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야반도주한 아내를 찾는데 그 어떤 사내가 화를 참을 수 있을까. 초왕같이 자존심 센 사람은 분명 더 참기 힘들었을 것이다.
고청접은 입꼬리를 올려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 화가 다 가라앉지도 않은 초왕에게 기름을 부은 꼴이 되었으니 그는 백천범을 곧바로 처리할 것이었다.
* * *
태양이 점점 높게 솟아오르자 창문으로 햇살이 들이쳤다. 침대 주위를 둘러싼 장막 안에도 따사로운 햇볕이 스며들어 왔다. 하품을 하며 눈을 비비던 백천범은 몸을 쭉 펼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마치… 누군가의 품에 안겨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머리 위에서는 따뜻한 숨결이 느껴졌고 커다란 손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단단한 그의 가슴과 딱 붙어 있었다. 백천범은 놀라기는커녕 눈을 깜빡이며 가볍게 그 사람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쿡쿡 찔렀다.
허리를 감싼 손이 곧장 반응을 보이더니 본능적으로 더욱 힘껏 그녀를 감싸 안았다. 그녀의 작은 몸은 그와 더욱 가까이 붙어 코가 다 짓눌릴 정도였다.
갑갑하게 내쉬는 그녀의 숨소리에 묵용감도 결국 잠에서 깼다.
고개를 숙여 그녀를 바라본 그는 곧장 손을 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그녀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침대에서 내려갔다. 담담한 그의 표정은 마치 두 사람이 함께 잠을 청한 게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라고 여기는 듯했다.
말투 또한 조금 제멋대로였다.
“깼군. 일어날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