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9화
몰래 그를 지켜보던 고청접이 급히 다가와 그를 위로했다.
“왕야, 노여움을 푸시옵소서. 왕비 마마께서 아직 어리셔서 그런 것이니 너그럽게 이해해 주십시오. 오늘 소첩도 왕비 마마를 타일러 보았지만, 왕비 마마께서…….”
그녀는 말을 잇지 못하고 우물댔다.
역시나 묵용감이 궁금하다는 듯 그녀에게 물었다.
“왕비가 뭘 어쨌다는 것이오?”
“왕비 마마께서 이곳이 새장 같아 싫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떠나든 나중에 떠나든 어차피 떠나야 하니 조만간 나가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소첩은 그저 투정을 부리시는 줄로만 알았지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는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녀는 슬쩍 묵용감의 눈치를 살피다 다시 입을 열었다.
“하여 소첩이 왕야께서 이렇게나 잘해 주시는데 어떻게 나갈 생각만 하시냐고 왕비 마마를 타일렀습니다. 하지만 왕비 마마께서는 이곳에 계실 생각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부귀영화보다는 저택 밖에서 누릴 수 있는 자유로운 삶이 더 좋으시다고요.”
묵용감은 속으로 냉소를 지었다. 밖에 자신을 생각해 주는 사람이 있나 보지!
그녀에 대한 원망이 치밀어 올랐다. 가슴이 타들어 가는 듯한 괴로움에 결국 그는 말에 올라탔다. 당장 잡아 와 호되게 혼쭐을 내 주지 못하는 게 한스러웠다. 이곳에 있을 생각이 없다니, 참 대단한 계집이었다. 초왕비라는 칭호도 내팽개치고 사장풍과 자유롭게 지낼 날들만 손꼽아 기다리시겠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백천범의 행방은 깜깜무소식이었다. 성문을 지키는 병사들에게 모두 물어보았지만 성 밖을 나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백천범이 아직 성 안에 있다면 대체 어디를 갔단 말인가?
묵용감은 점점 더 초조해졌다. 임안성의 모든 객잔客棧과 술집을 다 뒤졌지만 백천범의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집마다 쳐들어가 찾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일을 크게 벌였다간 얼굴에 먹칠을 하는 꼴이기도 했고, 황제에게 소식이 전해지면 백성을 괴롭힌 죄를 물을지도 몰랐다.
동쪽에서 어슴푸레하게 동이 트기 시작했다. 날이 밝으면 찾기가 더 어려웠다. 그는 크게 한숨을 내쉬고 고삐를 틀어 다시 저택으로 향했다. 월규와 월향을 심문하면 실마리를 찾을지도 몰랐다.
그가 막 대문에 도착했을 때였다. 영구가 급히 그의 뒤를 쫓았다.
“왕야, 알아냈습니다.”
흠칫 놀란 묵용감이 물었다.
“왕비는 어디 있느냐?”
말에서 내린 영구는 마주잡은 두 손을 가슴 위로 올리며 대답했다.
“남문 병사 말이 대략 축시丑時 일각쯤 어떤 여인이 성문으로 찾아와 사 제독이 사는 곳과 그의 몸 상태를 물었다고 합니다.”
가늘게 뜬 묵용감의 두 눈에 냉기가 서려 있었다. 사장풍이 걱정되어 나간 것이었다니! 그림 속 우울했던 모습도 사랑하는 사내를 그리워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어금니를 꽉 깨물며 물었다.
“그래서 지금 어디 있느냐?”
영구는 잠시 주저하더니 어렵게 입을 열었다.
“왕비 마마를 의심한 병사들이 관청으로 데려가 옥에 가뒀다고 합니다.”
영구는 묵용감이 격노할 것이라 예상했지만, 그는 그저 가볍게 코웃음만 칠뿐이었다.
“대단한 줄 알았더니만 제 발로 저승길을 찾아갔구나.”
* * *
작은 체구가 쓸모 있을 때도 있긴 했다. 백천범은 몇 차례의 시도 끝에 굵직한 나무 창살 사이를 빠져나왔다.
백천범은 뛸 듯이 기쁜 마음을 가다듬고 치맛자락을 붙잡은 채 조심스레 밖으로 향했다. 그녀를 발견한 다른 죄수가 눈을 반짝이며 조용히 말을 건넸다.
“이봐, 협녀. 나도 좀 풀어 줘. 나가면 협녀한테 섭섭지 않게 해 줄게.”
백천범은 다른 이를 잘 도와주는 따뜻한 마음씨를 가졌지만, 이런 곳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도적이거나 악랄한 짓을 저지른 범죄자였다. 괜한 사람까지 도와줄 수 없었던 백천범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앞으로 향했다.
죄수는 불쾌했는지 얼굴을 굳혔다. 백천범이 빠져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그는 별안간 목청껏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죄인이 도망친다! 죄인이 도망친다!”
벽에 기대 졸고 있던 옥졸은 곧장 잠에서 깨어나 칼을 들고 백천범을 가로막았다.
“보통 실력이 아니구나. 감히 탈옥을 하다니.”
옥졸은 번쩍거리는 칼을 들고 한 발짝씩 앞으로 다가왔다.
“베이고 싶지 않으면 돌아가거라. 아직 재판도 받지 않았는데 염라대왕을 만날 수는 없지.”
다른 옥졸들도 서둘러 칼을 들고 뛰어 들어와 그의 뒤에서 다급하게 소리쳤다.
“반드시 붙잡아야 한다!”
하지만 눈앞에 웬 계집아이가 서 있자 옥졸들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때 누군가 놀란 말투로 말했다.
“뭐야, 어린 아가씨였잖아. 실력이 대단한걸. 하긴 그러니까 사 제독님도 당했겠지. 얼굴도 꽤 반반한데, 이 오라버니랑 재미 좀 볼까?”
목소리의 주인공은 방금 밖에서 뛰어 들어온 옥사쟁이였다.
그는 옥사 안을 밝히는 불빛을 비춰 어린 계집을 찬찬히 살폈다. 몸집은 작았지만 그래도 백옥같이 깨끗한 얼굴이 제법 예쁘장했다. 호색가였던 그는 늘 여자 죄수를 이용해 자신의 잇속을 챙겼고, 그보다 더 비열한 일도 서슴지 않았다.
어쨌든 이곳에 온 이상 개돼지만도 못한 사람들이었으니 헛되이 죽는 것보단 그에게 도움을 주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몇몇 옥졸들도 시시덕거리기 시작했다. 그중 마음씩 착했던 옥졸이 그를 타일렀다.
“형님, 부윤 대감께서 아침 일찍 심문을 하시겠다고 했습니다. 그만두시지요.”
옥사쟁이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웃음을 지어 보였다.
“걱정 말거라. 죽이진 않을 테니.”
그들의 추악한 말을 듣고 있던 백천범은 얼굴이 새빨개질 정도로 화가 치솟았다. 그녀는 새카만 두 눈으로 옥사쟁이를 노려보며 말했다.
“나는 초왕비다. 감히 날 건드렸다간 초왕야가 네 집안을 풍비박산 낼 것이다!”
“아이고, 네가 초왕비면 나는 초왕이다.”
옥사쟁이는 옹졸하게 웃어 보이더니 히죽대며 그녀 앞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겁내지 말거라, 기분 좋게 해 줄 테니 이 오라버니가 널 아끼는 것만 알아주거라.”
“저리 꺼져!”
백천범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더럽고 뻔뻔한 놈, 부녀자를 능욕하려 들다니. 국법도 모르는 것이냐!”
그녀는 저택을 나올 때 아무런 무기도 가져오지 않은 걸 뼈저리게 후회했다. 무기만 챙겼어도 어느 정도는 대적이 가능했을 텐데. 그래도 꼼짝없이 당하는 성격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녀는 팔을 들어 올리며 자세를 잡았다.
“이곳에선 이 몸이 바로 국법이니라!”
옥사쟁이는 더욱 기고만장하게 웃으며 눈썹을 치켜세우더니 그녀에게 조소를 퍼부었다.
“하이고, 무술까지 섭렵하셨겠다?”
그는 백천범에게 손을 뻗었다. 그 순간, 뒤에서 휙 하고 무엇인가 날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곤 그의 손을 무언가가 관통했다.
옥사쟁이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질렀다. 옥졸들이 뒤를 돌아보니 별이 달을 에워싸듯 여러 명의 하인들이 한 사람을 둘러싼 채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부윤 대감도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몸을 잔뜩 굽혔다. 마치 당장이라도 집안이 몰살될 것처럼 겁에 질린 기색이었다.
옥사쟁이에 손에 꽂힌 것은 작은 은색 칼이었다. 어찌나 깊게 박혀 있던지 선홍빛 피가 뚝뚝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빠르게 그의 팔 전체를 붉게 물들였다.
백천범은 방금까지 묵용감을 원망했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에게 많이 의지해 왔던 백천범은 무작정 그의 품에 안겼다.
“왕야, 드디어 오셨군요.”
하지만 묵용감은 그녀를 밀어내며 미간을 찌푸렸다.
“무엄하다, 본왕을 아느냐?”
백천범은 멍한 표정으로 웅얼거렸다.
“왕야, 왜 절 몰라보시는 거예요. 저 백천범이잖아요.”
초왕은 턱을 살짝 들어 올리더니 그녀를 비웃었다.
“본왕은 초왕비를 사칭하는 사람이 있다 하여 찾아온 것이다. 누가 겁도 없이 황족을 사칭하나 했더니 네 놈이었구나!”
백천범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녀가 초왕비인데 대체 무슨 사칭을 했단 말인가? 설마 한밤중에 저택을 나온 그녀에게 화가 나서 더 이상 그녀를 왕비라 생각하지 않는 것이란 말인가?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눈을 내리깔았다.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눈치였다.
묵용감이 말했다.
“초왕비를 사칭한 자를 잘 감시하거라. 내일 아침 참형에 처할 것이다!”
부윤 대감이 곧장 분부를 내렸다.
“당장 이 간사한 계집을 압송하라.”
백천범은 대담한 성격이었지만, 막상 죽음에 직면했다고 생각하니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녀가 곧장 묵용감에게 무릎을 꿇었다.
“왕야, 제가 잘못했어요. 군자는 소인의 잘못을 용서해 준다는 말도 있잖아요. 왕야께서 이번 한 번만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어요.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거예요.”
묵용감이 물었다.
“무엇을 용서해 달라는 것이냐?”
“다시는 몰래 저택을 나오지 않을게요.”
“그 말은 아직도 스스로를 초왕비라 여긴단 말이냐?”
“예.”
백천범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왕야, 그만 놀리시어요. 잘못했어요.”
묵용감이 코웃음을 쳤다.
“우리 왕비는 저택에서 곤히 자고 있는데 어찌 한밤중에 도망칠 수 있겠느냐. 너는 왕비를 사칭하는 게 틀림없다.”
“아니에요.”
급했던 나머지 백천범은 묵용감의 다리를 감싸 안으며 애원했다.
“왕야, 절 데리고 가 주세요. 잘못을 인정했잖아요. 제발 절 여기에 두고 가지 말아 주세요. 괴롭힘을 당하다 죽고 말 거예요.”
묵용감은 그녀에게 더 겁을 주고 싶었지만 다리를 감싸 안고 애원하는 그녀의 모습에 마음이 약해졌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불안에 떨며 괴로워하는 그녀의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 일렁이고 있었다.
묵용감은 그제야 말투를 고쳤다.
“일어나시오.”
백천범은 자리에서 일어나 간절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다른 이들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알려 주시오.”
“저는 초왕비입니다.”
“본왕은 왕비의 무엇이오?”
“왕야는 초왕야이십니다. 그리고 제 서방님이십니다.”
“그럼 나에게 왕비는 무엇이오?”
“저는 왕야의 왕비입니다.”
“그리고?”
그리고? 백천범은 머리를 쥐어짰다. 그리고? 원수의 딸? 분명 원수의 딸은 아니었다. 슬쩍 옆을 바라보니 가동이 사람들 사이에 서서 열심히 입을 벙끗거리고 있었다.
백천범은 가동의 입 모양을 따라 말했다.
“아내. 저는 왕야의 아내입니다.”
초왕은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왕비 입으로 직접 한 말이오.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소. 여기 있는 모든 이들이 증인이오. 백천범은 본왕의 왕비이자 나의 아내요.”
말을 마친 그는 백천범의 손을 잡고 부윤에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 집 왕비가 장난기가 심해 부윤 대감의 밤잠까지 설치게 했소. 정말 미안하오. 우선 왕비를 집에 데려간 뒤, 내일 다시 나머지 일들을 부윤 대감과 의논하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