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8화
월규는 그제야 서왕비의 속셈을 알아차렸다. 아깐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 크게 신경을 쓰지 못했다. 진즉 알아차렸다면 왕비가 나가지 못하도록 대비했을 텐데, 지금은 꼴좋게도 모든 이들이 왕비의 탈출을 알아 버리고 말았다.
서왕비는 이 사실을 초왕에게 고할 게 분명했다. 안 그래도 외출 금지가 내려진 상황에 이 소식이 전해진다면 왕비는 가중 처벌을 받을지도 몰랐다. 마음이 무거워진 월규는 앞으로 벌어질 일을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청접과 학평관이 찾아왔다. 백천범이 사라졌다는 소식에 두 사람 모두 놀라 허둥대는 모습이었다.
학평관이 정신없이 소리쳤다.
“온 저택에 등불을 켜고 한 명도 빠짐없이 왕비 마마를 찾아야 한다. 만약 찾지 못하면 왕야께서 너희의 가죽을 벗기실 것이다!”
고청접이 초조해하며 말했다.
“안 되겠습니다. 서둘러 왕야께 전갈을 보내는 게 좋겠습니다. 이 사실을 고하지 않으면 모두 벌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월규와 월향은 바닥에 무릎을 꿇어앉고 숨도 크게 내쉬지 못했다. 백천범에게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두 시녀는 제사상을 앞에 둔 사람처럼 처벌만 기다려야 했다. 백천범이 무사하다면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세상에서 가장 참혹하게 죽임을 당할 것이었다.
학평관은 고청접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서둘러 성 밖의 군영으로 하인을 보내 초왕에게 이 소식을 전했다.
* * *
초왕의 저택은 그야말로 난장판이 된 시각, 백천범은 아무것도 모른 채 유유히 저택을 빠져나왔다. 어릴 때부터 실력을 다져 온 그녀에게 개구멍으로 몰래 빠져나가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였다. 그녀는 야간 순찰원을 피해 다니며 재빨리 대문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온 뒤에도 별로 어려운 것은 없었다. 사장풍이 사는 곳은 성문을 지키는 병사들에게 물어보면 될 일이었다. 사장풍의 부하들이니 분명 그에 대해 낱낱이 알고 있을 것이었다.
밖에서 머물 수 있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가장 가까운 성문을 향해 빠르게 달려갔다.
성문과 가까워지니 두 명의 병사가 그 앞을 지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손에 창을 든 병사는 그녀를 발견하고 곧장 소리쳤다.
“누구냐?”
백천범이 웃으며 말했다.
“병사 나리들, 제가 좀 여쭤볼 게 있어서요. 혹시 사장풍 구문제독님이 어디 사는지 아시어요?”
두 병사는 서로를 바라보며 의아해했다. 웬 아가씨가 한밤중에 이곳까지 찾아와 제독 나리에 대해 묻는 것일까? 설마… 하지만 행색을 보니 기방 여인 같진 않았다.
서로 시선만 주고받던 두 사람 중 한 명이 그녀에게 물었다.
“누구시길래 제독 나리에 관해 묻는 것입니까?”
“저는…….”
백천범은 잠시 망설였다. 초왕비라는 사실을 밝혔다간 분명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 생길 것이었다.
“사 제독님이 심하게 다치신 걸로 아는데 지금은 어떠신지요? 좀 나아지셨나요?”
두 병사는 곧장 미간을 찌푸렸다. 사장풍이 다친 일을 아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범인은 멀리 도망친 지 오래라고 들었는데, 이렇게 정확하게 알고 있는 걸 보면… 분명 사장풍을 해한 일과 관련이 있는 자였다.
두 병사는 재빨리 그녀를 둘러쌌다.
“제독 나리께서 다치신 사실을 아는 걸 보니 우리와 함께 관청에 가셔야겠습니다.”
백천범은 상황이 불리해지자 서둘러 도망치려 했다.
“안 돼요, 전 집에 돌아가야 해요. 전 못 가요. 저는…….”
두 병사는 성루에 있던 병사들까지 불러내 백천범을 붙잡은 뒤 관청으로 압송했다. 이미 침소에 든 부윤府尹(지방 관아인 부府의 우두머리) 대감은 병사들이 찾아와 단잠을 방해하자 비몽사몽으로 내일 아침에 경위를 조사할 것이니 우선 옥에 가둬 두라고 분부했다.
결국 백천범은 옥에 갇히고 말았다. 부녀자였기 때문에 홀로 한 칸을 쓰긴 했지만, 굵직한 나무 창살 사이로 다른 죄인들이 보였다. 하나같이 헝클어진 머리에 남루한 행색이었다. 어떤 이는 벽 모퉁이에 기댄 채 앉아 있었고, 어떤 이는 멍석에 드러누워 드르렁드르렁 코를 골고 있었다. 공기 중에 섞인 시큼하고 역겨운 냄새가 코를 찔렀다.
백천범은 그제야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녀가 주저하며 신분을 밝히지 못한 것은 묵용감이 알게 된다면 더 수습이 어려워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다짜고짜 그녀를 옥에 가둬 둔 이상… 상황은 더 어려워진 듯했다.
동이 틀 때까지 돌아가지 못하면 분명 들킬 터였다. 자신이 곤장이나 채찍을 맞는 것은 상관없었지만 월향과 월규까지 벌을 받게 할 수는 없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친 그녀는 있는 힘껏 나무 창살을 두드렸다.
“옥졸獄卒 나리, 옥졸 나리! 저 좀 풀어 주세요. 저는 초왕비라고요.”
옥졸이 마구 욕을 하며 다가왔다.
“시끄럽게 뭐 하는 짓이냐!”
그는 백천범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경멸이 담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 여자가 미쳤나? 감히 초왕비를 사칭하려 들다니, 황족을 사칭하면 무슨 벌을 받는지 알고 이러는 것이냐? 목이 잘려 나간단 말이다!”
백천범은 서둘러 해명했다.
“정말 초왕비라고요. 못 믿겠으면 초왕의 저택에 가서 물어보세요.”
옥졸이 눈을 희번덕거리며 말했다.
“초왕의 저택이 어디라고, 아무나 갈 수 있는 곳인 줄 아느냐? 나더러 이 밤중에 무시무시한 군신 초왕야를 찾아가 죽임을 당하라는 것이냐? 나이는 어린 게 악랄하기 짝이 없구나!”
“왜 제 말을 믿지 않는 거예요?”
백천범이 울먹거렸다.
“정말 제가 초왕비라고요. 백 승상 댁 다섯째 딸이요.”
옥졸이 눈을 부릅뜨며 매섭게 말했다.
“허튼소리! 한 번만 더 그 입을 놀리면 네 입을 꿰매 버릴 것이다!”
* * *
꽉 막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던 묵용감의 가슴속 응어리도 성 밖에 나와 광활한 대지와 반짝이는 별을 바라보니 조금씩 풀어지는 듯했다.
그는 고민 끝에 이번 일의 원인은 자신에게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백천범을 탓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내일 저택으로 돌아가자마자 그녀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을 계획이었다. 그래야 앞으로 다른 문제가 생기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마음의 안정을 되찾은 그는 오랜만에 숙면을 취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밖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왔다. 단잠에서 깨자 묵용감은 노기가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
“누가 이리 시끄럽게 구는 것이냐?”
가동이 소가죽으로 만들어진 막사 입구에서 고했다.
“왕야께 아룁니다. 총 관리인 어르신께서 전갈을 보냈습니다. 왕비 마마가 사라지셨다고 합니다.”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귓가에 징 소리가 울렸다. 묵용감은 매서운 바람을 일으키며 황급히 밖으로 나왔다.
“사라졌다는 게 무슨 말이냐? 하인들은 다 죽었단 말이냐? 어서 말을 가져오거라, 저택으로 돌아갈 것이다!”
진즉 말을 끌고 와 대기하고 있던 영구는 그의 분부가 떨어지자마자 곧장 말을 대령했다. 묵용감은 힘껏 채찍을 휘두른 뒤 번개처럼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영구와 가동도 서둘러 말을 타고 그의 뒤를 따랐다.
크게 성이 난 초왕은 거리를 미친 듯이 질주했다. 어떤 놈이 감히 그의 저택에 침입해 사람을 납치했단 말인가, 죽고 싶어 실성한 것인가? 세 시진이 넘게 걸릴 거리를 그는 두 시진도 넘기지 않고 도착했다.
저택 입구를 지키던 머슴은 멀리서 말이 달려오자 초왕임을 단번에 알아차리고 곧장 대문을 열었다.
묵용감은 말을 타고 그대로 대문을 지나쳤다. 밖은 칠흑같이 어두웠지만 저택 안에는 수많은 등불과 횃불 때문에 대낮처럼 환했다. 초왕의 모습에 학평관은 하인들과 무릎을 꿇고 앉아 울상이 된 얼굴로 고했다.
“왕야, 소인을 죽여 주시옵소서. 왕비 마마께서, 왕비 마마께서 사라지셨습니다.”
묵용감은 오히려 냉정함을 되찾았다. 그가 굳은 얼굴로 물었다.
“다 찾아본 것이냐?”
“모두 찾아보았습니다. 뒷산까지 뒤졌지만 어디에서도 찾지 못하였습니다.”
고청접이 예를 갖춰 인사를 올리더니 흐느끼며 말했다.
“왕야, 소첩을 벌하여 주십시오. 다 소첩의 불찰입니다. 기분이 좋지 않은 왕비 마마를 소인이 잘 보살펴 드리지 못해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옵니다.”
묵용감은 그녀의 말에 담긴 뜻을 알아차리고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왕비가 왜 기분이 좋지 않았단 말이오?”
“그것이…….”
고청접이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아마 외출 금지를 당하신 것 때문에 답답하셨던 것 같사옵니다. 왕야께서도 아시다시피 왕비 마마께서 산책을 좋아하시지 않으십니까. 한데, 발이 묶여 있어 기분이 좋지 않으신 듯했습니다.”
“오늘 왕비를 만났소?”
“예.”
고청접이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말했다.
“어제 왕야께서 소첩에게 왕비 마마의 초상화를 그리라고 분부하셔서…….”
“그렸소?”
“예. 그렸습니다.”
“보여 주시오.”
고청접은 서둘러 자초에게 그림을 가져오라 분부했다.
묵용감은 뒷짐을 진 채 멀리 어렴풋이 보이는 정자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뒤 시선을 거둔 그가 다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서왕비의 말은 왕비가 기분이 좋지 않아 저택을 나갔다는 말이오?”
깜짝 놀란 고청접은 서둘러 무릎을 꿇었다.
“감히 소첩이 함부로 결론을 내리다니요. 그저 제가 알고 있는 사실을 왕야께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영구는 묵용감이 명을 내리지 않아도 곧장 남월각으로 향해 조사를 하고 온 뒤였다. 그는 곧바로 돌아와 묵용감에게 고했다.
“왕야, 다른 이의 침입 흔적은 없었습니다. 소인 생각에는 왕비 마마께서 직접 밖으로 나가신 듯합니다.”
묵용감도 그럴 것이라 예상했다. 동월국에서 감히 그의 저택에 침입해 납치 행각을 벌일 사람은 없었다. 게다가 쉽게 사람을 따돌리는 백천범의 실력을 떠올려 보면 그리 어렵지 않게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백천범은 제 발로 저택을 나간 것이다.
다만 이렇게 늦은 밤중에 대체 무엇 하러 밖을 나갔단 말인가? 여인 혼자 밖을 다니다가 못된 놈이라도 만나면 어쩌려고?
걱정이 깊어진 그는 가동에게 자신의 영패令牌(명령이나 군령을 전할 때에 쓰는 패牌)를 건네며 수도 위수부대로 가서 금군을 동원해 왕비를 찾으라 명했고, 영구에게는 성문을 다니며 탐문을 하라 분부했다. 우선은 성 밖을 나갔는지부터 확실히 알아야 했기 때문이다. 만약 화가 나 멀리 떠나가 버린 거라면…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는 속으로 그녀를 원망했다.
‘길러 준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것 같으니라고. 겨우 이틀 가둬 놨다고 가출할 생각을 하다니! 그래, 가거라. 가서 영영 돌아오지 말거라!’
가동과 영구가 떠난 뒤 자초가 그림을 가져왔다. 등불 아래에서 그림을 펼쳐 보니 역시나 근심 가득한 표정의 여인이 나타났다. 기분이 더욱 울적해진 그는 그림을 바닥에 던져 버렸다. 그는 몇 차례 거친 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