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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87)화 (186/1,192)

제187화

고청접은 수원상을 찾아와 몇 번이나 그녀의 속마음을 떠보았다. 그러나 수원상은 그녀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았다. 하지만 고청접은 포기하지 않았다. 여기에서 멈춘다면 다 된 밥에 재를 뿌리는 격이었다.

수원상은 또다시 처소에 갇힐까 겁이 나는 모양이었다. 담이 작아도 너무 작았다. 하지만 고청접은 달랐다. 초왕은 그녀를 신임했고 집안일까지 맡겼다. 비록 서비이기는 해도 권력만큼은 셋 중에 가장 강력했다.

집안일을 관리하면서 저택의 모든 하인은 그녀에게 굽실대기 시작했고, 초왕도 예를 갖췄다. 수원상이 기를 쓰고 정비가 되려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누구든 높은 곳에서 남을 내려다보길 원하니 말이다.

그러니 수원상의 행태를 탓할 수는 없었다. 그녀 또한 속세의 평범한 사람들처럼 진부한 틀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백천범을 처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수원상이 풀려난 것은 득이 될 게 없었다. 어쨌든 측왕비였기 때문에 조만간 기력을 회복하면 서왕비인 그녀를 짓밟을 수도 있었다.

수원상도 보통내기는 아니었다. 어쩌면 그녀의 마음을 이미 눈치챘는지도 몰랐다. 그래도 당장 수원상을 겁낼 필요는 없었다. 수원상은 전력이 있으니 초왕의 신임을 얻는 것은 꽤나 시간이 걸릴 터였다.

급한 건 백천범이었다. 백천범부터 처리한 뒤에 수원상을 쳐내면 될 일이었다. 고청접은 제 계획을 상기하며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분명 두 사람을 밟고 올라가 최후의 승자가 되는 이는 자신일 거라고…….

운수가 좋은 사람은 하늘도 막지 못하는 법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청접에게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초왕이 순행을 간다는 것이었다. 그날 밤, 그가 저택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소식에 고청접은 자초를 데리고 남월각으로 향했다.

백천범의 연금은 수원상과는 달랐다. 낙성각은 출입이 불가능했지만, 남월각엔 출입이 가능했기에 얼마든지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설사 친위병이 막아선다고 해도 그녀는 초왕의 분부를 받아 왕비의 초상화를 그려야 한다는 정당한 이유가 있었다.

백천범은 초상화를 그리러 왔다는 고청접의 말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예쁜 옷으로 갈아입은 그녀는 월규에게 머리에 장신구를 잔뜩 꽂아 달라고 부탁했다.

월규가 중얼거렸다.

“나중에 무겁다고 투덜대지 마십시오.”

백천범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휘황찬란한 머리를 바라보았다. 견줄 데 없이 화려하고 부귀한 모습에 그녀가 기뻐하며 말했다.

“친정집에 화공이 오면 언니랑 여동생들이 예쁜 옷을 입고 장신구를 꽂아 치장을 했거든요. 의자에 앉아서 가만히 있으면 그림이 완성됐는데… 그 그림이 얼마나 예뻤는지 몰라요. 족자에 붙여 방 안에 걸어 놓기도 했는데.”

고청접이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왕비 마마. 소첩이 왕비 마마를 아주 예쁜 미인으로 그려 드리겠습니다.”

월규가 말장단을 맞추었다.

“우리 왕비 마마께서는 원래도 아주 예쁘시지요.”

그 말에 고청접의 입꼬리가 아래로 처졌다. 예쁘긴, 대체 어딜 봐서.

하지만 그녀는 다시 우아하게 웃어 보이며 화제를 돌렸다.

“왕비 마마, 연극을 보러 가신 날 이상한 걸 보셨다면서요?”

백천범은 그녀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월규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듯했다. 월규가 다급히 입을 열어 말했다.

“왕비 마마께서는 그저 연극을 보러 가셨을 뿐인데요. 별다른 것은 보지 못했습니다.”

고청접은 조금 실망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 저는 왕비 마마께서 보신 줄 알았습니다. 듣자 하니 그날 웬 피투성이가 된 사람이 초주검 상태가 되어 끌려 나왔다고 하더군요. 지금쯤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고청접이 밑도 끝도 없이 꺼낸 말이었지만 백천범은 크게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백천범의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서왕비가 말하는 사람이 설마 사장풍일까?

“그게 누구인데요?”

“소첩은 모르옵니다. 그저 동락원에서 어떤 사내가 끌려 나왔는데, 온몸이 피범벅이었다고 하더군요. 숨을 헐떡이면서도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게 누구를 찾는 눈치였다고 합니다.”

“혹시 그자도 그날 연극을 보러 온 사람이었대요?”

“맞습니다.”

고청접이 이어 말했다.

“제 친정이 동락원과 가까운 탓에 머슴들이 똑똑히 보았다고 하더군요. 피 칠갑이 되어 원래의 얼굴을 알기 어려울 정도였다고 합니다. 딱하기도 하지. 대체 무슨 잘못을 했기에 그 꼴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장풍이 틀림없었다. 백천범은 속으로 탄식을 내뱉었다. 그녀는 묵용감에게 끌려 나와 그 뒤로 사장풍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 만약 정말 잘못되기라도 했다면 어찌한단 말인가?

생각할수록 묵용감이 미웠다. 그저 잠시 사장풍을 따로 만난 것일 뿐, 다른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닌데……. 이유도 묻지 않고 사람을 그 지경이 되도록 때리다니. 아무리 지위가 높다고 해도 사람 목숨을 지푸라기보다 더 가볍게 여기는 처사였다.

그녀는 마음이 무거워 견딜 수 없었다. 다 자신 때문이다. 연극을 보러 가지 않았다면 마주칠 일도 없었을 텐데……. 어엿한 구문제독인 사장풍이 그렇게 초주검이 되도록 맞다니, 그래선 안 될 일이었다.

마음이 괴로웠던 그녀는 그림에 대한 흥미도 사라졌다. 그녀는 머리에 꽂았던 장신구를 뽑으며 고청접에게 말했다.

“오늘은 그만할래요. 조금 피곤해서 쉬고 싶어요. 괜한 걸음을 하게 해서 죄송해요.”

“왕비 마마, 그러지 마시어요.”

고청접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소첩은 왕야께 가져다드릴 그림을 그리러 온 것입니다. 이러시면 소첩이 왕야께 그림을 드릴 수 없습니다.”

초상화를 그리라고 분부한 게 묵용감이라는 말을 듣자 더욱 불쾌해진 백천범이 씩씩거리며 말했다.

“아니, 그분이 원하면 제가 가만히 앉아 있어야 하는 거예요? 이제 그분 말은 안 들을 거예요. 이미 외출을 금지하셨으니 이제 해 봤자 절 내쫓기밖에 더 하시겠어요?”

“왕비 마마께서도 왕야의 성격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만약 그림을 전하지 못한다면 분명 소첩에게 죄를 물으실 것입니다. 왕비 마마, 그리게 해 주십시오. 잠시만 참으시면 됩니다.”

마음이 약했던 백천범은 고청접이 애원하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괜히 성질을 부리다 다른 사람에게까지 피해를 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분이 내키지 않았던 그녀는 두 개의 뒤꽂이만 꽂은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창 앞에 앉아 있으니 짙은 남색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바람이 불자 그녀의 머리카락이 가볍게 흩날렸다. 옆모습이었지만 그녀의 암울하고 쓸쓸한 분위기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고청접이 빠른 손놀림으로 몇 차례 붓질을 하니 금세 그녀의 윤곽이 드러났다.

고청접의 그림 실력은 정말 뛰어나긴 했다. 백천범의 모습이며 분위기까지 완벽하게 그려 냈다.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쓸쓸한 기색까지도…….

그림을 거의 다 그렸을 때쯤 멀리서 바라보던 월규가 입을 열었다.

“서왕비 마마, 왕비 마마와 비슷하긴 해도 웃는 모습이 전혀 담겨 있질 않습니다. 왕야께서 보시면 분명 기분이 좋지 않으실 것입니다. 다시 그리시는 게 어떠신지요.”

고청접도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네 말이 맞다. 다시 그리는 게 좋겠다.”

백천범은 자신의 초상화를 빤히 살펴보았다. 원한이 치솟는 듯한 그림 속 자신의 모습이 조금 우습긴 했다.

“안 그릴래요. 그냥 이 그림을 가져다드리세요. 그분께도 제가 이런 상태라는 걸 알려 드려야죠.”

고청접은 그녀가 말끝마다 묵용감을 그분이라고 칭하는 게 귀에 거슬렸다. 총애를 조금 받았다고 머리끝까지 기어오르려 한단 말인가? 대갓집에서 지아비는 하늘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감히 하늘에 대고 불경스러운 짓을 하다니, 조만간 분명 큰코다칠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계속 백천범을 타일렀다.

“왕비 마마, 다시 그리는 게 좋겠습니다. 왕야께서 보시면 화를 내실 것입니다.”

그녀가 계속 타일렀지만 백천범은 고집을 부리며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고청접은 결국 말머리를 돌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담 모퉁이에 있는 토끼를 바라보며 말했다.

“왕비 마마, 토끼를 잘 관리하셔야겠습니다. 지난번에 보니 담장에 꽤 큰 구멍이 있기에 노비들에게 잘 감시하라고 일러두었습니다.”

백천범은 흠칫 놀라는 듯하더니 이내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려 줘서 고마워요, 언니. 조심할게요.”

* * *

달마저 구름 뒤로 숨은 밤, 남월각은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마침 문 앞을 지키는 친위병들은 근무 교대를 하고 있었다. 아무 말도 나누지 않고 묵묵히 움직이는 탓에 미세한 갑옷 소리만 희미하게 울려 퍼졌다.

백천범은 늦은 밤 시녀들의 시중을 받는 게 익숙지 않았기 때문에 당직을 서는 방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충직했던 시녀 월향과 월규는 추워진 날씨에 왕비가 이불을 걷어차진 않았을까 걱정하며 잠에서 깰 때마다 왕비의 방을 찾아 이불을 덮어 주었다.

잠에서 깬 월향이 작은 등을 들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어두컴컴한 방에는 한 줄기 희미한 빛이 침대 주위를 비추고 있었다. 조심스레 다가가 침대를 감싼 장막을 걷어 올리자 이불 밑으로 살짝 솟아오른 그녀의 몸이 보였다. 월향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불을 걷어차진 않았지만 그래도 갑갑하게 머리까지 뒤덮고 있는 것은 좋지 않았다.

등을 내려놓은 월향은 조심스레 이불을 끌어 내렸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람, 이불 밑에는 또 다른 이불이 놓여 있었다. 왕비가 사라진 것이었다!

깜짝 놀란 월향은 깊게 고민할 겨를도 없이 목청을 높였다.

“큰일 났습니다, 왕비 마마께서 사라지셨습니다!”

그녀의 외침에 남월각은 곧바로 긴장에 휩싸였다. 잠에서 깬 하인들은 어찌해야 할지 몰라 허둥지둥댔다. 왕비가 사라지면 초왕이 그들의 살갗을 벗기겠다며 엄포를 놓았기 때문이었다.

밖을 지키던 친위병도 안으로 뛰어 들어와 내부를 샅샅이 수색했다. 월규는 월향을 한쪽으로 끌고 와 조용히 질책했다.

“이렇게 크게 소리치면 어떡해? 이 꼴 좀 봐, 이젠 조용히 넘어가고 싶어도 그럴 수 없게 됐잖아.”

월향이 툴툴거리며 말했다.

“순간 너무 놀라서 그랬지! 이제 어떡해?”

“우리에게 그렇게 무심하게 대하시는 분은 아니니까 분명 날이 밝기 전에 돌아오실 거야.”

그러면서 월규는 퉁명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보다 이 꼴을 만들어 놓은 건 넌데, 나한테 물어보면 대체 어쩌라는 거니?”

월향이 손가락을 비비 꼬며 말했다.

“왕비 마마 걱정은 안 돼? 이렇게 늦은 밤에 갑자기 사라지셨는데, 혹…….”

“왕비 마마께서 나가겠다고 결심하셨는데 누가 말릴 수 있었겠어.”

경비가 삼엄한 초왕의 저택에서도 남월각은 가장 많은 인력이 배치된 곳이었다. 왕비를 몰래 빼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백천범이 제 발로 나간 게 틀림없었다. 분명 서왕비의 말에 사장풍이 걱정되어 그를 만나러 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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