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186)화 (185/1,192)

제186화

“그것은…….”

수원상이 난처하다는 듯 말했다.

“분명 쉽지 않을 것입니다. 왕야께서 왕비 마마를 마음에 품고 계신데 왕비 마마를 어느 곳으로 보낼 수 있겠습니까? 왕야께서 다시 데려오시겠지요. 왕비 마마에 대한 왕야의 마음이 식는다면야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그땐 우리가 나서지 않아도 왕야께서 처리하시겠지요.”

고청접은 수원상이 왕비를 뼛속까지 증오하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수원상을 꼬드겨 함께 계략을 꾸미다가 혹시라도 일이 잘못되면 수원상에게 모든 잘못을 떠넘길 계획이었다. 그런데 초왕을 들먹거리며 자신의 입을 막다니. 고청접은 정말 수원상이 교활한 여자라고 생각했다.

“어찌해야 왕비 마마에 대한 왕야의 마음이 식을 것 같으신지요?”

수원상이 눈을 내리깔며 웃었다.

“몇 번이고 거듭해야지요. 왕야께서는 자존심이 강한 분이시니 매번 관용을 베풀진 않으실 것입니다. 상처를 입으시다 보면 분명 손을 떼실 날이 오겠지요.”

그 말에 고청접은 수원상과 자신의 생각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만약 수원상의 연금이 풀리지 않았다면 고청접은 홀로 한 명씩 처리했을 것이다. 하지만 수원상이 풀려나 고청접을 주시하게 됐으니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분명 자신이 손을 쓰면 수원상이 눈치를 챌 것이었다. 수원상이 그녀가 벌인 짓을 눈치챈다면 그다음엔 고청접이 연금될 것이 분명했다.

이런 이유로 그녀는 수원상을 끌어들이는 게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아직 기회는 많으니 서두를 필요 없었다. 괜히 수원상에게 속마음을 들켰다간 일이 더 복잡해질 터였다.

고청접이 떠난 뒤 추문이 입을 열었다.

“마마, 서왕비는 단순한 사람이 아니니 저자의 계략에 빠지시면 아니 될 것입니다. 지난번에도 왕야 앞에서 고의로 마마를 걸고넘어지지 않았습니까. 그에 비해 왕비 마마께서는 조금 단정치 못하셔도 서왕비보다 더 나은 분입니다…….”

수원상은 웃을 듯 말 듯한 표정을 지었다.

“왕비가 좋더냐?”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왕비 마마 덕분에 먹는 것은 많이 나아졌으니까요.”

수원상이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만약 왕비가 좋다면 내일 학평관 어르신께 널 남월각에 보내라고 말씀드리마.”

깜짝 놀란 추문이 무릎을 꿇고 자신의 뺨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마마, 노여움을 푸시옵소서. 소인이 실없는 소리를 하였습니다.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소인은 마마의 사람이옵니다. 죽는다 한들 마마를 지키는 귀신이 될 것입니다. 절대로 다른 마음 따윈 없사옵니다.”

수원상은 찻잔을 들고 차를 홀짝이며 담담히 말했다.

“일어나거라. 그렇게 할 것까지야 있겠느냐. 네 말도 맞다. 서왕비는 날 끌어들여 백천범을 몰아내려는 것이다. 그러다 무슨 일이 생기면 나에게 모든 잘못을 뒤집어씌우겠지. 어쨌든 난 전력이 있으니 왕야께서 내 말은 믿어 주지 않으실 것이다.”

추문이 웅얼거리며 말했다.

“그러면 마마께서는…….”

“백천범이 계략 따위를 쓰는 사람은 아니라 한들, 왕야를 구워삶는 재주가 있으니 절대 얕봐서는 안 된다. 설사 외간 남자와 외도를 저지른다 해도 말이다!”

그녀가 경멸스럽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를 누가 마음에 품겠느냐? 구문제독이라니, 분명 고청접이 꾸며 낸 일일 것이다. 왕야께서는 절대 호락호락한 분이 아니시다. 지금은 비록 화에 휩싸여 잠시 분별을 못하신다 해도 시일이 지나면 고청접도 의혹을 면치 못할 것이다. 본비가 그런 흙탕물을 만질 수는 없지. 난 그저 고청접이 버텨 내는지 구경만 할 것이다.”

“하지만 왕비가 계속 저택에 남는다면 정비의 자리는…….”

수원상은 찻잔에 담긴 차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된다면 그것 또한 내 운명이겠지.”

추문은 쓸쓸한 그녀의 모습에 마음이 뭉클해졌다.

“마마, 황제 폐하께 청을 드려 달라고 대감마님께 말씀드리는 게 어떠신지요. 처음에 폐하께서도 언질을 주지 않으셨습니까?”

“안 될 일이다.”

수원상이 말했다.

“그리한다면 왕야의 심기를 건드려 일을 더욱 망칠 뿐이다.”

그녀는 밖으로 나와 발걸음이 내키는 대로 무작정 걸었다. 추문은 곧장 겉옷을 집어 들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

“마마, 천천히 가십시오. 바깥바람이 찹니다. 겉옷을 입으시지요.”

수원상은 멈추지 않고 계속 걸어갔다.

“필요 없다. 잠시 거닐려는 것이다.”

그녀는 낙성각 밖으로 나왔다. 입구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 가슴이 벅차올랐다. 살면서 외출 금지를 당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천금 같은 규방 아가씨로 자란 그녀는 친정에서도 대문과 중문 출입을 자제하며 지내긴 했지만, 처소에 발이 묶인 채 친위병이 문 앞을 지키며 연금을 당한 경험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낙성각에 있는 동안 속박이라는 두 글자가 줄곧 그녀의 마음을 괴롭히고 있었다.

그녀는 비스듬히 자리한 남월각을 바라보았다. 정원에 걸린 등불에 희미하게 그림자가 아른거렸다. 만약 입구를 지키는 수문장 두 명이 없었더라면 외출 금지가 내려진 곳이란 사실을 망각할 정도였다.

그녀는 좁은 길을 따라 천천히 앞으로 다가갔다. 투각된 벽 사이로 머슴이 토끼를 잡는 모습이 보였다. 한쪽에 있던 다른 시녀가 웃으며 말했다.

“왕아, 할 수 있겠어? 못하겠으면 왕비 마마께 말씀드려. 왕비 마마께서 설구와 구구를 부르시면 얌전히 따라 들어가니깐.”

머슴인 왕이가 말했다.

“됐어. 왕비 마마께서 눈이 퉁퉁 부으실 때까지 우신 것도 못 봤어? 우린 노비라고. 이런 일도 못하면 왕비 마마께 무슨 일을 해 드리겠어?”

“알겠어. 그럼 고생하셔. 천천히 잡으라고.”

시녀는 입꼬리를 올려 한번 웃어 보이더니 금세 안으로 들어갔다.

왕이는 정원에 서서 코웃음을 쳤다.

“난 너 대신 열심히 토끼를 잡고 있는데 그렇게 손 털고 간다고? 진짜 양심도 없다.”

수원상은 조금 의아했다. 백천범은 눈이 퉁퉁 불 정도로 울었다면서 노비들은 어찌 이리 시시덕거린단 말인가? 낙성각의 모습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그녀가 연금되었을 때는 노비들도 하나같이 축 처진 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추문이 끝내 그녀에게 겉옷을 걸쳐 주며 조용히 말했다.

“소인은 왕비께서 늘 웃기만 해서 우는 법을 모르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눈이 퉁퉁 붓도록 우셨다니……. 왕야께서 분명 아주 매섭게 혼을 내셨나 봅니다.”

수원상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녀의 연금은 백천범이 친히 하사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처지가 완전히 뒤바뀌었다. 백천범의 발이 묶인 꼴을 보니 수원상의 억울함이 사라지는 듯했다.

그녀는 고청접과 손을 잡고 계략을 꾸밀 생각은 없었지만, 백천범이 빠른 시일 안에 저택을 떠나길 고대했다. 그녀는 정비의 자리는 물론 묵용감의 마음도 얻고 싶었다.

* * *

며칠 후, 백천범은 모든 일을 잊고 즐거운 나날을 보냈다. 거의 종일 토끼와 놀거나 정원에서 무술을 연마했다.

밖으로 나갈 수 없으니 그녀는 온갖 방법을 동원해 시간을 보내야 했다. 오늘은 새로운 방법을 시도해 보는 날이었다. 그녀는 가랑이 사이에 향을 피우고 기마 자세를 취했다. 머슴과 시녀들은 한 줄로 죽 늘어서서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향이 반쯤 타들어 갔을 즈음, 백천범의 얼굴은 터질 듯이 새빨개져 있었다. 그녀의 몸이 점점 더 아래로 내려가자 월규가 그녀를 타일렀다.

“왕비 마마, 그만하십시오. 이미 충분히 오래 하셨습니다. 사내들과 비교해도 차이가 없으실 정도입니다.”

말을 할 수 없었던 백천범은 숨을 참고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진지하고 엄숙한 표정이었다.

왕이가 작은 소리로 옆에 있던 시녀 련이에게 말했다.

“우리 왕비 마마께서는 특이하시다니까. 어느 집 아가씨가 이런 고통을 견디겠어. 정말 대단하셔.”

련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안 그러셨다면 어떻게 왕야의 눈에 드셨겠어?”

왕이가 주변을 한 차례 둘러보다 목소리를 낮게 깔고 말했다.

“왕비 마마께서 대체 어찌하셨길래 왕야께서 이렇게 화가 나신 거야?”

련이는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

“아무것도. 왕야와 왕비 마마께서는 걸핏하면 말다툼을 하시잖아. 그러다 금방 괜찮아지시고 말이야. 처음 있는 일도 아닌데, 뭘. 며칠만 기다리면 왕야께서 분명 외출 금지를 풀어 주실 거야.”

“하긴.”

왕이가 웃으며 말했다.

“왕야께서 왕비 마마를 그렇게 좋아하시는데 왕비 마마를 보러 오시지 않고 견디시겠어?”

왕이는 의미심장한 말을 하며 련이에게 눈을 깜빡였다.

얼굴이 붉어진 연이가 막 입을 열려는데 갑자기 월규가 다가와 콧방귀를 뀌었다.

“왕비 마마께서 무술을 연마하시는데 옆에서 조용히 있지는 못할망정, 여기서 수다나 떨고 있니? 내가 향을 피워 줄 테니 너희도 가서 기마 자세나 해.”

정원에 있던 하인들 모두 폭소를 터트리며 익살맞은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련이가 난감해하자 왕이가 대신 넉살 좋게 용서를 구했다.

“누님, 이번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련이의 이 가느다란 팔다리 좀 보십시오. 어찌 기마 자세를 할 수 있겠습니까?”

월규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대체 어느 대갓집 아가씨길래 왕비 마마도 하시는 걸 못한다는 거야?”

그 말에 련이는 낙담한 듯 한쪽으로 걸어갔다. 왕이는 급히 그녀를 붙잡으며 월규에게 청했다.

“아이참, 누님. 그럼 련이의 몫까지 제가 대신하면 안 될까요?”

월규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손가락으로 왕이의 이마를 찔렀다.

“네가 이렇게나 순정파였다니, 전혀 몰랐네. 됐어. 농을 그렇게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그래?”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백천범은 련이가 부러웠다.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은 그녀에겐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바로 이런 남편을 원했다. 가장으로서 책임감이 있고, 부인을 아껴 줄 줄 아는 왕이 같은 사람을. 만약 련이가 왕이에게 시집을 간다면 분명 행복하게 지낼 수 있을 것이었다.

며칠 동안 월규는 백천범에게 끊임없이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하늘 아래 초왕 같은 부군은 없다며 그동안 그가 백천범에게 잘해 줬던 일들을 하나씩 나열했다. 하지만 백천범은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그녀는 초왕이 오빠로서 그녀를 지켜 주는 쪽이 더 좋았다.

그는 친왕이었다. 서너 명의 첩을 들여 가문을 번성시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위치를 알기에 그녀도 그를 방해할 수만은 없었다.

그때, 갑작스레 백천범의 엉덩이에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깜짝 놀란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높게 뛰어올랐다. 뒤쪽을 살펴보니 향에 옷 끝이 그을려 있었다. 눈앞에 둔 성공이 수포가 되자 화가 난 그녀는 발을 동동 굴렀다.

역시 사부의 말이 맞았다. 무술을 연마할 땐 반드시 온 정신을 집중해야 했다. 아주 잠깐이라도 다른 생각을 해서는 안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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