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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85)화 (184/1,192)

제185화

고청접은 심장이 두근거렸다. 평소 그림에 자신이 있던 데다 묵용감의 그림에는 더욱 심혈을 기울였기 때문에 그도 분명 마음에 들어 할 것이었다.

역시 묵용감은 고개를 끄덕이며 몇 마디 칭찬을 건넸다.

“좋소. 생동감이 넘치는군.”

“감사합니다, 왕야. 보잘것없는 재주에 불과하지만 왕야께서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묵용감은 한참을 들여다보더니 갑작스레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고청접은 떨리는 마음을 가다듬고 감격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언제 왕비의 그림도 한 장 그려 주시오. 잘 그리면 본왕이 상을 내리겠소.”

“…….”

찬물 한 바가지를 머리에 끼얹은 기분이었다. 그는 백천범을 단념할 생각이 추호도 없는 듯했다. 그녀는 증오심에 어금니를 꽉 깨물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온화했다.

“예. 내일 왕비 마마를 그려 드리겠습니다.”

“좋소.”

묵용감은 손을 휘저었다.

“다른 용건 없으면 그만 나가 보시오.”

고청접은 크게 실망했다. 그림을 받아 든 그가 미소를 지어 주길 바랐건만 이렇게 될 줄이야.

백천범에게 외출 금지를 내린 것은 묵용감으로서도 번복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장 찾아갈 수도 없는 상황이니 그림으로라도 그녀를 향한 그리움을 달래 보려 부탁한 일이었다.

그녀는 예를 갖춰 인사를 올린 뒤 분노에 찬 얼굴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때 뒤에서 묵용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측왕비도 이 정도면 충분히 죄를 뉘우쳤을 테니 이제 벌을 면하겠다고 전하시오. 오늘부터 외출 금지를 해제할 것이오.”

그의 명은 고청접에게 일침을 놓듯 큰 충격을 가했다. 어떻게 가두었는데 다시 풀어 준단 말인가. 측왕비가 저지른 일은 더 이상 추궁하지 않을 것이란 말인가?

그녀가 다시 고개를 돌려 미소를 지었다.

“아주 기쁜 소식입니다. 분명 크게 기뻐하실 것입니다. 소첩이 곧장 찾아가 왕야의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밖으로 나가니 날이 조금 어두워져 있었다. 하지만 한낮의 태양이 눈을 찌르는 듯 현기증이 났다. 고청접은 자초의 손을 잡고 잠시 정신을 가다듬은 뒤에야 후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안색이 좋지 않아 자초는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자초는 그녀를 부축한 채 천천히 앞으로 향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고청접의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나는 가두고 하나는 풀어 주고, 남 좋은 일만 했구나.”

자초가 깜짝 놀라 물었다.

“측왕비를 풀어 주신단 말입니까?”

“그래.”

어슴푸레하게 보이는 고청접의 표정은 살짝 넋이 나가 보였다.

“네가 한번 말해 보거라. 왕야께서 대체 무슨 생각이시란 말이냐?”

자초가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애초에 측왕비는 왕비 때문에 연금되지 않았습니까. 왕비가 왕야의 총애를 잃은 지금, 왕야께서 예전 일은 신경 쓰지 않으시려는 게 아닐까요?”

고청접이 입꼬리를 올리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셋 중에 왕야께서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백천범, 그다음은 수원상, 그다음이 나일 것이다.”

그녀가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내가 선두에 설 기회는 없을 듯하구나.”

“마마, 그런 말씀 마십시오. 지금 저택의 권력은 마마님께서 쥐고 계시질 않으십니까. 왕비는 갇혀 있고 측왕비는 아무런 힘도 없습니다. 마마야말로 가능성이 가장 크신 분이십니다.”

고청접은 아무 말도 없이 보일 듯 말듯 희미하게 떠오른 초승달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사내의 마음에 들지 못하면 아무리 애를 써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자신이 만든 상황은 스스로를 더 옭아맬 뿐, 그녀에게 어떠한 이득도 주지 못했다.

고청접이 낙성각에 도착했을 때, 수원상은 정원에서 꽃에 물을 주고 있었다. 고청접은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목소리를 높였다.

“듣자 하니 형님께서 꽃을 그렇게나 아끼신다면서요. 해가 뜨고 질 때마다 한 번씩 물을 주신다고 하던데 정말 정성껏 돌보십니다.”

수원상은 그녀의 방문이 조금 뜻밖이었다. 처음과 달리 완전히 틀어져 버린 둘은 영영 원수로 남을 듯했다.

수원상이 입꼬리를 올리며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

“서왕비가 이곳은 어쩐 일입니까? 내 처소는 금지된 곳이라 왕야께서 아셨다간 경을 치실 텐데요.”

“아직 모르고 계셨습니까?”

고청접이 천천히 그녀 앞으로 다가가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축하드립니다, 형님. 이 아우가 왕야의 말씀을 전하러 왔습니다. 오늘부터는 자유롭게 드나드셔도 됩니다. 보십시오.”

그녀가 입구를 가리켰다.

“밖을 지키던 친위병들도 모두 철수하지 않았습니까.”

물론 좋은 소식이었지만 수원상은 조금 실망스러웠다. 외출 금지를 해제하겠다는 것은 묵용감이 더는 그 일에 대해 추궁하지 않을 것이란 뜻이었다. 하지만 어째서 그 소식을 직접 전하지 않는단 말인가?

어쨌든 좋은 소식은 분명했기 때문에, 수원상이 한결 좋아진 안색으로 말했다.

“들어와서 나와 이야기를 나누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녀와 다시 좋은 관계를 회복해야 했던 고청접은 선뜻 그녀의 초대에 응했다. 두 사람이 막 방에 들어가려는데 찬합을 가져온 머슴이 입구에서 시녀를 불렀다.

고청접은 몸을 돌려 머슴에게 말했다.

“다시 가져가거라. 오늘부터 찬합을 가져오지 않아도 된다. 다시 예전의 규율을 따라 측왕비께서 드시고 싶은 것을 드실 것이다.”

그녀는 다시 고개를 돌려 자초에게 분부했다.

“부엌에 가서 내 음식을 가져오거라. 오늘은 형님과 함께 식사를 할 것이다.”

말을 마친 그녀는 조금 겸연쩍어하며 수원상에게 말했다.

“형님, 제가 너무 무례하게 구는 것인지요?”

“그게 무슨 소립니까.”

수원상이 웃으며 말했다.

“내가 신세를 지는 것이지요.”

방에 든 두 사람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수원상은 낙성각에 갇혀 지내긴 했지만 밖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모두 듣고 있었다. 묵용감이 백천범을 끌고 남월각에 왔던 것도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묵용감이 내뱉은 말을 한 글자도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었다.

“모두 잘 듣거라. 오늘부터 왕비의 외출을 금할 것이니 왕비는 처소 밖으로 단 한 발짝도 나갈 수 없다. 감히 왕비를 내보내는 자가 있거든 본왕이 그자의 가죽을 벗겨 버릴 것이다!”

정원에 있던 그녀는 묵용감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그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녀는 백천범이 무슨 짓을 했길래 초왕이 이렇게까지 성을 내는지 정말 궁금했다.

하지만 그녀는 궁금한 마음을 억눌러야 했다. 고청접에게 그녀가 먼저 물어볼 수는 없었다.

찻잔을 반쯤 비웠을 때 고청접이 결국 먼저 입을 열었다.

“형님, 알고 계십니까? 형님께서는 이제 자유로운 몸이 되셨지만 왕비 마마는 오늘부터 외출 금지에 처했습니다.”

수원상이 깜짝 놀란 척을 해 보였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왕야께서 왕비 마마를 얼마나 아끼시는데 외출 금지라니요?”

고청접이 잠시 주변을 살폈다. 수원상은 곧장 그녀의 의도를 파악하고는 추문을 제외한 나머지 하인들을 모두 물렸다.

고청접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입을 가리고 시시덕거렸다.

“입에 담기에도 참 난감한 일입니다. 형님께서는 상상도 하지 못하셨겠지요. 우리 왕비 마마께서도 정말 참을성이 없으십니다. 왕야의 뒤에서 외도를 하시다니요.”

수원상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묵용감이 백천범을 총애하는 것은 저택의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백천범은 만족도 할 줄 모르고 몰래 외도를 저지른 것이다. 천하에 묵용감과 견줄 수 있을 만한 사람이 어디에 있다고 누구와 외도를 한 것일까?

“설마요?”

그녀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말을 이었다.

“왕야께서 그렇게 잘해 주시는데 어찌 다른 사내를 마음에 품을 수 있겠습니까? 그 악독한 자는 잡아들였습니까?”

“왕야의 성격대로라면 분명 혼을 내 주셨겠지요.”

고청접이 경멸에 찬 표정으로 코웃음을 쳤다.

“나름 젊은 인재인 듯하였습니다. 어린 나이에 구문제독이 되었다는군요. 하지만 왕야께 비하면 한참이나 부족한 수준이지요. 우리 왕비 마마께서는 정말 남자 보는 눈도 없으십니다.”

수원상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세상에는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으니 저마다 좋아하는 것도 다르지 않겠습니까. 나는 저 사람을 좋아하는데 저 사람은 또 다른 이를 좋아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치정에 빠진 남녀가 그리 많은 게 아니겠습니까.

사랑에 관한 일은 아무리 강요한다 해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법이지요. 왕야께서 왕비 마마를 얻으셨다 해도, 왕비 마마의 마음은 얻지 못하셨으니 화가 나실 법도 합니다. 그래서 외출 금지를 내리신 것이군요.”

“형님 말씀이 맞습니다.”

고청접이 손뼉을 치며 웃었다.

“형님께서 왕야께 방금 그 말씀을 해 드리는 게 좋겠습니다. 왕야께서 어찌나 화가 나셨는지 방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다 깨부수셨습니다.”

“왕야께서는 큰일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수원상이 말했다.

“한바탕 화를 내시고 나면 괜찮아지시니, 아우님이 자주 찾아뵙고 왕야를 다독여 드리십시오.”

“형님께서 가시는 게 더 좋을 것입니다. 저는 언변이 뛰어나지 않아 왕야께서 싫어하실까 봐 걱정입니다.”

고청접은 손가락에 낀 청옥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무엇인가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수원상이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게 할 말이 있는 것이지요?”

“형님, 형님께서는 측왕비이십니다. 왕비 마마 다음으로 가장 높은 분이시지요. 지금은 이 아우가 집안일을 맡고 있지만 조만간 이 일도 형님께 넘겨 드려야 할 것입니다. 왕야께서는 늘 정사로 정신없이 바쁘신데 우리는 집안일을 관리하는 것 말고는 도와 드릴 방법도 없지요.

이런 일이 벌어졌는데 왕야께서는 왕비 마마께 아무런 말씀도, 아무런 처벌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아무래도 이 아우는 왕야께서 아직 왕비 마마께 미련이 남으신 게 아닌지 의심스럽습니다. 형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왕비 마마는 깊게 고민 않고 행동하시는 자유분방한 성격이 아닙니까. 조만간 또 다른 문제가 생길까 봐 걱정입니다.

왕비 마마께서는 저택을 떠나고 싶어 하시는 듯한데, 지금은 왕야께서 별다른 처사를 하지 않으시는 듯합니다. 제 생각에는 쇠뿔도 단김에 빼듯 왕비 마마를 일찍 내보내는 게 저택의 안정을 위하는 길일 듯합니다. 안 그랬다간 또다시 엄청난 일이 벌어져 왕야의 체면만 깎을지도 모르지요. 형님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수원상은 속으로 웃음을 금치 못했다. 지금껏 시답잖은 말만 늘어놓더니 진짜 하려던 말은 그녀를 끌어들여 함께 백천범을 내보내자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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