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4화
눈물을 너무 많이 쏟은 탓에 백천범의 두 눈은 호두알처럼 퉁퉁 부어 있었다. 월규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몰랐다. 때문에 단순히 초왕과 말다툼을 했을 것이라 생각하곤 그녀를 따뜻하게 위로해 주었다.
유모의 죽음 이후 처음으로 눈물이 멎지 않았다. 참을 수 없이 억울하고, 실망스럽고, 처량했다. 그녀에게 유모를 제외하고 가장 가까운 사람은 묵용감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가 그녀에게 가장 심한 상처를 주었다.
그녀는 지금껏 그 엄청난 화의 근원을 알지 못했다. 그녀에게 잘 대해 줄 땐 보석만큼이나 그녀를 귀하게 아껴 주었지만 그렇지 않을 땐 깊은 수렁으로 그녀를 밀치는 것 같았다.
월규는 다른 사람들을 모두 내보내고 문을 걸어 잠근 뒤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일을 하시고 대체 무슨 낯으로 우시는 것입니까?”
백천범이 눈물로 뒤범벅된 얼굴을 들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가 무슨 짓을 했는데? 왜 월규 네 말투도 왕야랑 똑같은 거야?”
월규도 그녀가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아무런 교육도 받지 못하고 홀로 커 온 탓에 이렇게 자유분방한 성격이 된 것 또한. 월규는 왕비의 시녀로서 그녀에게 사실을 일깨워 줄 책임이 있었다.
“왕비 마마, 어떻게 밖에서 외간 남자와 밀회를 하실 수 있으십니까? 소문이 나면 왕야의 체면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다들 그 체면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렇게 왕야의 체면을 깎으시니 왕야께서 당연히 화가 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녀는 손수건으로 백천범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오늘은 왕야께서 많이 봐주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 사장풍이란 사람의 목을 베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백천범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녀는 눈물을 그치고 월규에게 물었다.
“목숨을 해하다니, 그런 억지가 어디 있어?”
“누구든 그런 일을 맞닥뜨리면 화가 나는 법인데 어떻게 이성적으로 행동할 수 있겠습니까. 사장풍이라는 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자가 이성적이었다면 왕비 마마를 뵈러 올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 왕야께서는 평범한 분이 아니라 무려 초왕야이십니다. 명성이 드높은 군신이시란 말입니다.
왕야께서 아무리 왕비 마마를 아껴 주시고 감싸 주셔도 한계가 있는 법입니다. 저는 비록 노비지만 그래도 왕비 마마보다 나이가 많으니 몇 말씀 드려야겠습니다. 왕비 마마, 이 정도면 그만 만족할 줄도 아셔야지요. 천하를 뒤져서 우리 왕야같이 반듯한 사람을 몇 명이나 찾을 수 있겠습니까.
소인은 왕비 마마보다 더 일찍 이곳에 들어와 줄곧 회림각에서 지냈습니다. 왕야께서는 늘 굳은 얼굴에 웃지도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왕비 마마께서 오신 뒤로 왕야의 얼굴에는 늘 웃음이 가득하시지요…….”
그녀의 말에 백천범은 문득 모든 걸 깨달았다는 듯 급히 끼어들었다.
“그러니까 월규 네 말은 왕야께서 날 좋아하신다는 거야? 여인을 좋아하는 것처럼?”
“왕야께서는 당연히 왕비 마마를 좋아하시지요. 그렇지 않으면 어찌 왕비 마마께 이렇게 많은 것들을 해 주시겠습니까. 직접 그네도 만들어 주시고 공작도 데려와 주시고, 진상품이었던 과일까지 가져다주지 않으셨습니까? 소인이 저택에 있는 동안 왕야께서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백천범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닐 거야. 왕야께서 직접 날 여동생으로 삼겠다고 하셨단 말이야. 그리고 좋은 신랑감을 골라서 성대하게 혼사를 치러 주신다고 했어. 그리고 나는 몸집도 작잖아. 왕야의 취향도 아닌걸.”
“왕야께서 그리 말씀하셨습니까?”
“그렇다니까.”
백천범은 가슴 앞으로 손을 가져가더니 몇 차례 손동작을 해 보였다.
“왕야께서 이렇게 큰 여인이 좋으시다고 했어.”
월규가 살짝 얼굴을 붉혔다.
“왕야께서 정말 왕비 마마를 여동생으로 여기셨다면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으셨겠습니까?”
백천범은 턱을 괴고 미간을 찌푸렸다.
“월규, 넌 왕야께서 날 좋아하시는 것 같단 말이지?”
“저만 그리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택에 모든 이들이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럼 왕야께서 내게 침수沈水형을 내리실까? 외도를 한 사람한테 내리는 벌 말이야.”
“…….”
사랑만 주기에도 부족한데 어찌 그 여인을 수장할 수 있단 말인가?
“당연히 그러실 일은 없지요. 다만 앞으로는 왕비 마마께서 주의하셔야 합니다. 다른 사내와는 절대 가깝게 지내지 마십시오. 가동 무사님이라고 해도 안 됩니다.”
백천범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어떡해. 나는 초왕비가 되기 싫단 말이야.”
월규가 깜짝 놀라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왕비가 되지 않으시겠다니, 그럼 무엇을 하시려고요?”
“나는 첩을 들이는 사내에게 시집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단 말이야. 한 명의 서방님을 두고 여러 여인들이랑 다투긴 싫어.”
“하지만 왕야께서는 존귀하신 분입니다. 서너 명의 처를 들이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란 말입니다. 황제 폐하를 좀 보십시오. 오죽하면 후궁이 삼천 명이나 된다고 하겠습니까? 처를 들인다 해도 왕야의 총애만 얻는다면 왕비 마마를 넘볼 자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난 싫어.”
백천범은 조금 고민하는 눈치였다.
“온종일 서로 암투를 벌일 텐데 얼마나 피곤하겠어.”
“왕야께서 지켜 주시니 감히 왕비 마마를 건드릴 자는 없습니다. 게다가 가장 높으신 왕비 마마께서 그들을 겁내시다니요!”
“난 모르겠어.”
백천범이 중얼거렸다.
“인간의 마음이 호랑이보다 무섭다잖아…….”
한참 멍하니 앉아 있던 백천범은 갑자기 중요한 일이 생각난 듯 잔뜩 긴장된 모습으로 월규에게 물었다.
“왕야께서 화가 나셔서 밥도 안 주시는 건 아니겠지?”
“…….”
월규는 그녀에게 두 손 두 발 다 들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든 늘 밥과 연관을 짓다니!
“그럴 리가요. 왕비 마마는 왕야께서 가장 아끼시는 분입니다. 왕야께서 절 굶기실 수는 있어도 왕비 마마를 굶기실 일은 절대 없습니다.”
* * *
왕비의 소식이 벽하각에도 전해졌다. 고청접은 박장대소를 터뜨리며 붓을 내려놓더니 그림 속 인물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여인이 바람피우는 꼴을 견디는 사내는 없지. 특히 왕야 같은 분은 더. 아무리 좋아하는 여인이라도 성품이 나쁘면 마음도 멀어지는 법.”
자초가 웃으며 말했다.
“마마, 이제 마마의 상대가 될 사람은 없습니다. 왕비와 측왕비 모두 발이 꽁꽁 묶였으니 이제 왕야의 곁에는 마마밖에는 없습니다.”
고청접은 초상화를 집어 들고 유심히 살펴보았다.
“처소에 갇힌 게 뭐 대수라고. 그 둘을 완벽하게 떼어 내야 할 것이다.”
“그 말씀은…….”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하질 않느냐. 이참에 왕야의 마음을 완전히 돌려야 한다.”
고청접은 음침한 미소를 짓더니 자초에게 그림을 보여 주었다.
“닮은 것 같으냐?”
“예. 살아 움직일 것만 같습니다. 마마의 실력이 날로 발전하시는 듯합니다. 왕야께서도 분명 좋아하실 것입니다.”
고청접은 가늘게 뜬 눈으로 그림 속 남자를 바라보았다. 묵용감을 그린 백 번째 그림이었다. 훤칠하고 늠름한 그의 자태는 황제만큼이나 존귀하고 위엄이 넘쳤다. 세상에 오직 하나뿐인 그의 여인이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이제 곧 그는 그녀만의 사내가 될 것이었다. 요망한 것들을 모두 처리했으니 그는 자연스레 그녀를 바라볼 것이다. 재미라고는 없는 고상한 수원상과 유치하고 가소로운 백천범보다 어여쁘고 재주 많은 그녀가 묵용감에게 훨씬 더 잘 어울렸다.
“그림을 넣어 두거라. 회림각으로 가져갈 것이다.”
자초는 건네받은 그림을 돌돌 말아 얇은 끈으로 묶은 뒤 화통에 넣었다.
고청접이 회림각에 도착했을 땐 하인들이 그의 방을 정리하고 있었다. 문 앞에 놓인 광주리에는 깨진 유리 조각들이 한가득 쌓여 있었다. 잔해를 슬쩍 훑어본 고청접은 기쁨을 참을 수 없었다. 골동품과 자기까지 처참히 깨진 모습을 보니 초왕이 얼마나 화가 났는지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백천범의 봄날도 끝이었다.
고청접의 모습을 본 학평관은 다가와 인사를 올린 뒤 조용히 말했다.
“서왕비 마마, 왕야를 찾아오신 것입니까? 지금은 왕야의 심기가 좋지 않으시니 소인이 먼저 왕야께 아뢰겠습니다.”
늘 학평관에게 예를 갖췄던 고청접은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럼 어르신께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학평관은 냉기가 뿜어져 나오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묵용감은 이상하리만큼 냉정한 모습으로 책상 앞에 앉아 공문을 읽고 있었다.
학평관이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왕야, 서왕비 마마께서 오셨습니다.”
묵용감이 미간을 찌푸렸다.
“왜 온 것이란 말이냐? 돌아가라 이르거라.”
“예.”
대답을 마친 학평관이 몸을 숙이며 물러나려 하는데, 갑작스레 묵용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다, 들라 하라.”
학평관은 의아했다. 지금 같은 때에 서왕비를 만나려 하다니, 초왕의 마음이 변하기라도 한 것인가? 함부로 추측할 수 없었던 그는 밖으로 나가 고청접을 안으로 모셨다.
방에 들어선 고청접은 너무 많은 물건이 치워진 탓에 이곳이 허전하고 썰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척 가벼운 발걸음으로 묵용감 앞에 다가와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소첩, 왕야께서 돌아오신 뒤 노여움을 참지 못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왕비 마마의 외출 금지까지 내리셨다는 말에 너무 놀라 이렇게 급히 찾아왔습니다. 혹여 왕비 마마께서 연극을 보러 가신 일로 화가 나신 거라면 그 일은 소첩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소첩을 벌하여 주시옵소서, 왕야.”
묵용감은 그녀에게 시선을 주지도 않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잘못을 했단 말이오?”
“왕비 마마께서 외출하실 때 소첩도 말리고 싶었지만 그리하지 못하였습니다. 왕비 마마께서는 이 저택의 주인이시니 소첩도 감히 방자하게 행동할 수 없어 가마를 준비해 드렸습니다.”
“외출을 막진 못했지만 본왕에게 찾아와 그 사실을 알려 주지 않았소. 벌이 아니라 상을 내려야 할 일이오.”
“상은 내리지 않으셔도 됩니다, 왕야. 다만 이번 한 번만 왕비 마마를 용서해 주십시오.”
묵용감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이번 일은 서왕비가 관여할 일이 아니오.”
묵용감의 태도에 마음을 놓은 고청접은 손에 있던 화통을 그에게 올렸다.
“소첩이 왕야를 위해 그림을 그려 보았습니다. 마음에 드시는지 한번 보시옵소서.”
묵용감은 여전히 공문만 뚫어지라 바라보고 있었다.
“거기 두시오.”
고청접은 조금 실망스러웠다. 그의 말은 이제 그만 나가보라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고청접이 더 남아 있을 핑계를 찾느라 잠시 머뭇거리는데 묵용감이 화통을 집어 그림을 꺼내 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