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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83)화 (182/1,192)

제183화

잠시 어리둥절해하던 사장풍은 뒤늦게 그녀의 말뜻을 이해하고는 서둘러 대답했다.

“걱정 마십시오. 저는 부인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더 바랄 게 없습니다. 절대 첩을 들이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백천범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너무 앞서간 나머지 방금 떠올린 젊은 농부와 함께 밭일을 하는 장면까지 상상하고 말았다.

조금 찔렸던 그녀는 얼굴이 붉어졌다.

“그렇다니 다행이에요.”

사장풍은 웃음을 금치 못했다. 이런 말을 꺼내면서 우물쭈물하는 기색도 보이질 않다니. 오히려 이곳에서 만나자며 특별히 약속까지 잡아 정말 진지하게도 묻지 않는가. 그는 한 차례 헛기침을 한 뒤, 조금 쑥스러워하며 입을 열었다.

“왕야께서도 이미 제 상황에 대해 물어보셨습니다. 혹 왕비 마마께서는 다른 요구 사항이라도 있으신지요?”

“방금 여쭤 본 그 질문이 다예요. 첩만 들이지 않으신다면 저는 다 좋아요.”

“그 부분은 걱정 마십시오. 저 사장풍, 한 번 내뱉은 말은 꼭 지키는 사람입니다. 만약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천벌을 받아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백천범이 입을 가리며 웃었다.

“그런 말씀 마시어요. 전 제독님을 믿으니까요.”

사장풍이 용기를 내어 그녀의 손을 잡더니 진심을 담아 그녀를 불렀다.

“천범 아가씨.”

그 순간, 누군가 문을 발로 걷어차는 소리와 함께 벌컥 문이 열렸다. 얼굴이 파랗게 질린 묵용감이었다.

방으로 들어온 그는 곧장 사장풍에게 주먹을 날렸고, 그 충격으로 사장풍은 바닥에 쓰러졌다. 화를 억누르지 못한 묵용감은 발을 들어 사장풍을 짓밟으려 했지만 백천범이 황급히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왕야, 왜 때리시는 거예요?”

묵용감은 극도로 화가 난 상태였지만 웃음을 지어 보였다.

“왜? 나의 왕비가 외간 남자와 밀회를 하며 바람을 피우는데, 내게 도리어 왜냐고 묻는 것이오?”

백천범이 반박했다.

“다른 남자와 만난 것은 맞지만 바람을 피운 것은 아닙니다.”

“정녕 내가 화병으로 죽길 바라는 것이오?”

묵용감이 어찌나 세게 주먹을 날렸는지 사장풍은 오장육부가 다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목에서 비릿한 게 끊임없이 솟구쳤다. 백천범 앞에서 체면을 잃고 싶지 않았던 그는 있는 힘을 다해 목구멍 뒤로 피를 삼켜 넘겼지만, 끝내 선홍빛 핏줄기가 그의 입가를 타고 흘러내렸다.

힘겹게 몸을 일으켜 세웠지만 묵용감이 재빠르게 날아가 걷어차는 바람에 그는 또다시 바닥에 고꾸라지고 말았다. 방금 전보다 더 센 충격이 가해지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그는 왈칵 피를 쏟아 냈다. 그의 도포가 만개한 홍매화처럼 핏자국으로 붉게 물들었다. 옆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몸서리가 쳐질 정도였다.

백천범은 비명을 지르며 황급히 그에게 달려가려 했지만 묵용감이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그는 분노가 가득 담긴 눈빛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저놈에게 가거든 내 당장 저놈의 목숨을 끊어 놓을 것이오!”

그의 모습은 마치 저승에서 온 판관처럼 거역할 수 없는 위용이 넘쳐흘렀다. 겁에 질린 백천범은 사시나무 떨듯 벌벌 떨며 사장풍을 바라보았다. 묵용감이 커다란 손으로 백천범의 턱을 움켜쥐며 말했다.

“한 번 볼 때마다 저놈의 팔을 하나씩 부러뜨려 놓을 것이오.”

묵용감은 백천범을 끌고 밖으로 향했다. 그러다 문 앞에 잠시 멈춰서더니 고개를 돌리고 사장풍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또다시 내 여인을 마음에 품었다간 본왕이 네 구족을 멸할 것이다!”

이미 공연이 시작된 아래층에서부터 떠들썩한 소리가 들렸지만, 묵용감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사장풍의 귀에 한 글자 한 글자 똑똑히 새겨졌다.

그의 여인이라니? 여동생으로 삼아 좋은 신랑감을 골라 주려는 게 아니었단 말인가?

가슴을 쥐어 잡고 가쁜 숨을 몰아쉬던 그는 비틀거리며 묵용감에게 끌려가는 백천범의 뒷모습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잔뜩 겁을 집어먹은 그녀의 표정은 그의 뇌리에 각인이라도 된 듯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았다.

* * *

저택에 돌아온 묵용감은 곧장 백천범을 끌고 후원으로 향했다. 남월각에 도착한 그는 그녀를 정원에 밀어 넣으며 소리쳤다.

“모두 잘 듣거라. 오늘부터 왕비의 외출을 금할 것이니 왕비는 처소 밖으로 단 한 발짝도 나갈 수 없다. 감히 왕비를 내보내는 자가 있거든 본왕이 그자의 가죽을 벗겨 버릴 것이다!”

그의 손에 밀쳐진 백천범은 잠시 비틀거리다 겨우 몸을 일으켰다. 입술을 깨문 그녀의 두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넘쳐흐르려는 걸 억지로 참아 보았지만, 결국 두 볼을 따라 눈물이 흘러내렸다. 여전히 화가 치솟은 묵용감은 투각된 벽 사이로 그녀를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백천범도 두려울 게 없었다. 그녀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맞받아쳤다. 매서운 눈초리로 그를 쏘아붙이던 그녀는 결국 눈물이 흐르는 걸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경멸에 찬 눈으로 그를 바라본 뒤,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에 들어선 그녀는 결국 침대에 엎드려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묵용감이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다른 사내와 밀회를 가진 게 잘못이라 해도 그녀를 처소에 가두고 사장풍을 그 꼴로 만들어 놓다니. 혼사를 앞둔 부부가 자주 만나는 것은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긴 했지만 보통은 보고도 못 본 척 눈감아 주곤 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화를 내다니, 이게 무슨 오빠란 말인가! 정말인지 흉악한 악질이 따로 없었다. 어쩐지, 초왕의 초 자만 들어도 다들 벌벌 떨더라니! 그가 막무가내로 행동할 땐 정말 끔찍할 정도였다.

묵용감은 당장이라도 그녀를 따라 들어가 혼쭐을 내야 화가 풀릴 것 같았다. 하지만 결국 꾹꾹 눌러 참아야만 했다. 그는 회림각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난폭한 기운에 노비들은 반사적으로 몸을 피했다. 중문을 지키던 차 씨가 벌벌 떨며 그에게 인사를 올렸지만, 그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굳은 표정으로 지나쳤다.

황급히 밖으로 나온 학평관은 잔뜩 성이 난 그의 얼굴을 보자 심장이 벌렁거렸다. 그가 조심스레 묵용감에게 말했다.

“왕야, 진 장군께서 오셨습니다. 대청에서 왕야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묵용감은 들은 척도 않고 큰 보폭으로 복도를 걸어갔다. 두꺼운 소가죽을 덧댄 장화 밑창이 나무 바닥에 닿아 연신 쿵쿵 소리를 내자 깜짝 놀란 연못 물고기들이 허둥지둥 멀리 헤엄쳐 갔다.

학평관은 그를 따라 방에 들어가려 했지만, 그가 빠르게 문을 닫아 버리는 탓에 하마터면 코를 찧을 뻔했다.

이내 방 안에서 무엇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쨍그랑거리는 맑은 소리부터 묵직한 소리까지……. 문에 걸려 있던 주렴도 뜯어 버렸는지 구슬이 바닥에 구르는 난잡한 소리가 한참이나 이어졌다. 그다음에는 가구와 찻잔, 나무 조각, 도자기 등등… 방에 남아 있는 게 하나도 없을 듯했다.

기홍과 녹하, 가동과 영구는 문밖에 모여 떨리는 마음으로 방 안에서 나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녹하가 조용히 학평관에게 물었다.

“어르신, 왕야께서 어찌 저러시는 것입니까?”

학평관이 고개를 저으며 먼 곳을 가리켰다. 저쪽에 가서 이야기하자는 것이었다. 영구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함께 연못가로 향했다.

가동이 말했다.

“지금껏 왕야를 보필하면서 이렇게 화나신 모습은 처음입니다.”

“나도 왕야와 함께 궁에서 나온 뒤로 이런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네. 아이고…….”

학평관이 탄식을 내뱉었다.

“평소에는 감정을 잘 억제하시는 분께서 왕비 마마와 관련된 일에는 이리 다른 사람처럼 돌변하시다니.”

기홍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두 분께 또 무슨 일이 생긴 것입니까?”

“난들 알겠나. 외출하신 왕비 마마를 왕야께서 데리고 오시더니 남월각에 가두시고는 외출 금지 명령을 내리셨다네.”

“예!?”

기홍과 녹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감금이라니, 왕비가 그렇게 큰 잘못을 저질렀단 말인가?

가동도 조금 초조한 기색이었다.

“그럼 어찌한단 말입니까? 왕야께서 화가 나셨을 때마다 왕비 마마를 모셔 오면 그래도 해결할 수 있었는데 이젠 왕비 마마까지 처소를 나오지 못하신다니! 어찌 왕야의 화를 가라앉힌단 말입니까?”

학평관이 또다시 탄식을 내뱉었다.

“누구도 나서지 못하겠지. 다들 며칠간은 조심해야 할 걸세. 이번에는 왕야께서 쉽게 화를 가라앉히지 못하실 것 같네. 다들 정신 똑바로 차려야 화를 면할 걸세.”

묵용감은 난장판이 된 방에 앉아 너저분해진 주변을 바라보며 피로감과 깊은 무력감을 느꼈다.

백천범과 이런 방식으로 지내는 게 잘못이라는 것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하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녀가 그를 오빠라고 여겼기 때문에 친근하게 대했고, 그는 이때껏 그녀가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저 그녀와 가까워지고 싶었고, 아껴 주고, 사랑해 주고, 돌봐 주고 싶었다. 그녀가 그를 경계하지 않는 게 좋았고 옆에서 재잘대는 게 좋았다. 하지만 그녀의 착각이 점점 깊어져 사장풍과 밀회를 가지게 될 것이라고는, 그래서 사장풍이 그녀의 손을 잡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문을 부수고 안으로 들어섰을 때, 그는 사장풍의 숨통을 당장에라도 끊어 버리고 싶었다. 만약 그가 조금만 더 늦었다면 사장풍이 그녀에게 입을 맞추거나 더 비열한 수작을 부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생각만으로도 아찔해진 그의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동월국의 민간 풍습은 개방적이었기 때문에 미혼 남녀의 만남이 그리 큰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백천범은 자신이 혼인을 올린 걸 새까맣게 잊고 본인이 아직 출가하지 않은 아가씨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가 그녀를 사장풍에게 시집보낼 것 같은 묘한 분위기까지 풍겼으니 오늘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이해가 되지 않았던 점은 그녀와 사장풍이 언제 밀회를 가질 만한 관계로 발전했냐는 것이었다.

그저 몇 번 마주친 게 전부인 두 사람이 밀회를 가지다니… 어떻게 연락을 취했단 말인가? 설마 그를 계속 속이면서 서로 내통한 지 이미 오래란 말인가?

그 생각에 미치자 그는 서진書鎭을 집어 들고 있는 힘껏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짙은 황색빛 서진은 그대로 산산이 조각났다. 깨진 조각들이 등불에 비쳐 희미한 빛을 내뿜었다.

백천범이 바람을 피우려 한 것이 아니라 한들 그는 도통 용납이 되지 않았다. 바늘이 심장을 찌르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어쨌든 그의 여인은 외간 남자와 밀회를 가졌다. 그에게는 이보다 더 심한 배신이 없었다.

한참 동안 앉아 있다 보니 화는 조금씩 가라앉았지만 뒤이어 처량함과 무기력이 밀려왔다. 모든 일의 원흉은 그 자신이었다. 제 꾀에 제가 넘어간 것이다. 그녀와 함께 지내다 보면 언젠가 그의 마음을 알아줄 것이라 믿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상황을 바로잡아 모든 걸 정상으로 돌려놓아야만 했다. 백천범은 그의 왕비였고 그의 아내였다. 이번 생에 그녀는 그의 것이었고 그의 것이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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