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182)화 (181/1,192)

제182화

그가 백천범을 내려놓고 청년을 쏘아보았다.

“뭐라 했느냐?”

“아가씨를 놓아주라고 하였소.”

“이 애가 네게 무엇이길래? 네가 관여할 자격이나 있더냐?”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람을 보면 누구든 서슴없이 칼을 뽑아 도와야 하는 것 아니겠소.”

그의 말에 감동한 백천범은 청년에게 인사를 올렸다.

“그렇게 정의로운 말씀을 하시다니, 고맙습니다! 오빠.”

청년의 얼굴이 살짝 붉어지더니 그 또한 허리를 숙여 예를 갖췄다.

“천만에요. 마땅히 그리해야지요.”

묵용감은 눈앞에서 오가는 두 사람의 행동에 피가 거꾸로 솟을 지경이었지만, 최대한 평온한 표정을 유지하며 백천범에게 말했다.

“여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해 주시오. 내가 당신의 누구요?”

그가 평정심을 되찾자 백천범은 확신이 없어졌다. 그를 오래 알고 나니 어느 정도 그를 이해하게 된 것이었다. 그가 아무런 표정도 없을 땐 정말 크게 성이 난 것이었다.

더 이상 소란을 피울 수 없었던 그녀는 얌전히 대꾸했다.

“이분은 제 오빠입니다…….”

묵용감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뭐라 하였소?”

그의 말에 그녀가 곧장 고쳐 말했다.

“이분은 제 서방님입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같이 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대갓집 마님이 이런 마차를 타다니. 게다가 이곳을 자주 오가는 사람처럼 꾸며 대며 진지하게 값을 흥정하는 마님이라니?

묵용감은 백천범과 함께 말에 올라탄 뒤 채찍을 휘둘렀다. 마부는 갑자기 깨달은 듯 소리쳤다.

“부인, 마차 값은 돌려받으셔야지요!”

백천범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울려 퍼졌다.

“아니에요. 시간을 지체하였으니 보상이라고 생각하세요!”

* * *

초왕과 초왕비 사이에 또다시 싸늘한 기류가 흘렀다. 하지만 지난번과는 다르게 이번에는 백천범이 묵용감을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날 중문에 다다라 말에서 내린 백천범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후원으로 향했다. 묵용감이 그녀를 세 번이나 불렀지만, 그녀는 들리지 않는다는 듯 더 빠르게 걸어갔다. 화가 난 묵용감은 회림각으로 향했고 며칠 동안 두 사람은 서로 왕래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사이가 좋지 않을 때마다 하인들은 형세를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줄을 잘못 서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이 소식을 들은 고청접은 자연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백천범은 확실히 어린아이인 데다 제멋대로였으니 초왕의 심기를 건들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그녀는 갑작스레 찾아온 절호의 기회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이튿날, 그녀는 자초를 데리고 남월각으로 향했다. 백천범은 정원에서 토끼와 장난을 치고 있었다. 그녀는 아리따운 자태로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소첩, 왕비 마마를 뵈옵니다.”

백천범은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저었다.

“청접 언니, 그런 헛된 호칭은 부를 필요 없다고 진즉에 얘기했잖아요. 허례는 필요 없어요. 또 이렇게…….”

고청접이 웃으며 말했다.

“헛된 호칭도 호칭이니 규율에 따라야지요. 소첩이 규율을 모른다고 왕야께서 생각하시면 안 되니까요.”

묵용감을 언급하자 백천범이 입을 삐죽거렸다. 아직 분이 덜 풀린 듯한 모습이었다.

고청접이 그녀를 떠보듯이 물었다.

“왕야와 말다툼을 하셨다면서요?”

“그렇게 억지를 부리는 사람이랑은 말다툼도 하기 싫어요. 어차피 왕야는 집주인이고, 저는 얹혀사는 사람인데 말다툼을 해서 무엇 하겠어요.”

고청접이 웃으며 말했다.

“왕비 마마께서는 정말 아이 같으십니다. 왕야께서는 저희에게 하늘 같은 존재이십니다. 왕야의 말씀이 도리인 것이지요. 저희가 겨룰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지만 사람이라면 이치를 따져야 하잖아요. 저희 유모가 그러는데 아무리 황제라도 신하들의 의견을 물어야지, 제멋대로 행동할 수는 없대요.”

“왕야께서는 황제 폐하와는 다르시지요. 황제 폐하께서는 문인이시지만, 왕야는 무술에 능하시니 성격이 조금 거치실 수도 있습니다. 저희가 잘 감싸 드려야 하지요.”

백천범이 코웃음을 쳤다.

“전 왕야의 그런 성미가 적응이 안 되는걸요.”

고청접이 말했다.

“알겠습니다. 이 얘기는 그만하지요. 왕비 마마, 날마다 저택 안에만 계시는데 갑갑하지 않으십니까?”

“조금 갑갑해요. 밖에 나가려고요?”

“저는 집안일을 맡다 보니 날마다 하인들이 찾아와 짬이 나질 않습니다. 어제 제 여동생이 찾아와 말해 줬는데 동락원同樂園의 새로운 연극이 아주 볼 만하다고 합니다. 왕비 마마께서도 너무 갑갑하시면 언제 한번 보러 가시지요.”

떠들썩한 공연을 좋아했던 백천범이 물었다.

“어떤 연극인데요?”

고청접은 잠시 생각한 뒤에 입을 열었다.

“동상기東廂記와 마고축수蔴姑祝壽라는 연극이라고 합니다. 배꼽을 잡을 만큼 아주 재미있다고 합니다.”

백천범이 물었다.

“언니 동생도 연극을 좋아해요?”

“제 여동생은 떠들썩한 곳만 있으면 늘 달려간답니다. 동락원이 집 앞이라 날마다 연극 구경을 하러 갈 정도이지요.

“저도 재미있는 구경을 좋아해요.”

백천범이 눈동자를 굴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좋아요. 내일 가서 보고 와야겠어요.”

“마고축수는 어제와 오늘 이틀만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오후에도 공연이 있으니 오후에 다녀오시는 게 어떠신지요. 제가 가마를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백천범은 딱히 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월규를 불러 외출 준비를 했다.

준비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이미 가마가 문 앞에 준비되어 있었다. 월규는 그녀가 가마에 탈 수 있게 부축했고, 그녀를 태운 가마는 곧장 동락원으로 향했다.

동락원은 멀지 않은 쇄금灑金대로에 있었는데, 금성대로와 작은 골목을 사이에 둔 거리였다. 가만히 앉아 있지 못했던 백천범은 발을 걷어 올리고 계속 밖을 구경했다.

저 멀리 초왕의 저택과 비슷한 커다란 집이 눈에 들어왔다. 대문은 굳게 잠겨 있었고, 측문만 열려 있었다. 시녀 두 명이 안에서 나오더니 이야기를 나누며 웃고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문 위에 걸린 현판을 바라보았다. 남색 바탕에 금색 글씨로 「고씨 저택」이라고 적혀 있었다.

다름 아닌 고청접의 친정이었다. 그녀의 집 앞이 극장이라고 했으니 분명 거의 다 온 것이었다. 마침 가마가 땅에 내려졌고 월규가 발을 걷어 그녀를 부축했다.

곧장 어린 극장 점원이 다가와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아이고, 오셨습니까? 어서 위로 드시지요.”

백천범은 그를 따라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는 그녀를 반듯한 별실로 데려갔다. 방 앞에 난 커다란 창을 열자 정면으로 무대가 보였다. 창문 옆으로는 천막이 걸려 있었고, 그 앞에는 작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의자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이런 별실은 대개 대갓집 부인과 아가씨들을 위한 공간이었다. 고귀한 신분이 일반 백성들과 함께 살을 부대끼며 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연극을 보고 싶지 않을 땐 천막을 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고, 피곤하면 부드러운 장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할 수도 있었다. 간식과 차를 준비해 주는 사람도 있어서 아주 편안했다.

아직 공연 시작 전이었지만, 아래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평범한 손님들이었다. 멀리서 서로 인사를 나누는 모습이 제법 소란스러웠다.

백천범은 땅콩 한 움큼을 쥐고 난간 벽에 기댄 채 한 알 한 알 입으로 집어넣었다.

월규가 차를 건네며 말했다.

“왕비 마마, 간이 된 땅콩을 그리 많이 먹으시면 입이 짭니다. 차 좀 드시어요.”

백천범은 땅콩을 내려놓고 찻잔을 받아 들었다. 차가 뜨거웠던 나머지 그녀는 바람을 호호 불며 홀짝거렸다. 그때 뒷문이 끼익 하고 열리더니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고개를 돌려 보니 의외의 인물이 서 있었다.

“구문제독님?”

사장풍은 조금 꾸민 듯한 모습이었다. 정갈한 옷을 갖춰 입은 건 물론이고,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 넘기고 관을 쓰고 있었다. 그가 조금 부끄러운 듯 웃으며 그녀에게 예를 갖췄다.

“소인, 왕비 마마를 뵈옵니다.”

“우리 사이에 이리 격식을 차리다니요.”

나중에 그에게 시집을 가게 될 거라 생각하니 조금 부끄러웠던 백천범은 손에 쥔 손수건만 계속 만지작거렸다.

옆에 서 있던 월규는 멍하니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머뭇거리는 두 사람의 모습만 놓고 보면 꼭 결혼을 약속한 사이 같았다. 하지만 백천범은 이미 혼인을 한 초왕비였다. 어찌 외간 남자와 사적으로 만날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이 사장풍이라는 사람도 대체 이게 무슨 짓이란 말인가!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올 생각을 하다니?

백천범이 자유분방한 성격이라는 건 월규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외간 남자와 밀회를 가질 수는 없었다. 만약 초왕이 알게 된다면 하늘이 두 쪽 날만큼 큰일이 날 것이었다!

그녀는 한 차례 헛기침을 하여 백천범에게 그 사실을 일깨워 주려고 했다. 하지만 백천범은 그녀에게 턱을 들어 올렸다 내리며 말했다.

“사 제독님이랑 할 말이 있으니 잠깐만 나가 있어.”

월규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자신을 내보내고 단둘이서 대체 무엇을 하려고?

“왕비 마마, 소인은 나갈 수 없습니다. 왕비 마마의 시중을 들어야 합니다.”

“걱정 마. 사 제독님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잠깐이면 돼.”

월규는 또 한 차례 큰 충격을 받았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니, 그럼 대체 그와 무슨 사이란 말인가?

“어서, 몇 마디만 하면 돼.”

월규가 미동도 하지 않자 백천범은 그녀를 밀어내며 조용히 말했다.

“월규 네가 여기 있으면 사 제독님이 부끄러울 거야.”

월규의 마음은 그대로 산산이 조각나 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나가지 않으려고 했지만 백천범의 힘이 너무 셌던 탓에 문밖으로 밀려났다. 백천범은 아예 문까지 걸어 잠근 뒤였다. 감히 문을 두드릴 수 없었던 그녀는 그저 벽에 귀를 가져다 대고 안에서 나는 소리를 몰래 엿들었다.

사장풍도 백천범의 행동에 어리둥절해했다. 어린 계집이 연약하기만 한 줄 알았더니 제법 용맹했다.

“왕비 마마.”

“왕비라고 부르지 마시어요. 제 이름을 부르시면 돼요.”

백천범은 그를 바라보며 입술을 오므리더니 옅게 미소를 띤 얼굴로 물었다.

“월규를 내보낸 건 물어볼 말이 있어서예요. 혹시 나중에 첩을 들이실 거예요?”

백천범은 예전부터 이 말을 꼭 묻고 싶었다. 백 승상의 저택 후원에서 추악하고 더러운 꼴을 수도 없이 봐 왔기 때문이었다. 처첩들이 한 명의 사내만 바라보는 대갓집에 시집을 가느니 차라리 농부에게 가는 게 더 나았다.

교외에서 돌아오던 날, 마주쳤던 젊은 농부는 조금 까무잡잡하긴 했어도 체격이 건장한 게 분명 일을 할 때 기력이 넘쳐 보였다. 어린 부부가 함께 뜻을 모으고 힘을 합친다면 설마 밥을 굶기야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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