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1화
멍하게 앉아 있던 백천범은 풍덩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설마 그가 내버릴 거라고 상상도 하지 못한 탓이었다. 급히 달려가 보니 산자락 아래로 물줄기가 흐르고 있었다. 정말 묵용감이 조각상을 물속에 던져 버린 것이었다.
화가 치솟은 그녀는 자그마한 체구를 쉴 새 없이 들썩거리며 소리쳤다.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어요. 저건 제 거라고요!”
묵용감은 차가운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눈에 거슬리던 물건을 유모에게까지 가져와 보여 주며 사랑의 증표라는 둥 떠들어 대니 떨어뜨려 놓는 수밖에!
잘못을 저질러 놓고 오히려 얼굴을 굳히고 있는 그의 모습에 백천범은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그녀는 허리에 손을 얹은 채 언성을 높였다.
“왕야, 미워요! 이제 왕야랑 가깝게 안 지낼 거예요!”
묵용감은 여전히 얼굴을 굳힌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밉다니, 그를 좋아한 적이 있기나 했단 말인가?
“유모한테 왕야가 제게 잘해 준다고 말했는데, 어떻게 그 앞에서 절 업신여기실 수가 있으세요?”
백천범이 식식거리며 소리치더니 힘껏 그를 밀치고 산을 내려갔다.
얼굴을 굳히고 있던 묵용감의 기분도 좋지만은 않았다. 충동적으로 던지긴 했지만 그녀가 이렇게 화를 낼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그녀가 저렇게 화를 낸다는 건 그 조각상을 정말 소중하게 여긴다는 뜻이었다. 그것도 사장풍이 준 것이기 때문에.
생각이 여기에 미친 묵용감은 슬픔이 밀려왔다. 자신의 부인이 다른 사내를 마음에 품고 있다니.
그는 답답한 마음을 안고 산을 내려갔다. 산 중턱쯤 내려왔을 때, 이미 산기슭을 내려간 백천범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말 옆을 그대로 지나쳐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그 모습에 묵용감이 어금니를 악물었다. 하, 자신과 끝까지 맞서려 하다니!
그는 빠르게 달려 말 위에 착지했다. 채찍을 휘두르자 말이 전속력으로 질주하기 시작했고, 빠르게 백천범 뒤를 쫓았다. 그는 멈추지 않고 매우 빠른 속도로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백천범은 묵용감이 그녀를 불러 세우면 차가운 시선으로 쏘아본 뒤 모른 척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웬걸, 그녀를 혼자 내버려두고 떠날 줄이야. 그녀는 잠시 허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곳은 외곽이었다. 한 번 와 본 적 있던 그녀는 성이 얼마나 멀리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산길에서 도로까지 가려면 반 시진이나 걸어야 했다. 운이 좋으면 마을로 돌아가는 수송 마차를 탈 수 있었지만, 운이 나쁘면 두 다리에 모든 걸 맡겨야 했다.
걸어서 돌아가는 건 기껏해야 발바닥에 물집이 잡힐 뿐이니 그리 겁나지 않았다. 정말 두려운 것은 성에 도착하기 전에 성문이 닫히는 거였다. 그땐 정말 아무런 방법도 없었다.
유모에게 아주 잘 지낸다고 털어놨더니만, 잘 지내긴 무슨!
그녀는 허리에 손을 얹고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치켜드니 울분이 치밀었다. 어떻게 잘못을 저질러 놓고도 저렇게 당당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왕야라는 사람이! 그 변덕스러움에 정말 머리털이 치솟을 지경이었다.
말발굽 소리가 점점 멀어지자 그녀의 마음속에 처량함이 솟구쳤다. 그에게 사랑을 받는 게 익숙해진 나머지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조금 서러워졌다.
그녀는 긴 한숨을 내쉰 뒤 발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가야 했다. 도로까지 나간 뒤에 마차를 만난다면 그래도 별 문제 없을 것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축 늘어뜨린 채 잔뜩 풀었다. 초왕이 버린 조각상 때문에 괴로운 것인지, 그가 그녀를 버리고 가버린 것 때문에 괴로운 것인지는 그녀도 잘 알지 못했다.
아마 편안한 생활을 한 게 너무 오래되어 잠시 걷는 것조차 피곤하게 느껴졌다. 천만다행으로 도로에 들어서자마자 멀리서 수송용 마차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는 곧장 정신을 차리고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빠르게 뛰어갔다.
백천범이 길 한가운데 서서 손을 세차게 흔들자 말이 울음소리를 내며 그녀 앞에 멈춰 섰다. 마차 주인인 마부는 중년 정도로 보이는 까무잡잡한 남성이었다. 그가 목청을 높여 소리쳤다.
“마차를 타시렵니까?”
“성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예.”
“성까지 얼마인데요?”
“큰 걸로 다섯 닢입니다.”
백천범이 삐죽거리며 말했다.
“제가 이 길을 얼마나 자주 다니는데요. 지난번에는 세 닢이더니 얼마나 지났다고 그새 가격이 오른 거예요?”
사실 몇 년 전 이야기였지만 일부러 얼마 전인 것처럼 얘기했다. 처음 온 뜨내기가 아니라 자주 이곳을 드나드는 사람인 척 행동해야 바가지를 면할 수 있었다.
마부가 앓는 소리를 내며 그녀를 훑었다.
“아이고, 아가씨. 세 닢은 몇 년 전 가격입니다. 지금은 다섯 닢은 내셔야 합니다. 못 믿으시겠으면 다른 이에게 물어보십시오. 어떤 마차는 여섯 닢도 받습니다. 저는 딱 정해진 가격만 받습니다.”
“좋아요.”
백천범은 주머니에서 큰 동전 다섯 닢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
“금성대로에서 내려 주세요.”
“알겠습니다. 어서 타십시오.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백천범은 마차 뒤쪽으로 향했다. 안에는 세 명이 타고 있었다. 두 사람은 부부인 듯 함께 붙어 앉아 속닥거리고 있었고, 한쪽에 있던 다른 사람은 농부인 듯한 행색의 젊은이였다.
백천범은 마차 문과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았다.
마음씨 따뜻했던 부인이 옆쪽으로 자리를 내어 주며 말했다.
“아가씨, 마차가 흔들리면 밖으로 떨어져 나갈 수도 있으니 이쪽으로 들어와 앉아요.”
백천범은 감사 인사를 한 뒤 안쪽으로 들어가 부인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아주머니, 성에 가세요?”
“네. 장 좀 보려고요.”
그녀가 백천범을 훑으며 물었다.
“차림새를 보니 아가씨는 성 안에 사는가 봐요?”
“네. 금성대로에 살아요.”
“아이고, 거긴 엄청 시끌벅적한 곳이잖아요. 없는 게 없긴 하지만 물가가 비싸서 우리 같은 농부들은 보통 서대문西大門에 있는 시장으로 가요.”
“서대문에 있는 시장은 안 가 봤어요. 좋아요?”
“금성대로만큼 북적대진 않지만 저렴한 편이에요. 발품을 팔면 좋은 물건도 살 수 있고요. 넉넉지 못한 백성들은 그곳으로 자주 가지요.”
백천범이 헤헤 웃으며 말했다.
“저도 나중에 가 봐야겠어요.”
그때 다급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반대쪽에서 말이 질주해 오자 마부가 급하게 한쪽으로 비켜서느라 마차가 심하게 요동쳤다. 백천범은 마차 테두리를 힘껏 잡은 덕에 다행히 나가떨어지지 않았다. 반대편에서 뛰어오던 말은 화살이 날아가듯 휙 소리를 내며 뒤로 멀어졌다.
팔을 세게 부딪힌 부인은 화가 나서 소리쳤다.
“저런 망할 놈 같으니라고!”
마부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이고, 부딪히셨지요. 존귀한 복장을 보니 평범한 사람은 아닌 듯하였습니다. 우리 모두 외지에 나왔으니 괜스레 문제를 일으키면 좋지 않을 것입니다. 노여움 푸십시오.”
부인이 여전히 화를 내며 말했다.
“길이 자기 것도 아닌데 저건 행패가 아닙니까?”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말이 갑작스레 방향을 돌려 마차 쪽으로 달려왔다. 소심했던 부인의 남편이 말했다.
“당신이 욕하는 걸 듣고 돌아오는 건 아니겠지?”
부인이 콧방귀를 뀌었다.
“쥐새끼가 아닌 이상 이 말을 어떻게 듣겠어요.”
백천범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팔짱을 끼고 마차에 기대앉은 채 먼 곳을 바라보던 그녀는 곁눈질로 뒤따라오는 말을 힐끔 바라보고는 남몰래 의기양양해했다. 그녀는 귀하게만 자라 온 아가씨가 아니었기에 그가 버렸다 한들 스스로의 힘으로 충분히 돌아갈 수 있었다. 지금 와서 찾다니, 흥! 이미 늦었다.
그때 묵용감의 심장은 밑바닥까지 철렁 내려앉아 있었다. 그는 그저 백천범에게 한차례 훈계를 해 줄 생각이었다. 다시 돌아가면 분명 눈물 콧물을 쏟으며 울고 있는 그녀를 만날 줄 알았는데, 그녀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는 정신이 혼미해질 만큼 충격에 휩싸였지만 다행히 반응 속도는 느리지 않은 편이었다. 일순, 옆으로 수송 마차가 지나간 사실이 떠오르자 그는 서둘러 말을 돌려 마차를 쫓았다. 역시 어렴풋하긴 했지만 익숙한 몸집이 마차에 타고 있었다.
그제야 마음을 놓은 그는 마차를 추격한 뒤 마차를 세우라고 소리쳤다.
커다란 말을 타고 값비싼 옷을 차려입은 그에게서 고귀한 기개가 흘러넘쳤다. 한눈에 봐도 보통 사람은 아니었기에 마부는 급히 말에서 내려 그에게 예를 갖췄다.
“나리, 무슨 용무라도 있으십니까?”
묵용감은 말에 탄 채 백천범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내리시오.”
백천범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옆에 앉은 부인은 그가 자신을 부른 것이라 착각하고 깜짝 놀라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세상에, 이 나리가 정말 자신의 말을 들은 것이란 말인가?
잠시 그의 얼굴을 바라본 부인은 겁에 질린 나머지 곧장 다시 고개를 떨궜다. 냉기가 느껴지는 싸늘한 표정만으로도 사람을 옥죄는 힘이 느껴졌다.
“내리라니까!”
묵용감의 말투가 더욱 강해졌다.
이내 꾸물대며 마차에서 내린 부인은 고개를 숙인 채 감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부인의 남편도 마차에서 내려 묵용감에게 예를 갖췄다.
“나리, 도량이 넓으신 나리께서 부디 이 사람을 너그럽게 용서해 주십시오. 저희 같은 농부들은 성격이 우악스러워 규율을 잘 알지 못합니다. 이 사람이…….”
묵용감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그들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그는 채찍을 흔들며 백천범에게 말했다.
“마지막으로 말하겠소. 내리시오.”
백천범은 계속 시치미를 뗐다.
“제가 왜 내려야 하는데요? 왜 그쪽 말을 들어야 하죠? 누구신데요?”
하, 아직도 싸울 힘이 있다니. 묵용감은 쏜살같이 말에서 내렸다.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한기에 부부는 곧장 그에게 길을 내어 주었다. 묵용감이 마차에 올라타더니 백천범을 안아 올렸다.
물론 백천범은 온 힘을 다해 발버둥 쳤다.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 대낮에 여인을 납치하려 하다니요!”
묵용감은 화가 나다 못해 웃음이 날 지경이었다. 평소엔 단순한 계집아이가 이럴 땐 또 영악한 짓을 잘도 했다.
묵용감의 기세에 겁을 집어먹은 마부와 부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때, 돌연 젊은 청년 농부가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더니 묵용감에게 소리쳤다.
“아가씨를 놓아주시오!”
묵용감은 어이가 없었다. 이건 또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정말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잠깐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둘이 이런 사이가 되었단 말인가? 이 자그마한 계집에게 뭐 그리 마음이 쓰인다고 사장풍부터 시작해 이제는 농부까지 꼬이다니! 정말 화가 나 죽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