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0화
“그렇게 부르는 게 더 가까워서 그런 것이지요? 어쩐지, 그래서 언니들이 종종 나리라고 부른 것이었군요.”
묵용감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나리보단 서방님이라 부르는 게 더 좋았다. 두 사람은 엄연히 부부였지만, 지금은 이렇게 알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물론 상황을 이렇게 만든 장본인은 그 자신이었다. 쓰디쓴 고통을 맛보는 지금, 그는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꼴이 되어 버렸다.
햇빛 아래에서 간식을 먹는 동안 적당한 바람이 불어 옅은 꽃향기와 풀 냄새가 풍겼다. 백천범은 몸에 힘을 빼고 두 팔로 땅을 지탱한 채 고개를 뒤로 넘겼다. 그녀의 몸이 아름다운 곡선을 만들어 내자 묵용감이 홀린 듯 그녀에게 사로잡혔다. 시선을 뗀 그의 얼굴에 한 줄기 붉은빛이 감돌았다.
백천범은 배불리 먹고 따뜻한 가을볕을 쬐자 너무 편하고 좋았다. 그녀는 아예 한 손을 베고 자리에 누웠다. 봄나들이를 가면 야외에서 음식을 먹을 수 있다고 듣긴 했는데, 가을에도 가능할 줄은.
얼굴에 햇빛이 비추자 그녀는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살짝 편 손가락 틈새로 햇빛이 들어와 그녀의 얼굴에 한 줄기 빛과 그림자를 남겼다. 그녀는 손 모양을 끊임없이 바꾸며 즐거워했다.
묵용감은 조용히 누워 팔을 괴고 사랑이 가득 담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교양도 없고, 자수도 못하고 철도 없는 여인이 그의 마음을 이렇게 사로잡다니. 그것도 혼이 쏙 빠질 만큼 아주 지독하게 사로잡힌 제 모습이 참으로 신기했다.
잠시 뒤, 그녀는 조금 피곤해졌는지 눈을 감고 몸을 살짝 옆으로 비틀었다. 묵용감은 머리 뒤로 손을 베고 누웠다. 그들의 눈에 녹음이 우거진 나뭇잎 사이로 파란 가을 하늘이 보였다. 하늘 위를 떠다니는 구름은 또 어찌나 보드라워 보이는지,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포근해졌다.
그는 이런 공간에서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누워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귓가에는 그녀의 가벼운 호흡 소리가 들려왔고, 공기 중에는 옅은 꽃향기가 전해졌다. 묵용감은 그간 마음이 이렇게 충실했던 적이 없었다. 조용히 그녀 곁에 다가간 그는 자신의 팔을 그녀의 머리에 받쳐 준 뒤, 그 또한 눈을 감았다.
얼마 뒤, 나뭇가지에 앉아 있던 새 한 마리가 울음소리를 내며 하늘로 날아갔다. 그 소리에 잠에서 깬 백천범은 자신이 묵용감의 팔을 베고 누워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호흡이 얕고 일정한 것으로 보아 그는 단잠을 자고 있는 듯했다.
그녀는 조금 난처했다. 묵용감과의 관계가 날로 가까워지긴 했지만 이렇게 함께 잠을 자는 것은 좋지 않았다. 어쨌든 남녀 사이에 지켜야 할 도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혹시라도 그가 깰까 봐 조심조심 옆으로 몸을 움직였다. 신경을 집중한 끝에 그의 품에서 벗어난 그녀는 이마를 문지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묵용감은 눈만 감고 있었다. 그녀 덕에 만족스러웠던 그의 기분이 순식간에 공허해졌다. 그녀는 그를 거부하고 있었다. 그와 가깝게 지내긴 했지만 스스로 정해 놓은 선을 넘으려 하진 않았다. 그녀는 그녀만의 규칙이 있었다.
그에게서 멀찍이 떨어진 백천범은 가볍게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켜고 숲길을 따라 걸어갔다. 그녀가 멀어지자 묵용감은 몸을 일으켜 앉아 얼굴을 한 번 문지르고는 바닥에 놓인 물건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가 물건을 다 정리했을 때쯤 백천범이 돌아왔다.
“왕야, 일어나셨네요.”
그는 짤막하게 대답하고는 물건을 말에 실었다.
“그만 가오.”
“어딜요?”
그는 아무 말 않고 턱을 한 번 들어 올린 뒤 산길을 걸어갔다. 백천범은 기쁨에 가득 찬 모습으로 그 뒤를 따랐다. 묵용감이 어렵게 시간을 내어 그녀를 데리고 유람을 왔는데 어찌 즐겁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계속 앞으로 갈수록 그녀는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왠지 낯설지 않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주변을 자세히 살펴보던 그녀는 갑자기 더욱 빠르게 앞으로 나아갔고 이내 산길을 따라 질주하기 시작했다. 비록 연약해 보이는 체구였지만 산길을 오르는 발걸음은 제법 안정적이었다. 언덕을 넘어 커다란 나무를 꺾어 돌자 탁 트인 공간이 나왔다. 그녀의 기억 속 모습과는 한참이나 달라져 있었다. 으리으리한 묘지가 눈앞에 떡하니 나타난 것이었다.
그녀는 눈을 비비며 믿기 힘들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입을 살짝 벌린 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묵용감이 어느새 곁에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살짝 토닥였다.
“내게 데려와 달라 하지 않았소. 뭘 그리 넋을 놓고 있소.”
백천범은 목이 메어 왔다. 발을 들어 올렸지만 천근같이 무거워 발걸음을 옮기기가 쉽지 않았다.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간 그녀의 얼굴은 이미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무덤 앞에 다가간 그녀가 털썩 무릎을 꿇어앉았다.
“유모, 천범이가 유모 보러 왔어.”
하고 싶은 말들이 많았지만 목이 메어 목 놓아 우는 것밖엔 하지 못했다. 가만히 서 있던 묵용감은 심장이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그녀가 울 것이라고 예상하긴 했지만 막상 서럽게 우는 모습을 보니 생각 이상으로 괴로운 기분이 들었다. 그는 그녀가 마음껏 울게 내버려 두었다. 충분히 울고 나면 분명 마음이 한결 편해질 것이었다.
유모가 죽던 그해, 그녀는 하인에게 돈을 주고 유모가 이곳에 묻힌 사실을 알아냈다. 유모가 죽은 지 이레째 되는 날, 몰래 저택을 빠져나온 그녀는 제사용 초를 산 뒤 커다란 수송용 마차를 타고 나와 어렵게 작은 무덤을 찾을 수 있었다.
그날 그녀는 무덤 앞에 한참을 쪼그려 앉아 있었다. 처음에는 울다가 나중에는 끊임없이 재잘거렸다. 유모가 떠난 이후 그녀의 삶이 그렇게 참혹하지만은 않았다는 것, 그녀 스스로 잘 돌볼 수 있다며 유모에게 안심하라고 말했다. 하고 싶은 말을 모두 마친 그녀는 더욱 자신감이 생겼다.
그녀는 서러움과 슬픔을 허공에 날려 버리고 눈물을 닦은 뒤 씩씩하게 산을 내려갔다. 그녀는 나중에 유모의 묘를 더 으리으리하게 단장해 주기로 다짐했다. 오석烏石으로 묘비도 세워 주고, 이금泥金(아교에 개어 만든 금박 가루)으로 이름까지 멋지게 새겨 주고 싶었다. 그런데 그녀가 손도 대기 전, 묵용감이 완벽하게 그녀의 다짐을 이루어 준 것이다.
한참 눈물을 쏟아 냈지만 백천범의 두 눈엔 아직도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그녀는 바닥에 쪼그려 앉아 초에 불을 붙이는 묵용감을 멍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의 손에는 제사용 지전紙錢도 들려 있었다. 또 한 차례 크게 감동한 그녀는 소매로 눈물을 닦고 서둘러 그를 도와 제사상을 차렸다.
간식과 과일로 차린 제사상이었지만 제법 근사했다. 백천범은 향을 들고 공손하게 삼배를 올린 뒤, 무덤 앞에 향을 꽂았다. 묘비에는 「현비顯妣 유인孺人 손孫 씨 이곳에 잠들다. 수양딸 백천범으로부터」라고 적혀 있었다.
오석으로 만들어진 묘비에 이금으로 새겨진 글자까지, 그녀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정말 그녀가 다짐했던 일이 모두 이루어져 있었다.
뒤에 서 있던 묵용감이 그녀를 일으켰다.
“무릎은 꿇을 것 없소. 성의가 담겨 있으면 된 것이오.”
백천범은 뒤를 돌아 곧바로 그의 품 안에 뛰어들었다.
“왕야, 저에게 잘해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앞으로 왕야를 공경하며 잘 모실게요.”
묵용감은 그녀의 가녀린 어깨를 감싸 안았다. 하지만 그녀의 말은 그와 그녀의 유모를 한데 묶는 것처럼 이상하게 들렸다. 괜스레 기분이 불쾌해진 그가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하, 왕비의 공경 따윈 필요 없으니 어서 빨리 자라기나 하시오.”
“알겠어요. 얼른 커서 잘 모실게요.”
어쨌든 그 말이 그 말이었다. 묵용감은 허탈함에 그녀의 등을 두어 차례 토닥이며 말했다.
“늦었으니 그만 돌아가는 게 좋겠소.”
백천범은 꾸물거리며 말했다.
“유모랑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그런데 저쪽에서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안 돼요?”
묵용감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무슨 말이길래 내가 없는 곳에서 하려는 것이오? 내가 들으면 안 되는 말이오?”
백천범은 얼굴을 살짝 붉히며 그를 밀어냈다.
“왕야, 잠깐만요. 잠깐이면 돼요.”
묵용감은 하는 수 없이 자리를 떠나 나무 뒤에 숨어 그녀를 지켜보았다. 백천범은 땅에 쪼그려 앉아 옅은 미소를 띤 채 자그마한 입을 오므렸다 폈다 하며 끊임없이 재잘거렸다.
“…난 지금 정말 잘 지내. 왕야의 저택에서 지내는데 왕야께서 친오빠처럼 잘해 주셔. 생선이랑 고기도 배불리 먹고 능라 주단으로 만든 옷만 입어. 엄청 큰 처소에서 묵는데 착한 하인들도 있어.
유모가 너무 빨리 가서 아쉬워. 안 그랬으면 유모도 같이 행복하게 지낼 텐데. 내가 너무 안 커서 유모가 맨날 걱정했잖아. 내가 어릴 때 너무 고생해서 안 크는 거라고 말이야. 근데 며칠 전에 시녀가 키를 재 주었는데 두부껍질만큼 컸대.”
백천범은 북받쳐 오른 감정에 잠시 숨을 고르다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나 무술도 배웠어. 몰래 숨어서 배운 게 아니라 진짜 대단한 사부님을 모시게 됐어. 더 열심히 배우면 앞으로 다른 사람들이 업신여길 일은 없을 거야.
왕야께서는 배울 필요 없다고, 자기가 지켜 주면 아무도 날 괴롭히지 못할 거라고 하는데, 난 내가 할 줄 아는 게 더 좋을 것 같아. 왕야께서 내게 잘해 주시긴 하지만 언제고 늘 나만 돌봐 주실 수는 없잖아. 그리고 나도 왕야를 번거롭게 만들기는 싫어.”
백천범은 늘 제게 잘해 주는 묵용감을 떠올리며 유모에게 말했다. 얼른 커서 그에게 은혜를 갚아야겠다고 다시금 다짐했다.
“유모, 나 머리도 올렸어. 왕야께서 내가 조금 더 크면 날 내보내 주신대. 좋은 낭군도 찾아서 시집도 보내 주신다고 했어. 실은 이미 점찍어 두신 신랑감이 있는데 나랑 인연이 깊은 사람이야. 지난번에 우두산까지 찾아와서 날 구해 준 사장풍이란 사람이거든.
지금은 구문제독이라고 별로 높지 않은 관직에 있지만 가족을 먹여 살리는 건 문제 없을 거야. 외모도 시원시원하게 생겼고, 나한테도 잘해 줘. 지난번에 내가 키우던 닭을 잃어버렸는데 사부님한테 부탁해서 나한테 닭 조각상을 선물해 줬어. 이렇게 자상한 걸 보면 좋은 신랑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그녀가 소매에서 닭 조각상을 꺼내 보였다.
“이거 봐, 아주 예쁘지? 사부님이 그러는데 구문제독님이 직접 조각한 거래. 난 수를 놓은 주머니를 선물했고, 구문제독님은 닭 조각상을 선물했으니 어쨌든 사랑의 증표인 셈인가 봐.”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환하게 웃었다. 그때, 갑작스레 커다란 손이 그녀의 조각상을 낚아챘다.
고개를 들어 보니 다름 아닌 묵용감이었다. 그는 조각상을 손에 쥔 채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이 이상한 것은 어디에서 난 것이오?”
백천범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어디가 이상해요. 예쁘기만 한데.”
묵용감은 그대로 손을 휙 뿌리쳤다.
“이렇게 이상한 건 버리시오. 다음에 더 좋은 걸로 사 주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