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9화
중문에 다다르니 묵용감은 이미 말에 올라타 있었다. 꽉 조인 각반(발목에서부터 무릎 아래까지 돌려 감거나 싸는 띠)이 도포 자락 아래로 드러났다. 목이 긴 장화를 신은 그의 발은 발걸이를 밟고 있었다.
백천범은 환한 미소를 지은 채 손을 흔들며 그에게 인사했다.
묵용감이 헛기침 소리를 내며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서 가마에 타시오. 이제 가야 하오.”
백천범은 가마에 앉자마자 고개를 밖으로 내밀고 그를 불렀다.
“왕야.”
묵용감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물었다.
“무슨 일이오?”
“나중에 제게 말 타는 법 좀 가르쳐 주세요.”
묵용감은 말을 탄 채 가마에 가까이 붙으며 물었다.
“말을 타고 싶소?”
“말을 타는 게 가마를 타는 것보다 편한 것 같아요. 지난번에 한 번 타 보긴 했는데, 너무 빨리 달려서 다리가 다 까지더라고요.”
묵용감의 안색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지난번 사장풍이 우두산에서 그녀를 데려올 때 두 사람은 말 한 필에 함께 올라탄 채 먼 길을 돌아왔다. 그렇게 오랫동안 바짝 붙어서… 그녀의 다리가 다 까지기까지 했다.
그는 아무 말도 없이 그대로 말에서 내리더니 가마에 타고 있던 그녀를 안아 들고 말 위에 앉혔다.
백천범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지금 가르쳐 주시려고요? 하지만…….”
그는 다시 말에 올라타 그녀를 품에 가볍게 끌어안았다. 그의 안장은 아주 커서 두 사람이 함께 앉고도 여유가 있었다. 물소 가죽으로 만든 안장은 부드럽고 매끈해서 다리가 까질 일은 없었다.
그가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있으니 아무 일도 없을 것이오.”
묵용감이 학평관에게 눈짓을 보내자 그는 곧장 하인들에게 뒤에 물건을 실으라고 분부했다. 모든 준비가 끝난 뒤, 묵용감이 채찍을 휘두르자 말은 발굽 소리를 내며 저택 입구를 빠져나갔다.
고청접은 멀찍이 떨어진 나무 아래에서 원망에 가득 찬 눈빛으로 말에 탄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이미 모퉁이를 지나 시야에서 사라진 뒤였지만, 그녀는 이후로도 한참을 더 서 있었다.
자초가 조용히 말했다.
“마마, 돌아가시지요. 햇빛이 강해 밖에 너무 오래 계시면 좋지 않습니다.”
고청접은 그제야 시선을 거두었다.
“저 두 사람이 어디를 가는 것인지 알아냈느냐?”
자초가 더듬거렸다.
“물어보긴 했지만 회림각 하인들은 입이 무거워 은자를 줘도 통하지 않사옵니다.”
고청접이 어금니를 꽉 깨물며 천천히 후원으로 발길을 옮겼다.
“가동과 백천범의 사이가 좋다 하였지?”
“예. 소인이 듣기로 둘은 사제 간이라 하옵니다. 한번은 오밤중에 후원 꽃밭에서 밀회를 가졌다가 붙잡힌 적도 있다고 하옵니다. 왕야께서 크게 노하셨는데 나중에는 흐지부지되었다더군요.”
고청접이 코웃음을 쳤다.
“그런 일도 참을 수 있다? 마음이 참으로 넓으시구나.”
“그리고 또 한번은 왕야께서 가동에게 벌로 채찍 서른 대를 내리셨다고 합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그것도 백천범과 관련이 있었다고 하옵니다.”
초왕이 참을 수 있던 이유는 직접 그 실체를 보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고청접은 입꼬리를 올려 음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무리 백천범이라도 이렇게 운이 좋을 수만은 없었다.
“계속 알아보다 또 다른 소식이 있거든 본비에게 알려 주거라.”
“예. 알겠습니다.”
자초가 공손하게 말했다.
* * *
묵용감은 백천범을 데리고 큰길을 따라 유유히 달렸다. 어린 계집은 몸을 꼿꼿이 세운 채 목을 길게 빼고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녀의 좁은 어깨를 바라보던 묵용감은 그녀의 어깨뼈가 옷 위로 툭 튀어나와 있자 마음이 쓰렸다. 다른 집 아가씨들은 날씬해도 성숙한 데가 있는 반면, 그녀는 고생을 많이 한 탓에 열넷의 아가씨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아이 같은 모습이었다.
그녀가 사랑스러웠던 그는 그녀를 어루만지고 싶은 마음에 손을 뻗었다. 그때 백천범이 갑작스레 뒤를 돌아보았다. 묵용감의 손이 허공에 정처 없이 떠 있었다. 새까만 그녀의 눈을 마주하자 갑작스레 당혹감이 밀려든 그는 천천히 손을 내려놓았다.
“무슨 일이오?”
그가 물었다.
“어디로 가는 것인지 아직 말씀 안 해 주셨잖아요.”
그는 뜸을 들이며 말했다.
“도착하면 알게 될 것이오.”
앞쪽은 떠들썩한 큰 길가였다. 그는 그녀를 품에 끌어안고 커다란 망토로 꼼꼼하게 감싼 뒤 얼굴을 반 정도만 내밀 수 있을 정도로 열어 두었다.
백천범은 발버둥 치며 망토를 벗으려 했다. 그는 그녀를 더욱 꽉 끌어안았다.
“움직이지 마시오. 당신은 왕비오. 그리 쉽게 얼굴을 드러내선 안 되오.”
백천범은 그제야 가만히 앉아 중얼거렸다.
“다음부터는 머슴 분장을 하고 나오면 되겠네요.”
묵용감은 슬쩍 미소를 짓더니 힘껏 채찍을 휘둘렀다. 말이 말발굽을 세차게 내디디며 앞으로 달려가자 몸이 뒤로 쏠린 백천범은 그의 품에 바짝 기댈 수밖에 없었다. 묵용감은 한 손으로 그녀를 감싸 안고 한 손으로 고삐를 쥐었다. 그의 입가에는 또렷한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그는 온몸으로 햇빛을 맞으며 앞으로 질주했다.
얼마나 달렸을까, 그가 속도를 늦추며 부드럽게 물었다.
“힘드오?”
그녀는 몸이 심하게 흔들려 숨이 찼는지 가쁜 호흡을 몰아쉬며 그의 옷소매를 붙잡았다.
“괜찮아요.”
숨 가쁘게 달려온 두 사람은 어느새 외곽 지역에 다다랐다. 주변을 둘러보니 이삭이 여문 밀이 빼곡히 자라 있는 황금색 들판이 보였다. 다른 한쪽은 채소밭이었는데 한 두렁 한 두렁 정갈하게 작물이 자라고 있었다. 새파란 배추, 빨갛게 익은 고추, 자줏빛 가지까지… 꼭 그림에서나 볼 법한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백천범은 처음으로 새장을 벗어난 아기 새처럼 놀람과 기쁨으로 가득 찬 모습이었다. 묵용감이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리도 좋소?”
“좋죠. 예전에 유모가 고향 집 밭에 대해서 종종 얘기해 주었거든요. 기회가 되면 데리고 가 주겠다고 했는데. 아쉬워요…….”
점점 작아지는 그녀의 목소리에서 슬픔이 묻어났다.
“동쪽 외곽에 집이 한 채 있소. 나중에 왕비를 데려가겠소. 볼거리가 아주 많으니 왕비도 분명 좋아할 것이오.”
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약속 꼭 지키셔야 해요, 왕야.”
묵용감이 말했다.
“내가 언제 약속을 안 지킨 적 있었소?”
백천범은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지난번에 몽둥이를 보여 주신다고 해 놓고 안 보여 주셨잖아요.”
묵용감의 얼굴이 파랗게 질려 왔다. 입에 담지 못할 말이라도 들은 듯 그는 크게 당황한 표정이었다. 그는 서둘러 그녀를 앞으로 밀어내며 말고삐를 그녀의 손에 넘겼다.
“말 타는 걸 가르쳐 달라고 하지 않았소? 먼저 연습 삼아 몰아 보시오.”
좁고 울퉁불퉁한 안장에서 앞으로 밀려나자 그녀는 조금 화가 난 듯 뒤를 돌아보았다.
“안 보여 주시는 거면 안 보여 주시는 거지, 왜 성을 내세요.”
그녀가 짜증스럽게 몸을 뒤로 옮기며 말했다.
“말을 몰라고 하셔 놓곤 왜 밀치시는 거예요.”
묵용감은 헛기침을 하더니 빠르게 말에서 내려와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혼자 말 위에 남아 있던 백천범은 조금 무서워졌다.
“어, 어, 왕야. 가시면 어떡해요. 말이 앞발을 치켜들진 않죠?”
묵용감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
초조해진 백천범은 본능적으로 발에 힘을 주고 고삐를 꽉 붙잡았다. 그러자 말은 앞다리를 들어 올리더니 묵용감 곁을 지나 신나게 앞으로 뛰어갔다. 울상이 된 백천범이 고개를 돌려 그에게 소리쳤다.
“왕야, 살려 주세요!”
창백해진 얼굴을 보니 정말 겁을 먹은 모양이었다. 그가 손을 들어 크게 휘파람 소리를 내자 말이 천천히 멈춰 섰다. 그녀는 여전히 버려진 아이처럼 겁에 질린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묵용감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서둘러 말에 올라탄 그는 그녀를 품에 안고 낮게 속삭였다.
“또 심술을 부릴 것이오?”
백천범이 고개를 저었다.
* * *
햇빛이 딱 알맞게 내리쬐었다. 나뭇잎 사이로 뻗어 나온 햇살이 어깨에 닿자 적당히 따뜻했다.
백천범은 멍하니 서서 풀밭에 양탄자를 까는 묵용감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지油紙에 싸인 덩어리를 찬합에서 하나씩 꺼내 보니 전부 다 맛있는 간식이 담겨 있었다. 그는 간식을 잘 펼쳐 놓은 뒤, 작은 난로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러곤 작은 주전자를 난로에 올려 차를 끓였다.
모든 준비를 마친 그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백천범은 그 자리에 멍하게 서 있었다. 그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멍하니 서서 무엇 하는 것이오. 앉으시오. 배는 고프지 않소?”
처음에 백천범은 묵용감이 그녀와 함께 밥을 먹으려고 외출을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성 밖으로 향하자 어딜 가려는 것인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혹여 그가 화를 낼까 봐 또다시 묻지도 못한 채 배고픔을 걱정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음식을 준비해 오다니! 그녀는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게다가 바닥에 쪼그려 앉아 열심히 상을 차리는 그의 모습에 그녀는 마음이 따뜻해지며 왠지 모를 감동이 밀려왔다.
그는 정말 그녀에게 정성을 다해 잘해 주었다. 어찌나 잘해 주는지 가끔씩 그가 초왕이라는 사실을 까먹을 정도였다.
야외에서 밥을 먹은 적은 수없이 많았지만, 이렇게 크게 자리를 깔고 먹어 본 적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늘 차갑게 식은 찐빵이나 옥수수떡 따위를 꾸역꾸역 먹는 게 다였기에 바깥에서 따뜻한 음식을 먹을 거란 기대는 해 본 적조차 없었다.
그녀가 자리에 앉으며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왕야께서는 정말 세심하시다니까요. 앞으로 왕야와 함께 나올 땐 굶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어요.”
묵용감이 그녀를 흘겨보며 말했다.
“왕비를 굶긴 적 있다는 말로 들리오.”
그가 밤 떡을 건네며 말했다.
“먹어 보시오. 다 먹으면 차를 주겠소.”
백천범도 사리 분별은 할 수 있었다. 초왕이 자신의 시중을 들게 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밤떡을 먹으며 주전자 앞으로 가 물이 끓는지 확인했다. 물이 보글보글 끓어오르자 그녀는 찻잔을 준비했다. 먼저 뜨거운 물로 찻잔을 한 번 데운 뒤, 찻잎을 넣고 물을 부었다. 묵용감도 가만히 앉아 그녀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는 기분이 제법 좋아 보였다.
그녀는 차를 우려낸 뒤 공손하게 묵용감에게 건넸다.
“왕야, 차 드시어요.”
그는 가슴이 살짝 뛰었다. 뭔가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는 차를 받아 들고 아무렇게나 찻잎을 건져 냈다.
“앞으로는 왕야라 부르지 마시오.”
“그럼 뭐라고 불러요?”
묵용감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서방이란 말이 입가에 맴돌았지만 결국 내뱉지 못했다.
“기홍과 녹하가 가끔 부르는 것처럼 그냥 나리라 부르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