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178)화 (177/1,192)

제178화

추문은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총명한 큰아가씨가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는 듯했다. 지금은 그런 말을 할 때가 아니라 왕비에게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이번 고난을 넘겨야 재기할 기회가 생긴다.

보다 못한 월규가 끼어들었다.

“측왕비께서 하신 일이 아니라고 해도 소인이 왕비 마마를 구해 달라 청했을 때 어찌하셨습니까?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일부러 시간을 끌지 않으셨습니까. 만약 녹하 언니가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하인을 불러 주셨을 것입니까?

하인들도 그렇습니다. 찾는 시늉만 하다 모두 돌아가 버리고 애쓰는 기색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었지요. 이튿날 왕야께서 오시지 않았다면 왕비 마마께서는 목숨을…….”

노한 수원상이 책상을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까짓 게 뭔데, 감히 너 따위가 나에게 말을 섞는 것이냐?”

그때, 입구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밥을 굶었다 하지 않았소? 목소리는 힘이 넘치는군.”

깜짝 놀란 수원상이 뒤를 돌아보니 묵용감이 뒷짐을 지고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굳은 표정과 차가운 눈빛에 주변에 있던 모든 이들이 벌벌 떨기 시작했다. 백천범마저 목을 움츠리고 한쪽으로 물러났다. 묵용감이 화를 내면 그녀도 무섭긴 마찬가지였다.

무수리가 벽에 부딪혀 죽은 날부터 수원상은 모든 걸 포기한 상태였다. 숨길 필요 없이 자신의 성격대로 행동했다. 그녀는 백천범이 가장 싫었다. 이 재앙의 모든 원흉이 백천범이었기 때문이다. 기회를 틈타 그녀에게 복수를 하려 했건만 그새 묵용감이 찾아왔다.

그는 한 발짝씩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왔고, 그의 엄청난 기운에 그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원한이 아무리 크고, 죽음도 겁나지 않아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그가 두려웠다. 이 사내의 모든 온정은 오직 백천범에게만 향해 있었고, 그녀에게는 얼음 같은 차가움과 잔혹함만 줄 뿐이었다.

묵용감은 방 안에 들어온 뒤로 한마디도 하지 않고 찬합 안에 담긴 음식만 곁눈질로 훑어보았다. 이내 그가 백천범을 밖으로 끌어내더니 목소리를 깔고 작게 꾸짖었다.

“여긴 왕비가 올 곳이 아니오. 다음부터는 절대 찾아오지 마시오.”

“하지만…….”

그가 차가운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따위는 없소.”

백천범은 목을 움츠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수원상은 두 사람이 맞잡은 손만 노려보고 있었다. 당장 칼을 내던져 이어진 두 손을 잘라 내지 못하는 게 한스러울 뿐이었다.

그의 냉정한 얼굴을 본 그녀는 그의 묵인으로 부엌 하인이 이런 찬합을 들여보내는 것은 아닐지 의심스러웠다. 일말의 희망도 없어지자 그녀는 정말 절망스러웠다. 게다가 백천범에게 이런 우스운 꼴을 보였다는 생각에 죽고 싶을 만큼 분했다. 그녀의 드높은 자존심은 처절하게 짓밟혀 있었다.

증오에 휩싸인 그녀는 이를 갈며 찬합을 있는 힘껏 내동댕이쳤다. 그릇이 산산이 조각났다. 시녀들은 고개만 숙인 채 감히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했다. 그중 추문만이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

“마마, 대체 왜 그러시는 것입니까?”

화를 참지 못한 그녀는 추문의 뺨을 때렸다.

“누가 너에게 왕비를 찾아가라 하였느냐? 누가 이런 짓을 하라 했느냔 말이다!”

추문이 울면서 무릎을 꿇었다.

“마마, 소인은 마마께서 돌아가실 날만 기다릴 수 없었습니다!”

정원에 있던 백천범이 고개를 돌려 그들을 바라보았다. 묵용감이 그녀를 잡아끌며 말했다.

“왕비가 신경 쓰지 말아야 할 것은 신경 좀 끄시오.”

밖으로 나오자 고청접이 자초를 데리고 서 있었다. 두 사람을 본 고청접이 서둘러 예를 갖췄다.

“왕야와 왕비 마마를 뵈옵니다.”

백천범이 물었다.

“언니도 원상 언니를 만나러 온 거예요?”

고청접이 갑작스레 무릎을 꿇었다.

“소첩도 방금 측왕비의 식사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왕야께서 소첩을 믿고 집안일을 맡겨 주셨는데 이렇게 큰 실수를 저질러 면목이 없습니다. 소첩이 책임을 다하겠습니다. 부디 벌을 내려 주십시오, 왕야.”

묵용감은 그녀를 훑어보며 말했다.

“그리도 벌을 받겠다고 하니 가서 곤장을 맞으시오.”

“…….”

곤장과 채찍은 하인들을 벌할 때나 내리는 형벌이었다. 더한 짓을 저지른 수원상에게도 벌로 연금을 내렸으면서 그녀에게 곤장을 내리려 하다니? 고청접의 얼굴이 창백해지자 백천범이 천진하게 웃으며 말했다.

“언니, 무서워할 것 없어요. 왕야께서 농을 하신 거예요. 이렇게 큰 저택을 관리하려면 종종 신경 쓰지 못 하는 일이 생기는 법이죠. 앞으로 조금만 더 세심하게 관리하면 될 일이니 어서 일어나세요.”

백천범이 고청접을 일으켜 세우려 했지만, 묵용감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저지했다. 그러곤 그녀의 손을 잡아끌며 성큼성큼 자리를 떴다.

고청접은 입술을 깨문 채 멀어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가늘게 뜬 그녀의 눈에는 음흉한 눈빛이 서려 있었다.

자초가 그녀를 일으켰다.

“왕야께서 멀리 가셨으니 어서 일어나십시오.”

* * *

얼마 지나지 않아 묵용감은 주방에 사람을 보내 낙성각에 다시 찬합을 보내라고 지시했다. 예전처럼 세심하게 신경 쓰진 않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적당한 처사였다.

얼굴에 손바닥 자국이 선명하게 남은 추문이 물기 어린 눈으로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

“마마, 이것 보시어요. 왕야께서 그 망할 노비를 혼내 주셨나 봅니다. 새로운 찬합을 보내 주었어요.”

수원상은 조금 의외였다. 와서 아무 말도 하지 않던 묵용감이 하인에게 다시 분부를 내리다니. 그녀에게 완전히 무관심한 것은 아닌 듯했다. 그녀는 짧디짧았지만 아름다웠던 시간들을 또다시 떠올렸다.

그때 그의 곁에는 그녀밖에 없었다. 그는 날마다 그녀를 보러 왔고,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함께 정원을 가꾸었다. 비록 말수는 적었지만 그와 그녀는 정다웠다. 조금씩 전해지는 그의 따스한 인정에 그녀는 헤어 나올 수 없었다.

그녀는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는 게 좋았다. 찡그린 그의 미간이 좋았고, 일에 집중한 그의 표정이 좋았다. 그에게서 풍기는 땀 내음이 좋았고, 가끔이었지만 그와 마주치는 시선이 좋았다. 좋은 게 많아도 너무 많았다.

그때 그녀는 시간이 느리게, 조금만 더 느리게 흐르기만을 바랐다. 하늘에 걸린 태양이 영원히 기울지 않길 바랐다. 그의 땀을 닦아 주고 물을 건네며 휴식을 권할 때면 그는 의젓한 모습으로 고마움을 표현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존중하고 존경했다. 세상에 이보다 더 나은 기쁨은 없다고 여길 만큼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만약 백천범이 없었다면… 그녀의 일생은 완벽했을 것이다!

그날 이후, 수원상은 타락했던 지난날을 잊고 다시 이전의 모습을 되찾았다. 매일 옷을 갈아입고 화장을 하며 빈틈없는 모습을 유지했고, 묘시에 일어나 술시에 잠을 청했다.

날이 좋을 땐 정원에서 시간을 보냈다. 묵용감이 남기고 간 잡동사니를 정리하며 머슴에게 화단 주위로 돌을 쌓으라고 분부했고, 꽃과 나무에 물을 주었다. 여린 싹이 바람에 휘자 그녀는 가느다란 막대기를 꽂고 얇은 줄로 잎과 막대를 고정했다.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하인에게 시키지 않고 직접 처리했다.

여유로울 땐 화단 앞에 앉아 책을 읽거나 자수를 놓았다. 양말, 신발, 부채, 주머니 등에 매란국죽梅蘭菊竹의 수를 놓았다. 대부분 짙은 색 실을 쓴 것이었는데, 그 위에 수수한 색 실을 더해 정교하면서도 점잖아 보였다.

추문은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비록 차가운 성격이었지만 주인마님과 대감마님께 효심이 지극했고, 모든 언행이 예의 바르던 그녀였다. 그런 그녀가 처음으로 사내에게 마음을 빼앗긴 뒤 이런 꼴이 되어 버렸으니……. 추문은 차마 눈물이 앞을 가려 그녀를 제대로 보기 힘들었다.

정원에서 시간을 보내던 수원상은 종종 남월각에서 들려오는 백천범의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동네가 떠나갈 듯 즐거워하는 그 웃음소리는 수원상에게 자유로움 그 자체였다.

수원상은 햇볕도 들지 않는 적막한 공간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녀는 백천범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만약 그녀가 자유분방한 성격을 지녔다면 그녀의 인생이 달라졌을지 상상하곤 했다.

종종 그녀는 남월각 하인들이 묵용감에게 인사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맑고 시원시원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몇 마디 안 되는 말이었지만, 그 속에 담긴 기쁨과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

무슨 마력이라도 있는 것인지, 남월각에 들어가기만 하면 그는 진심으로 즐거워했다. 그가 낙성각을 찾았을 때와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이었다.

남월각을 찾은 그의 웃음소리는 맑고 또렷했으며 말투 또한 친근했다. 하지만 낙성각에서는 말도 거의 하지 않았고, 종종 몇 마디 나눌 때도 인사치레가 다였다.

어쨌든 다른 건 다른 것이었다. 수원상은 약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설령 그녀가 백천범 같은 성격이 된다 해도 그는 그녀를 백천범과 같이 대하지 않을 것이다.

먹구름이 서서히 밀려들며 날이 어두워지더니 멀리서 희미한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시녀에게 수틀을 정리하라고 분부한 뒤, 몸을 돌려 방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때, 투각된 벽 너머로 고청접의 모습이 보였다.

작고 동그란 구멍을 사이에 두고 두 여인의 시선이 마주쳤다. 처음 저택에 들어왔을 때만 해도 둘의 사이는 아주 좋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두 여인이 한 명의 지아비를 섬길 땐 좋은 사이로 지내기 어려웠다.

고청접은 옅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승자의 미소였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수원상은 입꼬리를 비틀어 올려 경멸의 미소를 지어 보인 뒤 그대로 발걸음을 돌렸다.

고청접은 자신이 승자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아니었다. 백천범이 있는 한 두 여인은 묵용감의 눈길을 받을 기회조차 없을 터였다. 그런데 어찌 승리를 논할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묵용감은 다른 이의 말에 쉽게 휩쓸리는 사람이 아니다. 고청접의 말로도 분명 그녀보다 낫진 않을 것이었다.

* * *

오랜만에 밝은 태양이 머리 위로 내리쬐는 맑은 날씨였다. 연못 속의 비단잉어들도 평소보다 즐겁게 헤엄치고 있었다. 백천범은 잉어 먹이를 들고 물 위에 가볍게 흩뿌렸다.

잉어들은 앞다투어 수면 위로 뛰어오르며 먹이 쟁탈전을 벌였다. 사방으로 튄 물보라가 햇빛을 받자 다채로운 빛이 반짝였다. 백천범은 줄곧 까르르 웃으며 즐거워했다.

학평관이 미소를 지으며 다가와 그녀에게 인사를 올렸다.

“왕비 마마, 물고기 먹이를 주고 계십니까? 왕야께서 돌아오셨는데 왕비 마마와 함께 출타하시겠다고 합니다. 가마는 밖에 준비해 두었습니다.”

백천범이 물었다.

“어딜 가는데요? 옷도 갈아입어야 해요?”

학평관이 그녀를 자세히 훑어보며 말했다.

“지금도 아주 잘 어울리십니다. 어서 소인과 함께 가시지요. 왕야께서 기다리십니다.”

저택 밖으로 나가는 건 백천범에게 있어 늘 즐거운 일이었다. 그녀는 먹이를 물에 쏟아부은 뒤, 월규가 건네준 물수건에 손을 닦고 기쁜 마음으로 학평관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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